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28화
-르네상스-
6. 보여주는 사람(7)
한 달 전.
“모르겠어. 장미래라면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라던데 정말 그런 짓을 할까.”
논개 추모 사업에 헌신했던 최길석은 최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표준영정이 소실된 일만으로도 한스럽거늘, 장미래가 논개를 기생으로 그린다는 소문이 문중에 퍼지고 있었다.
“김은호 또한 당대 최고의 인물화가였죠.”
최규서가 도끼눈을 떴다.
“이름 있는 화가라고 제대로 그렸다면 처음부터 이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김은호가 그린 논개 영정은 수많은 논쟁을 낳았다.
친일파 화가였던 김은호가 논개의 호국정신을 모독하였다, 논개를 기생으로 그렸다, 고증이 이뤄지지 않았다 등 여러 지적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최길석이 침음에 잠겼다.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는데 앉아서 지켜만 보실 생각이십니까?”
“그러리란 보장이 없잖니.”
“대답조차 못 받지 않았습니까. 설마 전화 몇 통 했다고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최규서가 최길석을 몰아붙이자 함께 있던 문중 사람들이 역정을 냈다.
“오냐 오냐 했더니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큰할아버지께 이 무슨 버릇 없는 짓이냐!”
최규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족한 제가 사태의 심각성을 전달하려고 하다 보니 실언을 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크흠.”
“하지만 이번에 표준영정이 잘못 제작되면 또 50년을 싸워야 할 겁니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최규서의 절절한 태도에 문중 사람들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친일파 화가 김은호의 영정을 내리기까지 50년이 걸렸거늘.
또 같은 일이 반복될 순 없었다.
한 남자가 나섰다.
“그 듣자 하니 확실히 근래 들어 헛소리하는 사람이 늘긴 한 것 같습니다.”
“헛소리라면?”
“기생이라는 말 외에 또 있겠습니까.”
“허어. 참.”
“규서가 표현을 좀 과격하게 했지만 말 자체는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응책은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중 사람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최규서가 내심 미소 지었다.
논개 표준영정이 잘못 만들어진다는 주장에 근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나이가 지극한 문중 사람들로서는 다시금 기나긴 싸움을 할 여력이 없었다.
아주 작은 걱정만 전해주더라도 알아서 불안을 키울 터였다.
“그럼 어쩌면 좋겠나.”
최길석이 문중에 의견을 물었다.
“만에 하나 잘못된 영정을 가지고 나온다면 막아야겠지요.”
“그런 방법으로는 또 몇십 년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다시 연락해서 처음부터 제작에 동참하는 게 맞아요.”
“그쪽에서 연락을 안 받는데 어쩔 도리가 있습니까.”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최규서가 나섰다.
문중 사람들은 의심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의견을 물었다.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여러 번 연락했음에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미 저쪽에 붙었다고 생각해야겠지요.”
“저쪽이라니?”
“뻔하지 않습니까. 김은호처럼 논개를 기생으로 그렸겠죠.”
문중 사람들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방법은 있습니다.”
최규서가 최길석을 보며 말했다.
“표준영정 제작을 한 사람이 맡는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됩니다. 기존 영정 또한 공모를 통해 선정되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문중에서 나서서 표준영정 채택 과정의 불합리함을 제시해 주세요.”
“으음. 그거야 해볼 수 있지만 과연 받아들여질지.”
“아뇨. 분명 받아들일 겁니다. 장미래라면 더더욱이요.”
최규서는 확신했다.
장미래와 백설기가 대한예술협회를 공격했던 방식이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작가 선정하는 과정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던 장미래가 이번 일을 거절할 리 없었다.
그럴 입장이 못 되었다.
최규서는 자신을 무너뜨린 방식 그대로 장미래와 백설기에게 복수할 생각이었다.
“만약 공모작 중에 바른 영정이 없다면 어쩔 텐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최규서가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녀가 함께 있던 수행원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녀의 논개 영정이 공개되자 최씨 문중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숙하고 인자하면서도 지조와 절개를 품은 여인이 서 있었다.
“오오.”
“저고리와 치마 길이가 1 대 1 비율인 점과 같이 가체, 화장 방식 모두 철저히 고증하였습니다.”
수행원이 최규서의 영정을 조목조목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양처의 모습에 문중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했다.
“이거. 이대로 봉안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훌륭하군.”
영정을 확인한 문중 사람들이 호감을 보였고, 최규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르신들께서 지켜오신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최규서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은 장미래를 밟고 다시 일어나기 위해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최씨 문중과 장수군, 진주시에 사안의 중요성을 거듭 전파했고.
반대로 역사가 몇몇을 선동하기도 했다.
장미래가 논개가 기생이었냐, 양첩이었냐는 프레임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최규서는 최씨 가문, 장수군, 진주시의 도움을 받을 터.
장미래를 제치고 표준영정을 봉안하게 된다면 더럽혀진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보다 통쾌한 복수도 없었다.
“흐음.”
최길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공모 이야기는 내 시장님하고 이야기할 테니 다들 그렇게 알게.”
* * *
논개 표준영정 발표회 당일.
행사장은 문화체육관광부, 진주시, 장수군 관련 인사와 미술계, 사학계 그리고 언론인으로 북적였다.
취재를 나온 이인호 기자는 주변 인파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큰 행사긴 하네. 엄청나구만.”
몇 주째 이어진 논쟁 때문에 분위기가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진주시와 장수군 관련 사람들과 사학자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냥 끝날 것 같지 않은데.’
이인호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양측이 크게 대립하는 가운데, 장미래와 최규서가 어떤 영정을 보일지에 따라 논란은 더욱 불거질 터였다.
‘기생으로 그릴 가능성은 적어.’
이인호는 장미래와 최규서의 입장을 모두 고려했다.
진주와 장수, 최씨 가문에서 논개양첩설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위인 논개를 굳이 기생으로 표현할 이유는 없었다.
적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럼 기존 영정처럼 표현할 텐데.’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표현력.
이미 기존 표준영정에서 복식 등의 고증이 충분히 이루어졌으니, 실력만이 판결을 가를 수 있었다.
‘문제는 최규서가 최씨라는 점이겠지.’
비슷한 영정이라면 최씨 문중에서는 최규서에게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최씨 문중의 목소리가 닿는 지역 사회도 마찬가지일 테니 최규서에게 유리한 구도였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한 거야.’
이인호는 최씨 문중이 표준영정 작가 선정에 이의를 제기한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최규서의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편.
아침 일찍 진주로 내려온 고훈과 고수열, 방태호는 장미래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미래야.”
눈 주변이 어둡고 볼이 잔뜩 파여 있었다.
“오셨어요. 우욱.”
“술 마셨어요?”
고훈이 술 냄새를 맡고 물었다.
“응. 잠이 잘 안 와서.”
“쯧쯧. 사람을 잡는구나. 잡아.”
장미래가 물을 들이켰다.
“괜찮아요. 숙취 때문에 그런 거니까.”
“발표회 끝나면 다른 생각 말고 한동안 푹 쉬어야겠어. 이러다 큰일나.”
“그러고 싶어요.”
장미래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방태호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일. 최규서가 움직였다는 소문이 있던데, 알고 계십니까?”
방태호의 말에 고수열이 깜짝 놀랐다.
“그게 사실이냐?”
“글쎄요. 설기랑 이야기하다가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긴 했는데. 모르죠.”
고수열이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자 장미래가 씩 웃었다.
“괜찮아요. 공모에서 제가 질 리가 없잖아요.”
방태호는 최씨 문중과 진주시, 장수군을 등에 업은 최규서가 유리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맞아요. 진심은 통하는 법이에요.”
고훈이 나서서 장미래를 격려했다.
그녀가 논개 영정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노력했는지 알기에 굳게 믿었다.
“곧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니 내빈 여러분께서는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발표회 진행자가 행사 시작을 알렸다.
“행사에 앞서 최길석 논개 추모회 회장님의 축사를 듣겠습니다.”
최길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에 인사했다. 무대로 올라서고는 힘주어 말했다.
“1593년 진주는 왜적을 상대로 외롭게 분투했습니다.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도우러 온 조선군도 포기할 정도로 열세였습니다.”
노인의 발음은 다소 부정확했다.
“아주 용감히 싸웠지만 끝내 진주 백성 6만 명이 학살당했고. 의암 주논개께서는 왜장 기다 마고베를 진주성 앞 남강으로 유인하셨습니다.”
그러나 논개를 기리는 마음만큼은 절절하여 청중들은 최길석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런데 기생이라는 오해 때문에 사서에도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진주 백성들이 직접 기렸던 거예요. 영조 때 이르러서야 의로운 기생을 기린다는 뜻의 의기사가 세워졌지만 해방 이후엔 친일 화가에 의해 영정이 제작되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한 괴한에 의해 소실까지 되었죠.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이 이렇게 오늘날까지 고통받고 있습니다.”
최길석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디 오늘로써 그분이 지하에서나마 편안히 주무실 수 있도록 바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노인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행사장을 찾은 모든 사람이 박수를 보냈다.
“진심이 묻어나오는 당부 말씀 감사합니다.”
진행자가 나섰다.
“앞서 최길석 씨가 말씀하신 대로 논개 표준영정은 그분을 추모하고 기리는 과정으로 특히나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영정 심사위원을 맡아주신 분을 한 분, 한 분 소개하겠습니다.”
진행자가 11명의 심사위원을 소개하자 방태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중립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 5명이었고 6명은 최씨 문중과 연이 닿은 사람들이었다.
‘이거 안 좋은데.’
방태호가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는 와중에도 행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그럼 영정 제작에 힘써주신 장미래, 최규서 화가를 모시겠습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묘한 기류 속에서 장미래와 최규서가 단상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