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53화 (35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27화

-르네상스-

6. 보여주는 사람(6)

다음 날.

앙리 마르소는 껄끄러운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맞선 상대였던 안 페이셰르 웬델이 만남을 요청한 탓이었다.

비비안 이스트우드의 새 드레스를 함께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이미 수많은 업체에서 비슷한 일을 제안했지만, 앙리 마르소는 본인 취향의 슈퍼카를 제작하는 일 외에 수락한 바 없었다.

본인의 작품이 완벽하다고 자부하기에 완성본 이외의 방식으로 활용되길 거부한 탓이었다.

처음부터 새로운 작품을 만들자는 제안은 거치적거릴 뿐이었고, 디자인 권한을 모두 넘기겠단 조건에는 응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도 무시하면 될 텐데.

앙리 마르소는 얼마 전 안 페이셰르 웬델과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누구를 상대하든 거칠 것이 없었던 앙리도 그날 일만큼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불쾌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비서 아르센을 불렀다.

미셸과 결혼을 앞둔 지금 이 문제를 계속 끌고 갈 순 없었다.

“네, 작가님.”

“비비안 이스트우드 일 날짜 잡아.”

아르센이 내심 놀랐다.

그 어떤 업체의 요청에도 반응하지 않았던 고용주가 직접 만나겠다고 하니 의아했다.

그러나 충직한 비서는 굳이 속내를 묻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며칠 후 안 페이셰르 웬델이 앙리 마르소 측에서 준비한 장소를 찾았다.

웬델은 험상궂은 얼굴로 앉아 있는 앙리를 향해 미소 지었다.

“반가워요.”

“……앉지.”

두 사람 사이에 음료가 놓였다.

앙리 마르소는 아르센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내보냈고 웬델 또한 함께 온 비서 레아에게 눈짓했다.

“차분히 이야기하기는 처음이네요. 그간 잘 지내셨던 것 같던데.”

“안부나 묻자고 마련한 자리가 아닐 텐데.”

앙리 마르소가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날 일은 내 잘못이다. 체면을 세워야겠다면 무엇이든 들어주지. 다만.”

앙리가 눈을 치켜떴고 웬델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일을 빌미로 내 작품을 얻어갈 생각은 하지 마.”

웬델 가문과 안 본인에게 수치심을 준 일은 잘못을 인정했다.

금전적인 보상을 원한다면 기꺼이 응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협업은 이야기가 달랐다.

본인의 예술관과 가치관을 건드는 일이었기에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같은 생각이라 다행이네요.”

와인이 찰랑거리는 유리잔 너머로 웬델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 이유로 당신을 섭외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요.”

패션계의 대모 비비안 이스트우드의 뒤를 이은 디자이너로서 사적인 문제를 끌고 올 순 없었다.

직접 재단한 오브제에 이끌려야만 협업에 의미가 있었다.

앙리 마르소는 웬델의 의중을 파악했고, 그녀를 다시 보았다.

본인과 본인 일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뭘 원하지.”

말은 여전히 딱딱했으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글쎄요. 참. 이번에 고훈 씨와 함께 찍은 영상 재밌게 봤어요.”

“…….”

“몰랐던 내용도 있고. 두 분이 대화하듯 풀어내니 듣기도 편했고요.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웬델이 씩 웃었다.

“고훈 씨만 머리띠를 하고 있는 게 불편해서요. 다음 영상에선 사이좋게 함께 쓴 모습을 보고 싶어요.”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분명 좋은 반응이 나올 거라 생각하는데. 어때요?”

설마 이러한 방식으로 치욕을 돌려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마르소 가문의 주인이 스스로 꺼낸 말을 무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앙리 마르소는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하지.”

“기대할게요.”

앙리는 여유롭게 와인을 마시는 웬델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해결할 일을 마무리 지었고 그녀와 함께 있을 이유는 없었다.

“먼저 돌아가지.”

“드레스는 생각해 보셨나요?”

앙리 마르소가 일어나자 웬델이 태연히 물었다.

“거절이다.”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앙리 마르소가 콧방귀를 뀌었다.

웬델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의상 디자이너고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뿐.

어울릴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쪽에나 좋은 이야기겠지.”

웬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비비안 이스트우드 사후, 조금씩 입지를 잃어가는 기업을 부활시키고자 그녀는 여러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몇몇 업체가 주도한 패션계 흐름을 되돌리고자 크게는 새 레이블 창설, 기존 브랜드 이미지 변화 등을 노렸고 작게는 직원들이 효율적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하고 있었다.

현재 미술계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고훈, 앙리 마르소와의 콜라보레이션 또한 그 일환이었다.

웬델로서는 어떻게든 두 사람을 잡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요.”

앙리가 콧김을 내쉬었다.

“그럼. 당신이 내게 뭘 해줄 수 있지?”

“웨딩드레스요.”

웬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앙리 마르소와 결혼하는 사람만 입을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웨딩드레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웨딩드레스. 필요하지 않나요?”

앙리 마르소가 꽉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첫인상 그대로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거래할 줄 아는군.”

세계를 상대하는데 이 정도는 기본 소양이었다.

“그럼요.”

웬델이 다시 미소 지었다.

앙리 마르소는 밖에서 대기하던 아르센을 불러 저녁을 내오라고 지시했다.

짧게 끝나리라 생각했던 저녁 미팅이 제법 오래 걸릴 듯했다.

* * *

-그럼 계약은 일주일 뒤에.

“네. 연락드릴게요.”

한국으로 가기 전 웬델과 통화를 나누었다.

계약서를 최종 검토했고, 한국 여행을 다녀온 뒤에 계약서를 쓰기로 약속했다.

생각보다 확인하고 조율할 조항이 많아서 한국 가기 전에 색깔 이야기 영상을 못 찍은 게 아쉽다.

“웬델 씨였어요. 한국 갔다 와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 그래. 서두를 필요는 없지. 가만있자. 옷이라……. 할애비가 입을 수도 있나?”

내심 기대하시는 눈치다.

“이것저것 시도해 보려고요. 옷 하나 만드는 게 아니라 아예 레이블을 차리는 일이니까.”

“흐음. 그쪽 일은 잘 몰라도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옷을 한 벌만 파는 건 아니잖니.”

“그렇긴 한데 앙리도 한다고 하니까 힘들진 않을 것 같아요.”

“마르소가?”

“네.”

재주도 좋지.

도대체 어떻게 구슬렸는지 앙리도 함께하기로 했단다.

파리로 돌아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볼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훈아, 정말 비서 안 뽑을 거야?”

방태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네. 이력서 보니까 다들 너무 대단하더라고요. 사실 운전이나 수행 정도만 부탁드릴 건데 부담스럽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야. 오죽하면 그런 스펙에 지원하겠어. 업무 내용도 공시해 뒀고 부담 가질 일 아니야.”

한 번 더 고민했지만 역시 무리다.

“어차피 거의 작업실에만 있잖아요. 비서 채용할 돈으로 갤러리 직원분들 급여 조금이라도 더 드리는 게 좋겠어요.”

“그래.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네. 지원하신 분들껜 사과 메시지라도 보내주세요. 작은 선물도 같이요.”

“걱정 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공항에 도착했다.

내일이면 짜장면과 삼겹살, 막국수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 설렌다.

“방 대표, 미래 발표가 언제였는지 기억하나?”

“수요일 오전 10시입니다. 아침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자네도 오랜만에 귀국하는데 좀 쉬어야지 않겠나. 나랑 훈이 둘만 가도 괜찮네.”

“쉬더라도 그 자리를 놓칠 수 있나요. 요즘 다들 논개 표준영정 이야기만 하던데요.”

말 그대로 시끌벅적하다.

장미래는 대응하지 않는데, 저들끼리 김칫국을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댄다.

역사를 왜곡하면 안 된다며 기생으로 그려야 한다든지, 논개를 최경회의 첩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든지 말하는 걸 보고 있으면, 신물이 난다.

서로 다른 가치관이 대립하는 사이에서 장미래가 괜한 피해를 입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아니야.’

내가 아는 장미래라면 분명 멋진 영정을 보여줄 것이다.

그녀만큼 세상을 따뜻하고 공정히 바라보는 사람도 드물다.

* * *

“인간이 미워.”

“어?”

“다 죽었으면 좋겠어.”

논개 표준영정 발표를 하루 앞두고 장미래는 잔뜩 지쳐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의 의중을 물어보는 사람이 연락을 취했고 심지어 그중에는 협박성 메일도 있었다.

대학과 조합 등 여러 일로 지친데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쌓이니 불면증이 찾아왔고.

술에 기대 잠들기를 반복하다 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만 좀 마셔. 내일 어쩌려고 이래.”

후배이자 동료 작가 백설기가 소주잔을 빼앗았다. 안주도 없이 한 병을 마셔버린 그녀가 걱정되었다.

“끄으윽. 끅.”

잔을 빼앗긴 장미래가 흐느꼈다.

항상 당당하던 선배가 서럽게 울먹이는 모습에 화가 났다.

백설기가 잔을 채우고는 소주를 단숨에 삼켰다.

“진짜 지들이 뭔데 난리야? 언니가 어떻게 그리든 그걸 왜 참견하냐고.”

“내 술…….”

“진짜 내가 다 화나서 못 참겠네. 어? 진짜 왜 그래?”

백설기가 연거푸 술을 마셨다.

장미래는 그녀를 말리려다가 백설기가 잔을 세게 내려놓자 흠칫 놀랐다.

“아니. 그게 그렇게 중요해? 사람을 이렇게 못 살게 할 정도로?”

장미래가 싱크대 주변 찬장에서 김을 꺼내 백설기에게 주었다.

“이거라도 먹을래?”

“줘 봐.”

김 한 장을 먹은 백설기가 또다시 소주를 따라 마셨다.

“처, 천천히 마셔.”

“지금 천천히 마시게 생겼어? 언니가 이 꼴이 됐는데? 대체 뭐야? 어? 왜 그런데?”

백설기가 마구 따지자 장미래의 화가 다소 누그러졌다.

이번 일의 부당함을 이해받는 듯했다.

“듣기로는 장수랑 진주에서 엄청 신경 쓰고 있나 봐. 관광지다 보니 이미지가 중요하잖아.”1)

“그러니까 그 이미지를 왜 현모양처에 누구 첩이라는 걸로 만드냐고. 충의지사잖아.”

“최씨 가문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하여간 최씨. 내가 최규서 이후로 최씨를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장미래가 피식 웃다가 점차 얼굴을 굳혔다.

말을 내뱉은 백설기도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아니야. 이게 이렇게까지 논란이 될 문제는 아니잖아? 언니가 표준영정을 어떻게 그리든 뭔 상관이야. 근데 지금 진짜 마녀사냥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니까?”

“규서가 한 짓이라고?”

“징역까지 살다 나온 애야. 언니랑 나한테 복수하고 싶어서 미친 인간이 무슨 짓이든 안 할 것 같아?”

“…….”

“내 말이 맞다니까? 가만있어 봐. 알아볼게.”

* * *

1)장수군, 진주시, 최씨 가문과 실제와 무관함을 재차 밝힙니다.

작중 내용일 뿐, 전국의 최 씨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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