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52화 (352/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26화

-르네상스-

6. 보여주는 사람(5)

비비안 이스트우드의 수석 디자이너 안 페이셰르 웬델과 만나기로 한 날이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약속 장소를 찾으니 미리 마중 나온 사람이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조심스럽네.”

방태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녁 공연도 여는 유명한 식당인데 평소와 달리 테이블을 치워두었다.

보안 때문인지 접대하는 직원 외에는 아무도 없이 고요하다.

“곧 모셔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직원은 음료를 가져다주고는 안 페이셰르 웬델을 데려오겠다며 사라졌다.

어떤 사람일지.

언론에 소개되기로는 비비안 이스트우드의 뒤를 이은 천재 디자이너라는데, 서른넷의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이끈다니 확실히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상상이 잘 안 돼요.”

“뭐가?”

“제 그림으로 옷을 만든다는 게.”

“하긴. 단순히 프린팅만 하진 않을 테고.”

그런 방식은 기대하는 방향과 너무 다르다.

“보통은 어떻게 해요?”

“보통이라고 해야 할지. 흔한 일은 아니니까.”

예술가와 패션 브랜드의 협업이 그리 잦진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효과가 좋진 않나 봐요.”

“왜?”

“돈이 됐으면 안 할 리 없잖아요.”

어떤 방식으로든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이 그런 일을 마다할 리 없다.

“글쎄.”

방태호가 스마트폰을 펼쳐 검색하니 관련 글과 사진이 상당히 많이 나왔다.

“흔치 않긴 해도 검색되는 게시물만 수백만 건이야. 내 생각엔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서 성사되기 어렵지, 분명 화제성은 있다고 봐.”

방태호가 이미지를 모아둔 게시물을 터치하며 말했다.

“이건 베르사체에서 만든 앤디 워홀 드레스인데, 제임스 딘하고 마릴린 먼로 그림 알지?”

현대미술에서 예술성, 대중성, 상업성 모두를 확보한 입지전적인 인물인 앤디 워홀을 모를 리가 없다.

사기꾼 혹은 장사치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앤디 워홀을 또 하나의 길을 연 예술가로 생각한다.

“어때?”

지아니 베르사체가 1991년에 발표한 팝아트 이브닝드레스를 보여주었다.

“어……. 재밌네요.”

너무나 독특한 외견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드레스에 고정 관념이 있었던 모양. 이브닝드레스로는 과하다 싶었거늘 보면 볼수록 괜찮다.

“이거 말고도 코치랑 키스 해링이 만든 지갑도 있고. 한국 작가 중에선 이불 작가님하고 디올하고 만든 것도 있어.”1)

“거울에 비친 자아가 흩어지는 모습을 향수에 비유하셨죠.”2)

짙고 차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안 페이셰르 웬델.

총기 가득한 눈과 생기가 흘러넘치는 입술도 매력적이지만, 입고 나온 옷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앙리가 사 주었던 첫 <해바라기>가 그려진 하얗고 긴 드레스다.

“반가워요. 고훈 작가님. 그리고 방태호 대표님.”

여유로운 미소로 인사한다.

“반가워요. 웬델 수석님.”

“웬델로 충분해요.”

“저도요.”

옷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대 많이 했는데 설마 입고 나오실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정말 놀랐다.

“옷은 입었을 때 완성되니까요.”

웬델은 자세히 보라는 듯 뒤로 물러났다.

저녁을 먹으면서 천천히 이야기 나눌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자연스레 본론으로 들어갔다.

“활동적이면서도 우아함을 강조했어요.”

소매가 없고 목 주변은 V라인으로 갈라져 있어서 확실히 편해 보인다.

허리선은 본래보다 높은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폭이 넓어져, 웬델의 설명대로 우아한 느낌이다.

놀라운 점은 내 <해바라기>가 처음 이 옷을 위해 그려진 것처럼 배치되어 있다는 것.

꽃은 왼쪽 가슴에 놓고 줄기는 치마 아랫단까지 이어진다.

허리선 부근에서 시작해 치맛자락 전체로 이어지는 줄기가 퍽 우아하다.

“팬톰에서 내년에 울트라 바이올렛을 올해의 색으로 선정할 계획이에요.”3)

팬톰이라고 하면 미국에 있는 색채연구소다.

근 40년 동안 올해의 컬러를 선정해 왔는데 보통 연말이나 되어야 발표될 정보를 벌써 알고 있다니, 과연 패션계 종사자답다.

다만 울트라 바이올렛이라면 노란색과는 보색 관계에 가깝다.

의아해하고 있으니 웬델이 빙그레 웃었다.

“누구나 다 하는 일에 어울릴 생각은 없거든요.”

그녀는 그것이 비비안 이스트우드의 철학이라고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울트라 바이올렛은 보라색과 남색 사이에 있는데, 정반대의 색상 중에 가장 아름다운 노란색을 찾았어요.”

그게 내 <해바라기>였다는 말이다.

“또 최근에 쇼콜라티에 뉴튜브 채널에 올리신 색 이야기도 흥미롭게 봤습니다. 노란색도 다루실 텐데 멋진 효과를 내겠죠.”

“예를 들면요?”

“이단자?”

디자이너답게 색을 잘 알고 있다.

노란색에는 정말 많은 의미와 상징이 있는데 그중 이단자라는 의미도 있다.

중세에는 금욕이 중시되어 부유함의 상징이었던 노란색은 사치스럽단 이미지가 붙기도 했고.

예수를 고발한 유다의 옷을 노란색으로 그리는 등 이단자를 나타내기도 했다.

“매해 몇몇 사람이 올해의 색을 정하고 그에 따라 수많은 상품이 쏟아지죠. 그들은 자신들이 유행을 주도한다고 말하지만 글쎄요.”

웬델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요.”

예술계에도 어느 정도 접목되는 이야기라 공감한다.

몇몇 예술가, 평론가 단체에서 시기별로 트렌드가 되는 작품을 발표하는데 그들이 선정한 작품이 주류로 여겨지게 되니.

대체 누구를 위한 예술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들은 꼭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이 본인뿐이고, 예술이 자신들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고훈 씨의 해바라기로 승부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메일을 받았을 때부터 느꼈지만 용건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말이 분명하다는 건 생각에 흔들림이 없다는 뜻이고 자신감과 자부심이 충만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실력도 뛰어난 데다가 숨기는 것 없이 당당하니 호감이다.

“전 항상 제 작품이 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길 바랐어요.”

시선을 마주해도 거북함이 없다.

신뢰를 주는 사람이기도 하나.

그림이 어느 개인에게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길 바라는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제 그림이 옷이 되어 더 많은 사람이 소장할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기쁜 일도 없을 거예요.”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려요.”

“물론이죠.”

웃으며 맞잡은 손에 제법 힘이 들어가 있고, 굳은살도 느껴진다.

분명 수없이 많은 옷을 디자인한 증거이리라.

“그럼 오늘 가안 정도 잡는 게 어떨까요.”

“네. 제가 먼저 말씀드리는 게 편하시겠죠?”

“감사하죠.”

방태호의 차례다.

이번 일의 수익을 어떻게 분배할지 정하는 중요한 일이다.

사실 기업과 기업 사이의 계약 내용을 외부자가 알아낼 방법은 많지 않은데.

특히나 이런 일은 흔치 않으니 적정선을 가늠하기 어렵다.

방태호의 역할이 크다.

“레아.”

웬델이 누군가를 불렀다.

비비안 이스트우드의 직원 레아가 나와 방태호 앞에 계약서 초안을 보였다.

“계약금 10만 유로와 판매 수익의 8%를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계약금은 다소 적지만 판매 수익의 8%라면 상당한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수치 자체보다는 무엇을 기준으로 했냐가 중요하다.

“무엇을 기준으로 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방태호도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가능하다면 다른 분과의 계약 내용을 공유해 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입장이라는 걸 잘 아실 거예요.”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이걸.”

레아가 웬델을 대신해 또 하나의 서류를 보여주었다.

웬델의 급여명세서인데, 1년 총액이 580만 유로나 되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계적인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라더니 수입도 어마어마하다.

“그중 450만 유로가 인센티브였고 제 수익 분배율은 8%예요.”

수석 디자이너와 같은 비율을 주겠다는 건 최대한 성의를 보였다는 말이다.

웬델이 굳이 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 것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제안했기 때문이고, 그걸 우리도 이해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리라.

여기서 더 요구하는 건 무리다.

“이거 더 말할 게 없겠는데요.”

방태호가 멋쩍은 듯 웃었다.

“다만 고훈 작가님의 이미지도 달린 문제라 디자인에 관련한 발언권은 확보하고 싶습니다.”

웬델이 잠시 고민한다.

능력 있는 디자이너이니 만큼 아마 자신의 목소리를 키우고 싶을 것이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라 일이 시작되기 전에 조율해 두는 게 좋다.

계약서에 명시한다면 더할 나위 없고 말이다.

“중요한 문제죠. 다음 미팅 때 추가하겠습니다.”

이후로도 방태호는 놓치기 쉽지만 중요한 조항을 확인했다.

쇼콜라티에의 대표답게 믿음직스럽다.

대강 조건을 조율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인기 많은 식당답게 아뮈즈 부슈(한입 요리)부터 훌륭하다.

관자에 양파와 하얀 소스를 얹은 요리는 아삭하고 쫄깃한 식감이 어우러져 앞으로 무엇이 나올지 잔뜩 설레게 했다.

“이제 와 말씀드리지만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뻐요. 팬이거든요.”

웬델이 고마운 말을 꺼냈다.

“저도요. 재밌을 것 같아요. 흔치 않은 기회고. 사실 저 말고도 노란색을 잘 쓰는 사람은 많잖아요.”

“그렇죠. 사실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였어요.”

취향이 확고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사용하기엔 변색이 아쉬웠어요. 살아 있었더라면. 아니, 최고의 선택지가 있는데 굳이 반 고흐의 작품을 꼽을 이유는 없죠.”

하긴 예전에 그린 해바라기들은 변색이 심해서 웬델이 바라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예전의 나보다.’

그녀 개인의 취향이지만 예전의 나보다 지금을 더 좋아한다니 기쁘기 그지없다.

“다른 후보는 없었어요?”

웬델이 눈썹을 들었다.

“예를 들어 앙리라든가.”

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노란색을 다루는 앙리가 후보에 없었을 리 없다.

“아. 그분.”

웬델의 눈이 차가워졌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중에도 없었어요.”

생각지 못한 반응에 말문이 막혔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나 외에 누구도 그를 협업 상대로 좋아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의외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고훈 씨와 함께 섭외하려 했죠.”

“하려고 했다면.”

“네. 의도치 않게 만날 기회가 생겼거든요. 마침 이번 일을 제안하려 했는데 기회를 주지 않더라고요.”

성질머리하고는.

“제가 이야기해 볼게요.”

누아르 1.0을 만들면서 채도를 높이는 기술로 여러 물감을 만들게 되었는데 노란색도 마찬가지다.

앙리와 함께 새로운 물감으로 작업한다면 더 멋진 결과가 나올 거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웬델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미소 지었다.

“섭외할 방법이 있거든요.”

* * *

1)이불(1964~)

대한민국의 설치미술가. 행위예술가.

1999년 제48회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수상(노래방 프로젝트), 2016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수상.

2)이불이 ‘미스 디올’을 만났을 때, 박미향 기자, 한겨레, 2015년 6월 24일 참조.

3)모티프는 팬톤(Pantone). 미국의 색채 연구소, 색채 전문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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