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22화
-르네상스-
6. 보여주는 사람(1)
센강 환경 조성 사업을 마친 다음 날, 비다가 작업실로 찾아와 반갑고 아쉬운 소식을 전했다.
“영국 가기로 했어.”
뱅크스의 도움을 받는다고는 해도 신원을 감추고 활동하기 쉽지 않을 거다.
외부의 협력 없이 모든 일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니, 일반적이라면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수입이 가장 큰 난관이다.
“돈을 바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다.
“사실 다른 것보다 무슬림인 게 걸림돌이라고 생각해서. 익명으로 활동하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다행이다.
“어머니는?”
“유학 간다고만 알고 계셔. 사실이기도 하고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효심이 지극한 친구라 굳이 말을 얹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어머니는 걱정하지 마. 잘 보살펴 드릴게.”
“아니야. 지금도 얼마나 고마운데.”
비다가 손을 내저었다.
“영국에서도 일할 거야. 다른 사람한테 도움받으면 의미가 없어.”
“괜찮겠어?”
“응. 어머니 생활비도 못 보내드릴 정도면 그냥 돌아올 거야.”
학교 다니면서 본인과 어머니의 생활비를 벌고 작품 활동까지 하는 게 가능할까.
걱정스레 쳐다보니 씩 웃는다.
“엄마가 생활비 보낼 생각하지 말래. 전쟁통에도 아기였던 나 데리고 도망쳤는데 파리에서 굶겠냐고. 걱정하지 말라고.”
“멋지시다.”
“응.”
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엄마에 비해선 난 완전 편한 거지. 그림도 엄마도 꼭 다 챙길 거야.”
그러리라 믿는다.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이런 방법 상상도 못 했을 거야.”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실제로 무슨 일을 겪든지 말은 너무나 쉽다.
“그럼 언제 출발해?”
“한 달 후에. 런던에서 지낼 거야. 일단 비자 때문이라도 학교를 포기할 순 없으니까.”
런던 유학 비용이 만만치 않다.
푸생 교장의 도움으로 첫해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나 그 뒤에는 매해 등록금으로 2만 파운드가 필요하다.
공부할 수 있고, 학생 신분으로 영국에 체류할 수도 있지만 비다가 감당하기엔 벅찬 수준이다.
“어려우면 꼭 말해. 천천히 갚아도 되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정말 괜찮아.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살았는걸. 어머니가 걱정이었는데 따로 모으신 돈이 있더라고. 내 저축이랑 해서 어머니 사실 집 구하고 갈 생각이야. 월세라서 계속 돈이 들겠지만.”
“…….”
“학교는 계속 다니진 않을 거야. 학비까지 벌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1년 되기 전에 취업 비자로 전환하려고. 그렇게 하기로 했어.”
뱅크스와 여러 말을 나눈 것 같다.
상황을 잘 모르는 탓에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된다.
그러나 당사자만 할까.
내 걱정을 덜고자 신원을 감추고 활동하려는 비다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마 나름대로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고 심지어는 미셸과 어머니에게조차 유학 간다고만 알렸을 정도로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으니까.
다만 블랑쉬가 마음에 걸린다.
서로를 지지하고 또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냈는데, 블랑쉬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블랑쉬는?”
비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손을 모으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아직 말조차 못 한 것 같다.
“얘기해야지. 다시 그림 그린다고 하면 좋아해 줄 거야.”
축하해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퍼하지 않을까 싶다.
* * *
“거짓말하지 마.”
“어?”
“그럴 거면 여기가 훨씬 낫지. 훈이랑 앙리 선생님 두고 영국 가서 미술 한다는 말을 누가 믿어?”
블랑쉬의 합리적인 지적에 비다 라바니가 당황했다.
“대학 등록금도 그래. 여기서 다니면 공짠데 해마다 2만 파운드씩 내는 영국에서 다닌다고? 너 같은 짠돌이가?”
“어, 어……. 그러니까 푸생 선생님 덕분에 장학금 받을 수 있어서.”
“생활비는.”
블랑쉬가 쉬지 않고 비다를 몰아붙였다.
“생활비는 벌어야 할 거 아니야. 쇼콜라티에 들어오면 한 달에 500유로씩 주는데 그게 얼마나 큰지 몰라?”
“크, 크지. 근데.”
“거기 가면 작품 걸어는 준대?”
“아, 아니…….”
“거봐. 열심히 하면 한 번씩 기회 주는 여길 두고 어딜 간다는 거야.”
유학 간다고 말하면 응원해 주리라 믿었던 비다가 당황했다.
“미술이 우스워?”
“그런 게 아니라…….”
“유학 가면 다 잘될 것 같아?”
“그건 아닌데.”
“똑바로 말해.”
블랑쉬 파브르가 친구를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이야.”
포기했던 꿈을 다시 좇는다는 말이 반갑기도 했지만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으로도 쇼콜라티에에서 활동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더욱이 어머니를 끔찍이 아끼는 비다가 파리를 떠나겠다니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그게 저. 영국. 영국 미술에 갑자기 관심이 생겨서. 얼마 전에 은찬이 형도 갔잖아. 부럽기도 하고.”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비다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다.
IS와 탈레반과 같은 범죄 단체를 고발하고, 차별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붓을 들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가면을 쓰려 했다.
괜히 주변에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또 다른 나라는 어떤가 궁금하기도 하고. 나, 나 여기서 계속 살았으니까.”
“…….”
“블랑쉬?”
블랑쉬가 고개를 돌렸다.
납득할 수 없는 변명을 이어가는 비다에게 실망하고 말았다.
분명 무엇을 숨기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감추니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음을 나눈 친구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해졌고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블랑쉬가 일어났다.
이대로 있으면 싸울 것 같아서 자리를 피하고 싶었는데, 비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만.”
“놔.”
“잠깐만 앉아 봐.”
“놓으라고.”
“사실.”
블랑쉬가 고개를 돌렸다.
“사실 뭐?”
“……사실.”
친구는 여전히 망설이는 듯했다.
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분명 큰 고민이 있는 것이었다.
친구를 몰아붙이는 일이 달갑진 않았지만 꼭 말해주길 바랐다.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괜찮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무덤까지 비밀로 할 수 있었다. 뭔가 부탁한다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었다.
블랑쉬가 비다의 손을 잡았다.
“도와줄 수 있으면 돕고 비밀이라면 꼭 지킬게. 친구잖아.”
그녀의 다정함에 비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
“응.”
“나…….”
정말 말해도 될까.
괜한 걱정을 끼치는 건 아닐까.
피해를 주는 건 아닐까.
뱅크스가 아무도 믿지 말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 괜찮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그녀만은 믿고 싶었다.
지금 손을 맞잡은 이 사람만은 믿을 수 있었다.
비다 라바니가 눈을 떴다.
“뱅크스가 될 거야.”
뱅크스는 영웅이었다.
가면을 쓰고 힘없는 사람의 편에 서서 폭력에 저항했고 권위에 도전하였다.
고훈과 앙리 마르소처럼 빛이 될 수 없다면 뱅크스와 같이 그들의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그림자 속에서 활동하고 싶었다.
“…….”
한동안 말 없이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은 블랑쉬가 슬며시 손을 놓으며 멀어졌다.
“그래.”
실망 가득한 목소리였다.
용기를 냈던 비다 라바니는 친구의 냉담한 반응에 어리둥절했다.
“난 우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넌 아니었나 보네.”
“특별?”
비다가 특별하다는 단어에 의아히 반응하며 블랑쉬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주었다.
블랑쉬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돌아섰다.
“자, 잠깐만! 왜 그래?”
“이거 놔.”
“왜 그러는데! 말했잖아!”
블랑쉬가 비다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넌 내가 바보로 보여?”
비다는 눈물로 그렁그렁한 블랑쉬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바보라니?”
“기껏 한다는 말이 뭐? 뱅크스가 될 거라고?”
“응…….”
“농담도 상황 봐 가면서 해. 왜? 세이버즈라도 들어가고 싶어?”1)
“어?”
비다가 눈을 크게 떴다.
블랑쉬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갑자기 정체불명의 예술가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뱅크스가 되고 싶다고 하니 오해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
“됐어. 이젠 듣고 싶지 않아.”
“블랑쉬.”
“됐다고.”
“내 말 좀 들어봐. 오해가앜!”
비다 라바니가 블랑쉬를 잡으려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한참 후.
옥신각신한 끝에 지금까지의 정황을 전해 들은 블랑쉬가 비다의 무릎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됐잖아.”
“말 안 하려고 했어. 뱅크스도 그렇게 말했앜!”
블랑쉬가 반창고를 힘주어 눌렀다. 그가 끝내 말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는 게 분했다.
그녀는 무릎을 감싼 비다에게 무심히 물었다.
“그럼. 계속 영국에서 지낼 거야?”
“모르겠어. 하다가 잘 안 되면 돌아올 수도 있고. 현실이니까.”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없어졌다.
몇 년간 함께했거늘 이젠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니 답답하고 쓸쓸했다.
“엄마 잘 계시는지 들여다보고 싶은데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어.”
“……내가 갈까?”
비다에게 여유가 없다면 찾아가는 방법이 있었다.
파리에서 런던까지는 직행열차로 2시간 정도밖에 안 걸렸다.
“응?”
비다가 눈을 깜빡였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너도 바쁜데 뭐 하러 거기까지 와.”
블랑쉬의 눈이 차가워졌다.
“걱정 안 해도 돼. 나 씩씩하잖아.”
“아. 그래.”
* * *
쇼콜라티에 뉴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첫 영상 촬영에 들어선 날.
“친구들 안녕 안녕.”
고훈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손을 흔들다가 다음 대사가 들리지 않자 정색했다.
“인사 안 하고 뭐 해요.”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찌푸렸다.
“나다.”
“안 돼요. 다시 갈게요.”
“뭘 어쩌라고.”
“따라 해 봐요. 친구들 안녕 안녕. 친구들 안녕 안녕.”
고훈의 생기발랄한 인사에 앙리가 질색했다.
“왜 이렇게 신났어?”
“밝은 분위기가 좋잖아요.”
“영유아 방송도 그렇겐 안 해.”
“영유아 타깃 맞아요. 아이들이 미술을 좋아해야 미래가 있다고 말한 건 당신이잖아요.”
“정도가 있는 법이야. 이딴 식으로 찍으면 아무도 안 봐.”
핑구 채널을 가장 오래 구독한 앙리 마르소가 으름장을 놓았다.
고훈의 장점은 차분한 목소리와 명확한 발음으로 정보를 쉽게 전달하는 데 있었다.
“그럼 앙리가 해봐요. 따라줄 테니까.”
앙리 마르소가 고훈이 씌어 준 꿀벌 머리띠를 집어 던졌다.
“아.”
“그 가식적인 대본부터 고쳐.”
“친구들 안녕 안녕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죠?”
“그 뒤에도!”
“오늘은 빨간색에 대해서 알아볼까요도요? 뾰로롱은 괜찮죠?”
앙리 마르소의 이마에 핏대가 서자 고훈이 깔깔 웃으며 원래 대본을 꺼냈다.
가능하다면 앙리가 뾰로롱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 결혼식 때 틀고 싶었지만 더 놀렸다간 정말 화를 낼 듯했다.
“장난이었어요. 빨리 와서 앉아요.”
* * *
1)<다시 태어난 베토벤>,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세계관의 슈퍼 히어로 무비 시리즈. 어벤저스의 패러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