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45화 (345/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19화

-르네상스-

5. 세상을 비추다(3)

비다 라바니는 갑작스러운 만남에 당황하여 입만 뻥긋댔다.

‘진짜?’

스스로 예술 테러리스트라고 소개하나 이 시대 가장 예술가다운 예술가.

예술가들이 존경하는 예술가.

비다 라바니 역시 내심 그를 동경하고 있었다.

새하얀 가면과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스프레이와 필름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주변을 살피니 한쪽 벽에 빨간 풍선이 그려져 있었다.

몰래 작업하니만큼 빠른 작업 속도를 내고자 스텐실 기법을 활용한 듯했다.

‘정말 뱅크스인가?’

전시회에 몰래 잠입해 작품을 남기는 행위가 정말 뱅크스 같았다.

오래 전 뱅크스는 돌멩이에 쇼핑하는 원시인을 그려 대영 박물관에 몰래 전시했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며 박물관과 관람객을 비판했었다.

그러한 기행으로 유명해지자 그의 벽화가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는데.

뱅크스는 그런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길거리에서 본인의 작품을 60달러에 판매하기도 했다.

예술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과시 또는 장식으로 여기는 미술계를 통렬히 비판하는 예술가였고.

미술사학자 캐롤라인 스트릭은 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그에게 마지막 낭만주의자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런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비다 라바니?”

“네, 네.”

“왜 그렇게 놀라. 이야기 듣고 온 거 아니야?”

“네?”

“고훈이 여기서 보자고 했을 텐데.”

이 늦은 시간에 갤러리로 오라고 하길래 의아해하던 참이었으나 뱅크스를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훈이한테 연락해 볼게요.”

“아니. 됐어. 내가 나온다는 말은 안 한 모양이네. 신중해.”

고훈이 비다 라바니에게마저 비밀로 했다는 데 뱅크스는 만족했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리를 옮길까?”

* * *

비다 라바니와 뱅크스는 쇼콜라티에 갤러리 외부 주차장과 옆 건물 사이의 작은 골목에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비다는 고훈에게 무슨 생각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고민을 털어놓았고.

뱅크스는 긴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었다.

“그래서. 그래서 싸우고 싶어요.”

“무엇과?”

“……폭력이요.”

비다 라바니는 약자의 비참함을 알리고 싶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 근본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이 모든 폭력에 저항하고 싶었다.

“힘들었겠어.”

“…….”

“고훈이 왜 널 보냈는지도 알겠고.”

뱅크스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네 외삼촌 정도지만 활동하다 보면 더 많은 놈들이 달라붙을 거야. 이슬람 극단주의자든, 유럽 사회의 우월주의자든. 그들에게 넌 아주 좋은 먹이니까.”

먹이라는 표현이 비다의 가슴을 조였다.

“나도 멋진 선물을 받았어. 홈페이지를 해킹당한 적도 있었고 경매장에서 난동을 부린 사람도 있고. 또 내가 올 걸 알고 잠입해 있다가 덮친 놈도 있었지.”

과격한 테러 단체 IS를 겨냥한 작품을 그리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IS…….”

“그들뿐만이 아니야. 미술계 사람들도 있었어.”

“네?”

“불합리에 저항한다는 건 그런 의미야. 가면을 쓴 이유 중 하나지.”

폭력과 권위에 도전했기에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그만큼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뱅크스가 가면을 쓴 이유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무엇을 만들었는지에 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누구의 작품인가에 따라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미술계를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네가 비다 라바니로서 성공하고 싶다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지만, 단지 예술을 하고 싶다면 숨어. 나처럼.”

“…….”

“나이도. 성별도. 종교도. 출신도. 오직 작품만 내보이는 거야.”

수많은 편견에 억눌려 살아왔던 비다 라바니는 기꺼이 그러고 싶었다.

오랜 꿈이었다.

지금껏 그를 둘러싸고 있던 무슬림, 난민 같은 족쇄를 버리고 한 사람의 개인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비록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그것이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방법 같았다.

“어떻게 하면 되죠?”

뱅크스가 가면 뒤에서 빙그레 웃었다.

“전시회에 참가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비다가 잠시 고민했다.

“어……. 초대받는 편이 좋겠죠?”

“좋아. 어느 갤러리에서 네 작품을 전시하고 싶다고 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 건지 생각해 봐.”

“그. 일단 어떻게 전시할 건지 물어보고. 계약서도 잘 살피고.”

“실명으로?”

“네?”

“계약 말이야. 실명으로 계약할 텐데 그 갤러리를 믿을 수 있나?”

“아.”

비다 라바니가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그럼 사비로 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것도 방법이지. 그럼 건물 임대 계약은? 마케팅 업체와는?”

거듭된 질문에 비다 라바니가 큰 충격을 받았다.

신원을 감추고 활동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가장 좋은 방법은 법인을 세우는 거야. 법인 명의로 계약하면 네 개인 신상이 알려질 일은 없으니까.”

“아.”

“하지만 법인 사무실 문짝이 남아나질 않는 걸 보면 완벽한 방법은 아니야. 세무 조사라도 나오면 금방 들통나지.”

쇼콜라티에를 염두에 두었던 비다 라바니의 눈이 흔들렸다.

뱅크스와 같이 권위에 도전하다 보면 적이 생길 테고, 쇼콜라티에에 압박이 들어올 수도 있었다.

고훈과 앙리 마르소, 블랑쉬 파브르에게 피해를 끼칠 순 없었다.

“자.”

뱅크스가 명함 크기의 카드를 내밀었다. 빨간 풍선이 그려져 있고 아래 홈페이지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건.”

“내 홈페이지에 접속할 수 있는 OTP 카드.”

뱅크스가 일어났다.

“영국은 너 같은 사람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야. 돈세탁하고 탈세하던 범죄자 놈들이 익명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잘 갖춰놨지.”

비다 라바니가 몇 년 전 미술계를 발칵 뒤집었던 데미안 카터 사건을 떠올렸다.

“결심이 서면 연락해.”

비다 라바니는 뱅크스가 사라진 뒤에도 그가 걸어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뱅크스를 만난 후로 비다 라바니는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뱅크스의 조언으로 신원을 감추고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개인으로 활동하기에는 미술관, 갤러리, 부동산, 마케팅 등 수많은 업체와 계약을 해야 했고.

법인을 세워 활동하자니 그와 관련한 지식이 없었다.

또 누군가 마음만 먹는다면 법인에 소속된 사람 중 비다가 유일한 것을 근거로 얼마든지 연관 지을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거였어.’

뱅크스에 대해 깊게 생각할수록 그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거리의 벽화는 그가 신분을 감추고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 말인즉 수익을 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미 수많은 예술가가 거리 벽화를 그리는 상황에서 뱅크스와 같이 되리란 보장은 없었다.

쇼콜라티에라는 완벽한 화가 공동체에서 시작하여도 성과를 보장할 수 없거늘.

비다 라바니는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아.”

영국 난민 관련 규정을 찾던 비다 라바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국은 무슬림 입국을 철저하게 관리하여 신원이 확실한 이들만을 수용했다.

뱅크스가 학생 신분으로 입국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시험은커녕 영어조차 서툴렀기에 누군가의 추천이 없고서야 불가능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라 비다는 고민만 이어가다가 결국 답을 찾지 못했고.

고훈을 찾아 상담했다.

“푸생 선생님이라면 도와주실지도 몰라.”

“아.”

앙리 4세 중학교 교장으로 비다 라바니가 난민 신분임에도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이었다.

“그 문제는 같이 여쭤보자. 다른 건 어때?”

고훈의 질문에 비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무나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림을 향한 열정으로 어떻게든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단 하나.

아픈 어머니를 두고 영국으로 떠나는 것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엄마.”

비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 모시고 갈 방법이 없어. 당장 내가 일을 그만두면 생활비도 없고 몸도 불편하시니까. 모셔가야 하는데…….”

“어머니라면 걱정 마. 내가 보살펴드릴게.”

“아니야. 너 바쁜 거 아는데 어떻게 그래. 그런 말 하지 마.”

이미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비다 라바니는 단호히 거절했다.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비다 라바니가 웃었다.

문제가 산더미 같지만 적어도 희망이 있기에 웃을 수 있었다.

“무슨 방법이 있겠지.”

고훈이 친구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허기에 굶주리는 일이.

멸시 속에서 자신을 지켜나가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그런 상황에도 웃을 수 있는 친구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래. 방법이 있을 거야. 어려운 일 생기면 꼭 말하고.”

비다는 고개만 끄덕였다.

마르소 갤러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금환>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큰 용기를 준 은인이자 친구에게 더는 기대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가슴 가득한 감사함을 갚아주고 싶었다.

* * *

“어디 가니?”

히나 라바니가 아침 일찍 집을 나서려는 아들에게 물었다.

“네. 쇼콜라티에가 센강 환경 조성 사업하거든요. 조금이라도 도우려고요. 애들이 많아서 정신없을 거예요.”

달리다 광장에서 시작된 인연이 계속되어 쇼콜라티에는 아이들과 파리 곳곳에 해바라기를 심고 있었다.

센강 환경 조성 사업 역시 여러 국가 출신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이었고, 비다는 작게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다.

“저녁 전에는 돌아올게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다녀오렴.”

아들이 집을 나서자 히나 라바니가 가슴을 툭툭 쳤다.

오빠 가니 유수프와 그 일당이 구속되어 당분간은 마음을 놓을 수 있지만 언제 또 전과 같은 일이 반복될지 몰랐다.

파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경제적 부담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매일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히나 라바니는 몸이라도 움직이고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집이라고 해봤자 작은 부엌이 달린 한 칸짜리 방에 커튼을 쳐 공간을 나눴을 뿐이었다.

‘요즘 고민도 많은 것 같던데.’

혼자만의 공간도 필요할 텐데, 다 큰 아들에게 방 하나 마련해 주지 못함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깨끗하게라도 정리해 주고 싶은 마음에 바닥을 닦던 차, 히나 라바니가 서류 한 뭉치를 발견했다.

영국 유학에 관련한 문서였다.

“…….”

히나 라바니는 걸레를 내려놓고 아들이 모아놓은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비다가 영국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입국 심사가 까다로울 텐데.’

푸생 선생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 앙리 4세 중학교 교장의 추천을 받으면 학생 신분으로 갈 수 있는 듯했다.

미술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것 같았다.

‘대학…….’

꿈같은 일이었다.

극단주의자들과 부패한 정부 때문에 조국에서 떠나온 이후 히나 라바니는 희망을 잃었다.

아들과 생존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한데 대학이라니.

무슬림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아들이 대학에 간다고 하면 다들 비웃을 터였다.

“…….”

히나 라바니가 다른 서류를 찾았다.

유학 관련 문서보다 난민 관련 자료가 훨씬 더 많았고, 이내 그녀는 아들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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