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18화
-르네상스-
5. 세상을 비추다(2)
앙리 마르소의 팬 사이트에 올라온 댓글을 읽던 비다 라바니가 웃었다.
오늘만큼 많이 울었던 적도 없었는데, 저녁이 되자 웃을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대단했지.’
<금환>을 본 순간 그동안 삼켜냈던 설움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그렇게 울고 나니 켜켜이 쌓인 복잡한 감정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비다 라바니는 다시 일어날 용기를 전해 준 친구에게 감사하며 팬 사이트에 로그인했다.
└<푸른 해>도 너무 멋지더라.
└오 도슨트 왔다.
└해설 좀.
└맞아. 멋지긴 한데 해가 왜 파래?
팬 사이트에서 오래 활동했던 만큼 비다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팬 활동과 도슨트 준비를 겸해서 앙리 마르소의 작품을 나름대로 해설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푸른 해>를 해석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비다 라바니는 잠시 고민하고는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푸른 해>는 기존 작가님 화풍하고는 달라.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그린다는 자신감 때문에 정밀 묘사를 많이 하시다 보니 의도치 않은 효과가 생기는 기법은 활용하지 않으시는데, 이번에는 수채 물감을 사용하면서 번짐 효과를 많이 보셨어. 덕분에 그림이 되게 따뜻하고 뭉글한 느낌이야.
물을 잔뜩 머금어 은은하게 번진 여명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비유도 정말 대단했어. 아는 사람도 많을 텐데 <푸른 해>는 사실 미셸 플라티니 관장님의 눈이야. 하늘로 표현된 흰자위, 파란 해처럼 보이는 관장님의 파란 각막, 달처럼 표현한 동공. 그리고 동공 주변에 금환일식의 띠는 아마도 작가님이 관장님에게 반지를 줄 때 눈에 비친 상 같다고 생각해.
└헐. 맞네.
└금환일식이라고 하면서 달이 왜 저렇게 작나 싶었는데 그렇네.
└난 보자마자 알겠던데.
└제목이 속임수였음.
└나도 제목 때문에 그냥 이상하지만 예쁜 해인 줄 알았는뎈ㅋㅋ
└근데 멀리서 보면 그냥 눈임.
└보니까 가상 전시관으로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은 해라고 생각하고, 전시회 직접 간 사람들은 멀리서 보니까 눈으로 본 듯.
└이게 맞다.
누군가의 분석에 비다 라바니도 아 하고 감탄했다.
너무나 명확해서 사람들이 <푸른 해>를 미셸 플라티니의 눈으로 받아들이지 못함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과연 보는 입장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을 듯했다.
비다가 계속해서 글을 적었다.
└태양은 생명이나 신, 왕권, 열정 같은 상징으로 사용되었는데, 거기에 관장님의 눈을 대입했다는 건 작가님이 관장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해.
└?
└해를 보고 애인 생각했다는 말인데, 맞는 말 같긴 한데 본능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앙리니까.
└ㅁㅊ 우리 앙리 어디 감.
└진짜 앙리 지금 감금되어 있고 가짜가 활동하고 있다는 게 학교의 점심.
물음표가 반복해 올라오자 비다 라바니가 또 한 번 웃었다.
└반대로 관장님의 사랑도 엿볼 수 있는데, 태양 주변 빛이 엄청 창백하잖아. 홍채랑 결막 경계선 부근을 보면 약간 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러네.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처음에는 푸른 해가 얼어 있었던 것 같아. 차가운 인상을 주는데. 작가님이 처음 관장님을 이성으로 느꼈을 때 차갑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
└오.
└근데 동공 주변은 일렁이는 걸 보면 대류 같은 표현이 되어 있잖아. 얼었던 게 녹았다는 뜻이고 눈물로 볼 수도 있는 거지. 물론 저기서 눈물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비유적으로.
└천재임?
└이제 알 것 같다. 처음에는 뭐지 이건 싶다가 차츰 콩깍지 씌었다는 말이지?
└반지 받을 때 운 거 표현한 거네.
└근데 님 진짜 도슨트임? 왤케 잘 알아?
└나도 도슨트하고 싶어서 공부하는데 진짜 이런 거 분석하는 사람 보면 재능이 없나 싶음. 난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던데.
미술계가 활기를 띠면서 몇몇 도슨트가 유명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평소 그림을 좋아하던 사람 중에서는 그런 이들을 동경해 도슨트가 되길 바라는 사람이 늘어났지만 그림을 보는 눈, 전달하는 능력 등 여러 요소로 어려움을 겪는 게 사실이었다.
└전 마르소 작가님 작품이 너무 좋아서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비다 라바니 또한 그 과정을 거쳤기에 응원차 글을 적다가 멈칫했다.
“…….”
좋아하니까 포기할 수 없었다.
외삼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았지만, 차마 멀어질 수 없어서 작업실 대신 미술관을 선택했다.
하지만 더는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외삼촌에게 그림이 핑계였을 뿐이란 사실을 알았고, 그림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그림 이야기를 하며 웃게 된 본인을 마주한 순간.
애써 외면했던 열망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싶다.
지금 당장 붓을 들고 싶었다.
<금환>이나 <푸른 해>와 같은 작품은 그리지 못할지라도 내가 가장 나답게 존재할 수 있는 캔버스 앞에 앉고 싶었다.
* * *
발표회 다음 날.
오랜만에 만난 마틴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았다.
덕분에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야 작업실에 도착했는데 바로 옆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비다 라바니가 쓰던 작업실이라 의아해하며 문을 열자 녀석이 붓을 들고 있었다.
“어.”
날 보더니 쑥스럽게 웃는다.
천천히 다가가 책상에 걸터앉자 별다른 말 없이 다시 붓을 움직인다.
꽤 오래 손을 놓은 탓에 고생하는 듯하고 본인도 자각하는 것 같으나 즐거워 보인다.
“……금환 너무 좋더라.”
“내 생각도 그래.”
잠시 웃은 뒤에 비다가 다시 붓을 들었다.
“그렇게 울어본 적은 오랜만이었어.”
내가 생각하기에도 괜찮은 작품이었는데 비다에게는 더 의미가 깊은 듯하다.
“울어서 해결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당장 뭐라도 하지 않으면 굶으니까. 울면 더 배고프고. 엄마도 더 힘드니까. 그래서 울지 말자고 생각했어.”
“…….”
“그런데 막상 위로를 받으니까 나오더라고. 혼자서는 괜찮았는데.”
알 것 같다.
잘 버티다가도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안기면 켜켜이 쌓인 한이 터지고 만다.
“아, 나쁘다거나 그런 말은 아니고.”
“응.”
비다가 고개를 돌렸다.
“좋았어. 그렇게 한 번 쏟아내고 나니까 도리어 후련하더라고. 다시 생각하게 되는 부분도 생기고.”
그림을 두고 한 말이리라.
말 같지도 않은 핑계와 협박에 외면해야 했던 꿈을 더는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거다.
스스로 마음먹기를 기다렸는데 다행이다.
“바보 같아. 그런 놈 때문에 붓 쓰는 법도 다 까먹었어.”
“금방 괜찮아질 거야.”
“빛도 엉망이고.”
“그건 원래 그랬어.”
비다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너무해.”
“그래도 여전히 따뜻하네.”
개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붓이 어색하고 광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엉망이지만 그런 건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다.
“……그놈이 나와도 여기서 혼자 그리면 모르겠지?”
모르고 아는 건 중요하지 않다.
비다가 그림을 그리든 그리지 않든 놈은 계속해서 괴롭힐 거다.
프랑스인을 건들면 더 큰 벌을 받게 될 테니, 같은 무슬림을 괴롭혀 돈을 갈취했던 놈이다.
그렇게 살아온 인간이 달라질 리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우선은 비다와 히나 라바니를 그놈과 격리하는 게 우선이다.
문제는 비다가 활동을 하면 언젠가 그놈 시야에 들어갈 테고, 그렇게 되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거라는 점이다.
“파리 근교나 아니면 다른 도시로 가는 것도 괜찮아.”
비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일감이 파리에 집중되어 있고, 이사 비용도 걱정일 것이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입장도 아니니까.
“파리보다는 덜하겠지만 마르세유나 리옹이라면 도슨트 일도 꽤 있을 거야. 집은 구해줄게.”
“…….”
“조용히 살면 큰 문제 없을 거야.”
비다가 얼굴을 들었다.
“나도. 나도…… 전시하고 싶어.”
듣고 싶었던 말이다.
“많이 부족하지만. 더 잘 그리고 싶어. 언젠가는 멋진 곳에 그림 걸고 싶고 너처럼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너무너무 좋을 것 같아. 돈도 많이 벌어서 맛있는 것도 마음껏 먹고 싶어.”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안정된 생활도 모두 간절할 터다.
“근데. 그놈이 있는 한 계속 따라올 거야. 혹시라도 어디서 전시라도 하면.”
무슬림 사회를 통해 소문을 접하겠지.
언젠가는 반드시 문제가 될 것이다.
“지금 프랑스 정부가 이슬람 극단주의 외국인 추방을 계획하고 있대.”
“아.”
2020년 프랑스 교사가 무참히 살해당한 이후로 벌써 열여섯 번째 일이다.
“그놈이 거기에 포함되면 좋겠지만 이미 명단이 어느 정도 결정되어서 어려울 수도 있다고 하더라.”
비다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놈이 추방되지 않는다면 파리 근교로 이사하고. 작품 활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지만.”
역시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게 걱정스러운 거다.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 있어. 만나볼래?”
* * *
훈이가 오라고 해서 오긴 했지만 조금 무섭다.
쇼콜라티에 갤러리를 수백 번 다녔지만 밤이 되니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대체 이 시간에 누구를 만나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탱- 탱- 탱그르르
“히익.”
방금 무슨 소리지.
캔 같은 게 떨어진 것 같은데, 훈이랑 마르소 작가님 작품이 전시 중인 제1전시관에서 난 소리 같다.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이 시간에 여기 있을 사람은 경비원 말고는 없으니 분명 훈이가 말한 사람이 뭔가 떨어뜨렸을 거다.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발을 옮기니 역시나 누가 있다.
“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다.
“도, 도, 도, 도둑. 도둑!”
“쉿.”
가면 쓴 도둑이 스프레이를 줍고는 다가오길래 경비원을 부르려던 순간 도둑이 빨간 풍선을 보여주었다.
“……설마.”
“안녕.”
“설마!”
“목소리를 줄여줬으면 좋겠는데. 경비원이 오면 곤란해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