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17화
-르네상스-
5. 세상을 비추다(1)
한편 반 고흐 재단 이사장이자 고수열의 오랜 벗이 고수열을 찾았다.
“수열!”
“마틴 이 친구.”
고수열이 마틴 얀센을 안았다.
“바쁘다더니 예까진 어찌 왔어?”
“그렇다고 훈이 전시회를 놓칠 수야 있나. 끌끌.”
“사람 참. 이리 앉게.”
“아니야. 자리도 없어 보이는데.”
“자리야 만들면 되지. 성 과장, 남는 의자 있으면 좀 부탁해요.”
“예.”
성귤 과장이 의자를 가지러 가자 마틴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 행사장으로 들어서는 프란시스코 미로, 미국의 거장 윌리엄 토마스, 저명한 미술사학자 캐롤라인 스트릭 등 미술계에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시끌시끌하구만. 훈이 새 작품 발표한다고 하니 다 모인 모양이야.”
“껄껄껄껄. 우리 훈이가 잘나긴 했지. 어찌 구경 좀 했나?”
손자 자랑이라면 몇 날 며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사람이 이리 많으니 원. 적당히 둘러보다가 바로 왔어. 그 금환은 대기 줄이 너무 길던데.”
“그럴 수밖에. 그래도 꼭 한 번 보고 가게. 훈이 작품이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그래야지. 내 놓칠 수야 있나.”
“흐하하핳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반가움에 고수열이 크게 웃었다.
“한데 훈이는?”
“대기실에 있을 텐데. 자네가 와준 걸 알면 좋아할 걸세. 같이 저녁이나 하지.”
마틴 얀센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두 사람이 고수열에게 다가왔다.
“고수열 경,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미하일 교수.”
고수열이 의자에서 일어나 미하일 자고예프와 악수를 나누었다.
“마틴, 자네도 인사하게. 수리코프 미술대학의 미하일 자고예프 교수네.”
“모를 리가 있나. 반갑습니다. 마틴 얀센입니다.”
모스크바 국립 수리코프 미술대학의 교수이자 러시아 전통 화풍의 대가로 알려진 미하일 자고예프를 모를 수는 없었다.
마틴 얀센이 반갑게 손을 내밀자 미하일이 부드럽게 맞잡으며 인사했다.
그 또한 언론을 통해 반 고흐 재단 이사장 마틴 얀센을 접했었다.
“덕분에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여행이 즐거웠습니다.”
“하하. 그거 다행입니다.”
“와줘서 고맙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겠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죠. 제게도 이 녀석에게도. 인사드리렴.”
미하일 자고예프와 함께 서 있던 여성이 고개를 숙였다.
눈 같은 피부와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레나 자고예프입니다.”
“레나라면.”
고수열이 눈을 크게 떴다.
미하일에게 딸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장성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아주 어릴 때 만났는데 벌써 이렇게 컸구나.”
고수열이 말을 잇지 못했다.
“올해 열아홉 살입니다. 고훈 군 작품을 보고 싶다길래 데려왔죠.”
“오오. 고마운 일이지. 가만 보자. 자리가.”
“저쪽에 일행이 있으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러세. 내 연락하겠네.”
자고예프 부녀가 자리를 떠나자 마틴 얀센이 허허 하고 웃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레나라는 친구도 그림 그리던 것 같더군.”
“그래?”
“음.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은 없는 것으로 아네만 미하일의 딸이 작품을 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네.”
“아버지께 배웠으면 멋진 그림을 그린 테지.”
고수열이 일행과 합류한 자고예프 부녀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 * *
“자리를 빛내주신 내빈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방태호입니다.”
쇼콜라티에의 CEO 방태호가 내빈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랑과 행복이란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보여주었던 고훈. 성찰과 극복을 주창해 온 앙리 마르소. 오늘 여러분은 두 작가의 더욱 깊고 넓은 세계를 경험하셨을 겁니다.”
<금환>과 <푸른 해>에 감복했던 이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죠. 두 분 작가님 모시겠습니다.”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방태호의 소개를 받으며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미소 짓는 고훈은 여유로워 보였고 앙리 마르소는 평소보다 더 예민해 보였다.
고훈이 먼저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고훈입니다.”
입장할 때 한 차례 박수를 보냈던 이들이 다시 한번 열정적으로 손뼉을 쳤다.
“여기서 보니까 작품을 감상하신 분보다 못 보신 분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어떡하죠?”
전시회가 너무나 크게 성공하여 인파가 몰린 탓이었다.
작가가 본인 작품을 스포일러할 수 있는 상황에 내빈들이 작게 웃었다.
“금환을 가장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 얼마 전에 그리스에서 본 금환일식을 다룬 작품이에요.”
고훈이 잠시 고민했다.
작품을 감상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예상 밖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 자리에 계속 있을 테니 천천히 감상해 주셨으면 해요. 이상입니다.”
발언권을 얻은 기자가 물었다.
“이번 작품을 만드실 때 반타 블랙을 찾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니쉬 푸어의 독점에 관련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노림수가 분명한 질문이었다.
어찌 보면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고훈을 통해서 현재 미술계에 유행처럼 번진 아니쉬 푸어 비난 여론을 더욱 끌어올리려는 의도였다.
“싫어요.”
고훈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멍청해진 기자가 할 말을 잃은 채 눈만 깜빡였고 방태호는 능숙하게 다음 질문자를 정했다.
“아트 뉴스페이퍼의 엠마 루델입니다. 금환을 본 사람들은 작가님이 또 한 번 인식의 틀을 깼다고 말합니다. 그에 관해서 덧붙일 말씀 있으십니까?”
질문을 받은 고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무엇을 염두하고 하신 말씀인지는 몰라서 적절한 답은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여러 작품에서 이야기했듯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희망이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고요. 그런 생각을 금환일식이란 현상과 결부하다 보니 이것저것 많이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또 다른 기자가 발언권을 얻었다.
“내년에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계십니다. 금환 이상의 대작을 아직 숨겨 놓으신 건 아닌가요?”
고훈이 웃었다.
“그런 건 없어요. 지금 가지고 있는 건 이번 전시회에서 전부 보여드렸고. 내년이라면 르네상스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지금부터 열심히 준비해 봐야죠. 재밌을 것 같아요.”
이후로도 몇몇 기자가 포기하지 않고 금환이 어떤 방식으로 감상하는 작품이냐, 설치 예술이냐, 회화냐 등 금환에 관련한 질문을 꺼냈지만 고훈은 요지부동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고훈이 앙리 마르소에게 시선을 주었다.
감상한 사람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사족을 덧붙이고 싶지 않았기에, 중요한 발표를 앞둔 앙리에게 관심을 돌렸다.
앙리 마르소가 앞으로 나서자 기자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아직 베일에 싸인 <금환>과 달리, <푸른 해>는 전시장 중앙에 높이 전시되어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이채로운 색감과 강렬한 이미지.
그리고 앙리 마르소가 본인과 고훈 외의 다른 소재를 다뤘다는 점 등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었다.
“손 내려.”
앙리 마르소가 기자들을 위협했다.
“멍청한 질문에 답해 주려고 나온 거 아니야.”
기자들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앙리 마르소의 팬과 취재 나온 김지우만이 소리 죽여 웃을 뿐이었다.
앙리 마르소는 앞서 고훈과 아니쉬 푸어를 싸움 붙이려 했던 기자를 노려보았다.
행사장에 모인 모두 그의 속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새 작품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화제성과 자극적인 기사만을 찾는 이들에게 앙리가 본인의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묻고 싶은 말이 산처럼 많았으나 한 번 틀어진 앙리 마르소를 설득할 순 없었다.
앙리는 조용해진 행사장을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결혼한다.”
행사를 즐겁게 지켜보던 김지우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당황해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내 마음이야.”
고훈과 앙리가 아웅다웅하자 비다 라바니와 함께 행사장을 찾은 블랑쉬 파브르가 입을 크게 벌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블랑쉬가 내뱉은 작은 파문이 행사장에 급속도로 번졌다.
다만 너무나 충격적이라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었다.
‘설마.’
‘거짓말하지 마.’
‘고훈 미성년자잖아.’
‘지금 미성년자인 게 중요해?’
오해가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전에 앙리가 내빈석 가장 앞에 앉아 있던 미셸에게 눈길을 주었다.
“올라와.”
미셸 플라티니 관장이 당장에라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단상에 올라섰다.
“안녕하세요. 미셸 플라티니입니다.”
미술계 종사자로서 미셸 플라티니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르누보 공모전을 성공적으로 기획한 천재 큐레이터이자 마르소 갤러리, 마르소 미술관, 쇼콜라티에에 걸쳐 지난 몇 년간 가장 성공적인 전시회를 꾸민 사람이었다.
그리고.
까다롭기 그지없는 앙리 마르소에게 가장 심하게 데인 사람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어.”
행사장의 누군가가 미셸의 왼손 약지에 있는 반지를 발견했다.
“내 사람이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 * *
[갤러리 밖까지 대기 줄 이어져. 하루 방문객 최다 기록 경신한 쇼콜라티에 갤러리]
[캐롤라인 스트릭, “금환은 가장 체험적인 작품.”]
[프란시스코 미로, “금환일식 이상의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미하일 자고예프, “동시대 미술을 이끄는 두 천재다운 발상. 정교한 비유.”]
[앙리 마르소 결혼하다]
고훈, 앙리 마르소의 신작 발표회는 첫날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금환>과 <푸른 해>는 평단과 예술인들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미술사학자 캐롤라인 스트릭은 어둠 속에서 밝혀진 빛에 가장 인간적으로 다가간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프란시스코 미로, 미하일 자고예프, 윌리엄 토마스 등 수많은 거장도 이와 마찬가지로 찬사를 내놓으니 발표회를 향한 관심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러나 발표회 첫날 인터넷에서 가장 많은 트래픽을 기록한 단어는 앙리 마르소 결혼이었다.
앙리 마르소의 팬 사이트가 발칵 뒤집혔다.
└아니. 왜?
└미셸 님 뭐가 부족하셔서 앙리하고 결혼하세요 ㅠㅠㅠ
└맞아 능력도 좋으시고 얼굴도 예쁘신데ㅠㅠ
└우리 형이 뭐 어때서.
└내가 살다 살다 앙리가 결혼하는 걸 다 보네.
└일할 때도 엄청 까다롭게 굴었을 텐데. 이해할 수가 없네.
└나 이거 알아.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납치당한 사람이 납치범 좋아하는 거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못하는 말이 없엌ㅋㅋㅋㅋ
└여기 앙리 팬 사이트야 미친놈들앜ㅋㅋ
└아닌데요. 고소 안 당하고 앙리 놀리는 곳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