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42화 (342/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16화

-르네상스-

4. 달 뒤에 숨어서(2)

나와 앙리의 신작 발표회에 들르겠다는 말이 어느덧 3만 번이나 인용되었다.

“…….”

댓글을 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차.

뱅크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달리다 광장 일 이후로 서로 안부 정도는 묻고 있었지만 이번 연락은 꽤 자세하다.

2년 만의 신작을 무척 기대하고 있으며, 다음 주 센강 공공 미술에 함께해도 되겠냐고 묻고 있다.

그렇다고 서로 만나자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IS, 탈레반 등 테러 단체를 비판하는 작품을 그려왔기에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신상 공개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달리다 광장 때처럼 몰래 손을 거드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리라.

거절할 이유도 없고 되레 파리 시민들에게 큰 기쁨이 될 듯하여 흔쾌히 수락하려던 차.

잠시 망설이게 되었다.

“…….”

“무슨 생각해?”

방태호가 상념을 끊었다.

“뱅크스가 신작 발표회랑 센강 일에 관심이 있나 봐요. 그림 그려도 되냐고 묻네요.”

“좋은데? 아이들한테 좋은 추억도 되고. 시민들도 좋아할 테고.”

“그렇게 하자고 하려고요.”

신작에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고 센강 일은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적은 뒤에 몇 자 더 붙였다.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작은 희망이라도 주고 싶다.

* * *

“당분간 여기서 지내세요. 상황이 괜찮아지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귤 과장님, 아니, 훈이가 또 한 번 도와주었다.

변호사를 선임해 그놈을 고소하고,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접근 금지 가처분도 받아들여졌다.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낼 곳도 마련해 주었다.

내가 대체 뭐라고.

친구라는 이유 하나로 이 많은 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비다.”

“……좀 쉴게요.”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으실 텐데, 걱정하실 텐데 지금은 듣고 싶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혼자 있고 싶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걸어 잠그고 그대로 잊히고 싶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병원에서도 누워만 있었는데 좀처럼 일어나 있을 힘이 없다.

지친 걸까.

그래. 지쳤다.

웃고 싶지 않은 데도 종일 웃고 있기도 힘들다.

사실 말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부터 도슨트는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가까이 있고 싶었는데, 그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앗아갔다.

아마 어느 한쪽이 죽지 않는 한 계속되겠지.

“비다. 비다?”

어머니 목소리다.

“……네.”

“친구 왔는데. 블랑쉬.”

만나고 싶지 않다.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다.

싫은 건 아닌데, 말할 기운마저 없다. 걱정 끼치기 싫어서 밝은 척할 힘도 없다.

분명 걱정할 걸 알면서도 당장 너무 힘들어서 만나고 싶지 않다.

이런 나를 들키기 싫다.

“들어갈게.”

블랑쉬의 목소리에 이불을 끌어 얼굴을 덮었다.

기운 내라는 말도 힘내라는 말도 듣고 싶지 않다. 위로도 받고 싶지 않다.

이미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데, 더는 서 있을 힘이 없는데 그런 말로 더욱 내몰리고 싶지 않다.

날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화내고 싶지 않은데, 블랑쉬가 그럴까 봐 걱정된다.

위로해 주려고 온 친구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밉다.

그냥 그냥 이대로 시간이 흘러갔으면 좋겠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나니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이 어두운 걸 보니 시간이 제법 흐른 것 같다. 이불 속에 있던 탓에 답답하여 얼굴을 내미니 블랑쉬가 책상 앞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

안 갔냐고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블랑쉬가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돌아가 줘.”

여태 쌓아온 괜찮은 친구라는 옷이 벗겨진 듯하다. 예전으로 돌아간 날 보이고 싶지 않다.

“괜찮아.”

블랑쉬는 책상에 앉은 채 말했다.

“자고 싶으면 더 자. 배고프면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릴게.”

“…….”

“뭐 안 바라니까.”

이상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과 그 뒤에 이어진 묘한 침묵이 그렇게 편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혼자 있을 때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던 불안이 차츰 고개를 숙인다.

그저 눈앞에 블랑쉬가 있는 것만으로도 황량했던 영혼에 비가 내리는 것 같다.

“…….”

일할 시간일 텐데 왜 여기 있을까.

“일은?”

조금 전만 해도 말할 기운이 없었는데, 하나도 없었는데 굳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말이 튀어나왔다.

“쉰다고 했어.”

나 때문이리라.

“미안해.”

“뭐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일도 쉬고 찾아왔음이 분명하다.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몸을 일으켰다.

“나 괜찮아. 다 나았어. 걱정 안 해도 돼.”

힘을 내서 웃었는데, 블랑쉬는 웃지 않았다.

“누워 있어.”

“다 나았다니까?”

“안 괜찮은 거 알아.”

블랑쉬가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위로도 격려도 없이 몇 시간이나 함께 있어 주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태연히.

“미안해.”

이런 내가 너무 한심하다.

“미안해.”

* * *

고훈과 앙리 마르소의 신작 발표회로 유럽 미술계가 활기를 띠었다.

근 2년 만에 찾아온 두 천재 화가의 합동전은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만 구성된다고 알려졌고.

발표회 당일.

쇼콜라티에 갤러리 주변은 인파로 가득했다.

“앙리 마르소와 고훈의 신작 발표회로 쇼콜라티에 갤러리 일대 교통이 마비되었습니다.”

중계 나온 이들이 주변 상황을 전달하는 가운데 방문객들은 저마다의 기대를 품고 입장하고 있었다.

“훈이 작품은 어디 있는데?”

“1층. 1층부터 순서대로 보면 될 것 같은데?”

“앙리한테 사인받을 수 있나?”

“욕하면서 해주지 않을까?”

발표회가 성황리에 개최된 것을 확인한 비다 라바니가 주변을 둘러보며 내심 안도했다.

그러다가도 누군가 눈을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랜 세월 받아온 차별과 얼마 전 폭행당한 경험 때문에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블랑쉬가 퇴원 이후 첫 외출에 잔뜩 긴장한 비다의 손목을 잡아 주었다.

“돌아갈까?”

고훈과 앙리 마르소의 신작 발표회를 보자고 권했으나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녀 역시 오랜 세월 따돌림당했기에 비다 라바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야. 들어갈래.”

비다가 용기를 냈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몹시 불안했으나 친구가 함께 있었다.

깊이 존경하는 앙리 마르소와 선망하는 고훈의 작품을 놓칠 수도 없었다.

복도를 지나 제1전시실에 들어섰다.

사람들로 가득해서 언뜻언뜻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을 뿐, 편하게 감상하긴 힘들었다.

블랑쉬와 비다 모두 고훈이 그간 작업해 온 작품 대부분을 봤었기에 <금환>을 보고자 밖으로 나섰다.

1층과 2층을 잇는 중앙 계단 오른쪽 빈 작업실 앞에는 아직 사람이 없었다.

“어서 와요.”

블랑쉬와 비다를 알아본 갤러리 직원이 미소 지었다.

“들어가도 돼요?”

“그럼요. 안에 들어가면 어두우니 조심하세요.”

두 사람이 <금환>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고 차단막이 들어서자 어둠이 엄습했다.

눈을 떠도 감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막연했던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비대해져 비다 라바니의 가슴을 옥죄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꼭 누군가 자신을 해할 것만 같았다.

“아. 아으.”

블랑쉬가 친구의 신음을 듣고는 팔을 휘저었다. 파르르 떨리는 비다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손을 잡은 덕인지.

청명한 바람 탓인지 떨림이 멈추었다.

바람에 스치는 풀 소리, 파도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청각과 촉각에 집중하여 버티기를 얼마간 마침내 별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작지만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예쁘다.”

눈앞이 천천히 밝아왔다.

은은하게 번진 햇살로 비로소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을 수놓았던 별들이 점차 멀어지고 하늘은 팔레트처럼 아름답게 물든 구름으로 가득했다.

섬세한 작업 덕에 모든 벽이 하늘처럼 꾸며져 마치 구름 위에 올라온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두 사람이 왼쪽 벽에서 다가오는 창백한 달을 발견했다.

어슴푸레 빛나던 태양은 점차 밝아져 황금을 녹여낸 듯했고.

이내 겹쳐지기 시작했다.

달이 햇살을 막아선 탓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자 비다 라바니는 다시금 불안해졌다.

지금의 아름다움이 곧 어둠에 다시 먹힐 것만 같았다.

블랑쉬와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죽여 저 달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아.”

달이 마침내 태양 한가운데에 이르고 두 사람이 동시에 감탄했다.

새카만 달 뒤에서도 태양은 아름답게 고리를 이루었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을 때보다 더욱 간절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둠이 드리워도 자애롭게 미소 짓는 햇살이 안도감을 주었다.

두려운 장막 뒤에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끄. 끄윽.”

달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비다 라바니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벅차오르는 감정이 자꾸만 눈물을 밀어냈다.

* * *

오후가 되었다.

쇼콜라티에 갤러리를 찾은 방문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극찬을 쏟아냈다.

“금환 봤어?”

“줄이 너무 길어서 못 봤는데. 어때?”

“야, 무조건 봐. 진짜 대박이야.”

“어떤데.”

“와. 이건 말이 안 돼.”

“그러니까 어떠냐고.”

“말이 안 돼. 뭐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오후로 예정된 행사장으로 유명 인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기자들이 인터뷰를 따낼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프란시스코 미로! 오늘 발표회 어떻게 보셨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금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앙리 마르소의 신작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기자들이 행사장으로 막 입장하려던 스페인의 거장 프란시스코 미로를 붙잡았다.

굵은 선과 높이 선 코를 자랑하는 백발노인이 점잖게 웃었다.

“아주 환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금환은 자애로웠고 푸른 해는 아주 열정적이더군요. 마르소 군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기존 작풍과 다르다는 말씀이신가요?”

“여기까지 하죠. 아직 많이 못 보신 것 같은데 그런 대작에 말을 얹어 가치를 떨어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고수열, 윌리엄 토마스 등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입에서 대작이란 단어가 거론되자 기자들이 크게 놀랐다.

“잠시만요!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금환 감상이 더딘 이유가 무엇인가요!”

“푸른 해가 상징하는 게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기자들이 행사장 안으로 들어서는 프란시스코 미로에게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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