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41화 (34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15화

-르네상스-

4. 달 뒤에 숨어서(1)

폐점 위기에 내몰렸던 와인 바 티르 부숑에 단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이 되자 몇몇 사람이 어김없이 찾아왔고 그중 블랑쉬 파브르의 팬을 자청하는 두 사람이 카운터 앞에 앉았다.

“블랑쉬, 와인 공부는 좀 했어?”

“친한 척하지 마세요.”

블랑쉬가 메뉴판을 내놓았다.

“그래. 네 말에 대꾸해야 하는 파브르 씨 생각도 해야지. 얼마나 귀찮겠어. 안 그래요?”

“이해하는 척하지 마세요. 기분 나빠요.”

머쓱해진 두 사람이 메뉴판을 살폈다. 상품은 달라지는 일 없이 매일 똑같았고 그들의 요청도 한결같았다.

“추천해 주는 걸로 마실게.”

“저도 부탁해요.”

블랑쉬 파브르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샹볼 뮈지니에서 생산된 2017년산 와인을 꺼내 보였다.

체리와 라즈베리, 장미 향이 감미롭게 풍기는 상품이었으나 문제는 가격.

매일 같이 찾아오는 그들에게 한 병에 250유로나 하는 와인은 부담스러웠다.

“어…… 오늘은 좀 가볍게 가고 싶은데?”

“너도?”

블랑쉬에게 능력 있어 보이고 싶은 두 사람이 핑계를 댔다.

블랑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난 며칠간 온갖 허세를 부렸던 두 사람의 주머니가 마침내 궁해졌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는 적당한 가격의 와인을 따라주었다.

“이야. 이 풍만함이 좋더라고.”

“그러니까. 이거 메를로지?”

두 사람이 서로 와인에 대해 아는 바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비싼 와인을 마시든 수돗물을 마시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왜 모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잔을 닦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비다 라바니였다.

반가워하던 블랑쉬가 친구의 힘없는 모습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샤또 르팽 프랑 있어?”

비다 라바니가 가장 즐겨 마시는 와인으로 한 병에 8유로밖에 안 하는 저렴한 상품이었다.

“응.”

비다 라바니는 친구가 따라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힘없이 미소 지었다.

“맛있다.”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요즘 일이 많아서.”

“무리하면 안 좋아.”

여러 일을 함께하는 친구가 걱정되었다.

수입이 일정하지 않고 한 번 일했을 때의 보수도 적은 탓에, 비다 라바니는 들어오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종종 끼니를 거를 정도로 바쁜 날이 있었고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무슬림 놈이 와인도 마시네.”

“그러게. 뭘 안다고.”

카운터 자리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의 대화가 블랑쉬와 비다의 귀에 꽂혔다.

블랑쉬가 한마디 하려고 했으나 비다 라바니가 그녀의 손을 잡아 말렸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 갈게.”

“방금 왔잖아.”

“좀 피곤해서.”

“그래. 조용히 가는 게 좋을걸.”

남자가 또 한 번 비아냥대자 블랑쉬가 더는 참지 못하고 나섰다.

“취했으면 곱게 돌아가요.”

“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블랑쉬와 어떻게든 관계를 만들고 싶었던 남자들이 비다 라바니를 쏘아보았다.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자 비다 라바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한 일로 직원 입장인 친구가 곤란해지길 바라지 않았다.

“여기 두고 갈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수고해.”

“잠깐.”

비다 라바니가 도망치듯 티르 부숑에서 빠져나왔다.

숨을 길게 내쉬고 천천히 집으로 걸었다. 20분쯤 걸어 낡은 아파트 앞에 이른 비다 라바니를 다섯 남자가 둘러쌌다.

“요즘 너무 늦게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비다 라바니의 외삼촌 가니였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젠 인사도 안 해?”

“인사는 무슨!”

비다가 소리치자 무리 중 한 사람이 비다의 등에 날카로운 물건을 대며 위협했다.

가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곤 비다 라바니의 뺨을 툭툭 치쳤다.

“하나뿐인 조카와 누이를 두고 어떻게 안 찾아볼 수 있겠니. 음?”

비다 라바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다. 내가 아니었으면 넌 이미 죽었어. 감사해야지. 안 그래?”

분했다.

외삼촌 가니는 7월 기념비 위의 자유의 수호신을 그리던 비다 라바니를 우상을 숭배한다며 폭행했었다.

미셸 플라티니와 경찰의 도움으로 몇 년간 외삼촌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출소 후 가니의 만행은 나날이 심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돈을 요구하다가 거절하면 그림을 문제 삼아 행패를 부렸다.

때리고 목숨을 위협해도 꿈쩍도 하지 않자 어머니와 쇼콜라티에 놀이터를 다니는 아이들을 들먹였다.

“몇 번을 말해요. 이제 그림 안 그리니까 그만하라고요!”

가니가 일행을 둘러보며 비다를 비웃었다.

“돈은 벌고 있잖아.”

“……뭐라고요?”

“프랑스 놈들 밑에서 일하며 번 부정한 돈으로 잘 살 거라고 생각했어?”

* * *

신작 발표회를 준비하던 중에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뱅크스가 이번 신작을 무척 기대하고 있다는 글을 SNS에 올렸다.

만나면 사인을 해주겠다고 덧붙였는데, 그의 팬들이 댓글로 얼굴을 모르는데 어떻게 알아보냐고 성을 내고 있다.

“이사님.”

성귤 과장이 다급히 작업실로 들어왔다.

“네. 무슨 일이에요?”

“라바니 씨가 다쳤다고 합니다.”

“네? 어디를 어떻게요?”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습니다. 오늘 출근을 안 해서 연락해 보니 모친께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어디. 어디에요?”

“루이 르브헝입니다. 모셔다드릴까요?”

성귤 과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까운 병원을 찾았다.

병실 문을 여니 비다 라바니가 누운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모친 히나 라바니가 눈물을 훔치며 일어나시기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뭐 하러 왔어.”

비다가 힘없이 웃었다.

“뭐 하러 오긴. 어떻게 된 거야?”

비다는 대답하지 않않다. 히나 라바니도 한숨을 크게 내쉬며 병실을 나섰다.

아마 외삼촌 짓이리라.

두 사람 모두 내가 피해를 받을까 봐 말하진 않지만 벌써 몇 년째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모를 수가 없다.

“다친 데는?”

“괜찮아. 며칠 쉬면 나을 거야.”

“또 외삼촌 짓이야?”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에 시선을 두기를 얼마간.

녀석이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핑계였어.”

“핑계?”

“그냥. 돈 뺏고 싶었던 거야. 그림은 아무 상관 없었어.”

가득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난. 내겐 전부였던 것도 포기했는데. 그놈들은. 그놈들은…….”

쇼콜라티에에 막 가입했을 무렵의 일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나와 앙리, 블랑쉬, 마은찬과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부풀었던 비다는 어머니와 쇼콜라티에에 해를 끼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꿈을 포기하면서도 지키려고 했건만 그들에게는 하나의 핑계였던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서러웠을까.

비다는 한참을 흐느꼈다.

한탄스럽게도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프랑스 사회에서도.

무슬림 구성원 사이에서도 고통받는 친구의 심정이 어떨지 감히 넘겨짚을 수도 없다.

프랑스인들이 무슬림을 탄압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무슬림 여성과 아이들에게는 프랑스 사회 이상으로 잔인하게 구는 외삼촌 무리.

비다는 프랑스인보다 그를 두려워했다.

“내가 왜 그놈들 때문에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왜!”

속으로 삭이지 않고 이렇게 토해내는 게 차라리 나으리라 믿으며 손을 잡아 주었다.

“다 그놈들 때문이야. 그놈들이 나쁜짓하니까! 그러니까 나도 엄마도 아들리도 욕먹는 거잖아. 그걸로도 모자라서.”

상체를 들며 분을 터뜨리던 비다가 통증을 느끼곤 침대에 쓰러졌다.

“왜. 나한테 왜 그래…….”

울다 지쳐 잠든 비다를 두고 병실을 나서자 히나 라바니가 고개를 숙였다.

“잠들었어요.”

“매번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한동안 아무 일 없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에 두었다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비다와 아들리를 위해서라도 이대로 두면 안 된다.

“비다 나으면 이사부터 해요. 그 사람들 모르게.”

히나 라바니가 고개를 저었다.

“찾아낼 거예요. 파리에 있는 한.”

징역을 살아도 나와서 또 같은 짓을 저지르고, 이사를 해도 비다가 일하는 미술관을 돌며 기어이 새 주소를 알아낸다.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절망하는 것이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곧 연락드릴게요.”

차에 올라타자마자 성귤 과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번 일 처리할 변호사 알아봐 주세요. 뒤탈 없이 처리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법적인 문제는 내 힘으로도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놈들이 포기할 리 없다는 거다.

비다가 지금처럼 공개적인 일을 하면 계속해 달라붙을 테고, 시간이 흐를수록 잔인함은 더해질 터.

그렇다고 24시간 내내 경호를 붙일 수도 없으니 답답하다.

갤러리로 돌아와 작업실에서 비다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

방태호가 찾아왔다.

“비다 만나고 왔다며?”

“네.”

“좀 어때?”

“심하게 다친 것 같진 않아요.”

“하아.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러다 정말 큰일 생기는 거 아닌가 싶다.”

방태호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가만 보면 그놈들이 더 문제야.”

같은 생각이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라는 놈들은 쿠란 이외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쿠란마저 편협한 시각으로 해석해 패악을 저지른다.

그 대상은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비다 라바니 같은 무슬림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선은 비다와 히나의 안전.

법정에 세우고 거처를 옮겨도 끈질기게 따라붙으니, 이대로라면 정말 방태호의 말처럼 큰일이 생길 것 같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는데 마우스를 건드렸다.

절전 상태에 있던 컴퓨터가 켜지며 뱅크스의 SNS 글이 떠올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