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40화 (340/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14화

-르네상스-

3. 물과 가슴에 풀어내다(8)

아르센이 고용주의 고민을 덜어줄 물건을 챙겨 작업실을 찾았다.

“작가님, 견본 가져왔습니다.”

현존하는 물질 중 가장 어두운 누아르 1.0으로 만든 물감이었다.

빛을 99.975% 흡수한다는 특성을 제외하면 발색, 점성, 착색 등 기존 유화 물감과 큰 차이가 없었기에 곧장 사용할 수 있었다.

아르센은 앙리 마르소가 누아르 1.0을 통해 또 한 번 대작을 만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앙리 마르소는 반응하지 않았다.

작업에 몰두하면 종종 그래왔기에 아르센은 개의치 않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

작업실에 홀로 남은 앙리는 아르센이 두고 간 누아르 1.0을 한 번 흘겨볼 뿐 이내 고개를 돌렸다.

새 물감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반타 블랙이나 누아르 1.0 없이도 <금환>을 만들어 낸 고훈을 의식하는 탓이었다.

고집스러운 천재 화가는 오직 고훈이 창조해 낸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금환을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

그러기를 벌써 일주일째.

빈 캔버스 앞을 지키고 있던 앙리 마르소가 마침내 움직였다.

발색을 확인하고자 널어두었던 유화 물감을 모두 치우고 작업실 선반 가장 아래에서 수채화 물감을 꺼냈다.

금환일식의 경험이 너무나 강렬한 탓에 찬란한 금색과 아주 어두운 검은색에 집착하게 되었으나.

그러한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빛을 완전히 차단한 뒤에 실제 빛을 활용한 고훈의 <금환>보다 검거나 밝은 색상을 활용할 수 없었고.

누아르 1.0은 선택지에서 배제한 지 오래였다.

앙리 마르소는 차라리 농도를 조절하고 혼합하는 등 유연성 높게 활용 가능한 수채화 물감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강렬하진 않지만 이번 작품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내기엔 더할 나위 없다고 판단했다.

캔버스를 내리고.

잠시 고민한 끝에 세목1) 수채화 용지를 꺼내 들었다.

색을 밝게 사용하고 섬세하게 표현하고자 면 함유량이 높은 중성지를 선택했다.

“…….”

나무 상자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든 앙리 마르소는 그것을 천천히 문지르며 흰 종이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없을 그곳에 앙리 마르소만이 볼 수 있는 금환이 생겨났다.

모든 준비를 마친 화가는 시가 끝을 잘라 불을 붙였다.

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시가의 진한 향을 느끼며 마침내 붓을 들었다.

* * *

을씨년스러운 밤공기를 헤치고 파란 태양이 떠올랐다.

새벽하늘을 창백한 장막으로 덮고.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히 내려다보는 네게 시선을 빼앗겼다.

눈이 시려올 즈음.

밤하늘을 수놓았던 별들이 푸른 햇살 뒤로 저물고 이따금 울던 풀벌레도 잠들고.

찬 공기와 함께 삼켜낸 말이 가슴에서 맴돈다.

갈 곳 잃은 말들이 자꾸만 맴돈다.

꼬리를 문다.

아주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뜻 모를 열기에 닿아 고리를 이룬다.

금으로 빛난다.

온몸을 헤집듯 세차게 유영하는 그것을 더는 품을 수 없었다.

가슴 깊숙이 손을 뻗어 토해내듯 끄집어낸 고리.

푸르스름한 햇살. 수없이 삼켜낸 말과 들끓는 열기가 고작 작은 반지 하나로 빚어졌다.

세상에 하나뿐인 반지로 태어났다.

너를 담기에는 너무나 작은 그것을 눈에 댄다. 푸른 너를 감싼 금빛이 아름답다.

얼어붙은 호수 같던 태양이 녹아내린다.

금테를 두르고 그렁그렁.

뚝- 뚝-

방울 져 떨어진다.

* * *

“관장님, 윌리엄 토마스 경매건 71만 달러에 낙찰받았습니다.”

마르소 미술관에 전시할 목적으로 참여한 경매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소식에 미셸 플라니티가 안도했다.

윌리엄 토마스는 고훈, 앙리 마르소, 장미래가 주목받기 전 세대.

고수열, 프란시스코 미로, 프랜시스 베이컨, 하라 요시토모, 아니쉬 푸어, 데미안 카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거장이었다.

그의 작품을 전시하려는 미술관은 넘쳐났고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수고했어요. 운송까지 긴장 풀지 말라고 전해줘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재 서류를 살피던 미셸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주변이 고요해서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르소 미술관 관장, 마르소 갤러리 대표, 쇼콜라티에 CAO까지 겸직하다 보니 매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미셸이 기지개를 쭉 켠 뒤에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가 제법 쌓인 듯했다.

프러포즈를 받고 보름간 달라진 일은 없었다.

언론 공개는 고사하고 아주 가까운 이들에게만 알렸을 뿐이었다.

그녀를 찾는 곳이 많고 앙리 또한 작업에 집중하여 최근 며칠간 서로 얼굴도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왼손 약지를 보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부우웅-

적당히 정리하고 일어서려던 차.

핸드폰이 울렸다.

앙리 마르소였다.

“응.”

-어디야.

“미술관. 정리하다 보니 좀 늦었네. 왜?”

-작업실로 와.

앙리 마르소가 작업실로 오라고 할 때는 자세를 취한다든가, 재료를 구한다든가, 혹은 전시에 관련한 일을 의논할 때였다.

“피곤한데. 당장 쓰러지고 싶어.”

-여기서 쓰러져.

앙리가 전화를 끊었다.

미셸이 인상을 쓰곤 짐을 챙겼다.

며칠 못 봤으니 얼굴이라도 볼 겸 식사나 같이할 생각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등을 기대니 어깨가 짓눌리는 듯했다.

‘무리하긴 했나 보네. 이번 주말에는 아무것도 안 해야지.’

주말 동안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녀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마르소 저택을 목적지로 지정하고 눈을 붙였다.

세상 모르게 잠들었던 미셸이 도착 알람과 함께 눈을 떴다.

‘별일 아니기만 해봐.’

잠깐의 숙면으로 졸음은 몰아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회복 캡슐에라도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며 머리를 새로 묶고 앙리의 작업실을 찾았다.

“뭐야.”

작업실은 난장판이었다.

여러 물감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고 앙리 마르소는 피곤한 사람을 불러놓고는 소파에서 팔짱을 낀 채 졸고 있었다.

잔뜩 약이 오른 미셸이 그를 깨우고자 다가갔고 앙리 앞에 이른 순간 푸른 태양을 발견했다.

“…….”

일렁이는 호수처럼 표현된 태양이 금환을 담고 있었다.

바람처럼 표현된 속눈썹.

창공으로 그려낸 흰자위.

그리스에서 경험한 금환일식과는 너무도 다른 색채였으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눈이었다.

앙리 마르소가 꺼낸 반지를 보고는 눈물이 차올랐을 때였다.

“으음.”

인기척을 느낀 앙리가 잠에서 깼다. 미셸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입을 막 열려던 차 그녀의 어깨가 떨림을 눈치챘다.

“어때.”

미셸이 고개를 돌렸다.

“가져.”

이보다 낭만적인 선물은 없었다.

* * *

“허허.”

고훈의 <금환>과 앙리 마르소의 <푸른 해>를 감상한 고수열이 감탄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방태호는 드물게 흥분하여 호들갑을 떨었다.

“미쳤어. 정말 미쳤어.”

<금환>은 빛과 공간,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강렬한 이미지로 사람을 흔들어 놓았다.

한편 금환일식과 프러포즈의 이미지를 결부시킨 <푸른 해>는 수채화의 자연스러운 표현력으로 몽글몽글하게 감수성을 자극했다.

마음을 빼앗긴 방태호는 이 두 작품을 어떻게 공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건 생각도 못 했어요. 원래 수채화도 했어요?”

“기본이야.”

고수열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 손자와 그런 고훈에게 우쭐대는 앙리 마르소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부터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이르기까지.

고훈은 앙리 마르소의 공간 활용 예술에 크게 감동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본인만의 작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고훈의 여러 작품을 수집했던 앙리 마르소도 마찬가지였다.

<푸른 해>는 고훈이 그렸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기발한 구도로 구성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성장해 나가니 더는 바랄 게 없었다.

“날짜부터 잡죠. 아니, 일단 전시실부터 내야지. 훈아, 언제까지 될 것 같아? 새로 그려야 하나?”

“진정하세요. 전 좀 걸릴 거예요.”

“그래? 이거 같이 발표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마르소 씨 생각은 어떠세요?”

“주인한테 물어봐.”

방태호가 고개를 돌리자 미셸이 잠시 고민했다.

한시라도 빨리 <푸른 해>를 자랑하고 싶었으나 방태호의 말대로 <금환>과 <푸른 해>는 함께 공개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

“훈이 일정 따라야죠.”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그리기만 하면 되니까.”

고훈이 미셸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방 구조물에 관련한 것은 전부 외주를 맡기면 되고 한 번 그려놓은 그림을 크게 옮기는 것뿐이니 몇 주씩 걸릴 리 없었다.

고훈은 다시금 <푸른 해>를 감상하다가 괜히 앙리 마르소를 밀었다.

그의 작품을 여럿 봤지만 이번만큼 가지고 싶은 경우는 없었다.

“경매에 나왔으면 꼭 샀을 거예요.”

“뭐?”

고훈이 본인 작품을 사고 싶다는 말에 앙리 마르소가 귀를 의심했다.

“사고 싶다고요. 정말 멋져요.”

“그럼 사 갈래?”

“정말요?”

미셸이 장난스럽게 묻자 고훈이 곧장 받아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앙리를 놀리지 않을 순 없었다.

“술 먹었어?”

앙리 마르소가 인상을 쓰자 미셸과 고훈이 함께 웃었다.

“으음. 내년 르네상스 때 공개해도 괜찮을 것 같구나. 그만한 무대에 어울리는 작품도 드무니.”

고수열이 슬며시 제안했다.

미셸과 방태호는 잠시 망설였는데 고수열의 제안대로 <금환>과 <푸른 해>는 르네상스 본무대에 어울렸다.

세계 예술 진흥 협회(WAPA)가 발족하고 처음 여는 국제 행사인데다.

각국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선 만큼 성공적으로 치러져야 했다.

고훈과 앙리 마르소 또한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후 처음으로 참가하는 국제 전람회이니 여러모로 효과적일 듯했다.

“작품은 또 만들면 돼요.”

고훈이 나섰다.

“내년까지 기다리면 이거 없이 약혼식 할 거 아니에요. 그럴 순 없죠.”

고훈이 미셸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걸 생각 못 했구나. 그렇지. 그러면 안 되지.”

고수열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언약식 때 <푸른 해>가 빠질 순 없었다.

그런 훈훈한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앙리 마르소만이 일행과 거리를 두고 케일 주스를 마셨다.

* * *

1)수채화 용지 종류.

표면에 굴곡이 없어 중목이나 황목에 비하여 세밀한 묘사에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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