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39화 (33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13화

-르네상스-

3. 물과 가슴에 풀어내다(7)

다음 날.

앙리 마르소는 캔버스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훈의 <금환>을 통해서 금환일식을 마주한 경험을 상기했기에 진행하던 모든 작업이 덧없게 느껴졌다.

준비해 두었던 여러 스케치가 <금환>을 본 순간 가치를 잃고 말았다.

<금환>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광의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천재 화가는 막막하게 펼쳐진 빈 캔버스 앞에서 좀처럼 붓을 들지 못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비서 아르센이었다.

“CNES에서 협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누아르 1.0을 인공위성에 사용하고 싶다는 내용입니다.”

누아르 1.0이 공식 발표되기도 전에 소식을 접한 프랑스 국립 우주 연구 센터(CNES)가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었다.1)

“그렇게 해.”

고훈에게 주려고 만들었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작품 생각으로 가득한 앙리 마르소가 무심하게 답했다.

“네. 협의 후에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의사 결정이 떨어지면 공급 방식, 거래 대금 등 세세한 문제는 유능하고 충직한 고용인들이 알아서 처리할 터였다.

“또 이사회에서 누아르를 시장에 판매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앙리가 고개를 돌렸다.

“개발 과정에서 얻은 채도, 명도 개선 관련 기술로 수익을 내자는 발상입니다.”

아르센이 사업 계획서를 넘겼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색이라는 콘셉트로 물감 브랜드를 개발, 유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시장 조사를 해본 결과 수요가 상당할 듯합니다.”

반타 블랙만 하더라도 사용 문의가 지속된 데다 미술 인구가 4년째 큰 폭으로 상승하였다.

누아르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신기술을 도입하였고 전문가용 물감을 다루는 물감 제조사 르프랑을 소유하여 기반 시설도 갖춘 마르소 재단에서는 이를 새로운 사업 모델로 활용하길 바랐다.

“그렇게 해.”

“네. 알겠습니다.”

“아.”

앙리가 작업실을 나서려던 아르센을 불러세웠다.

“멍청한 놈은 못 쓰게 해.”

반타 블랙을 독점한 아니쉬 푸어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전달하겠습니다.”

* * *

[가장 검은색 탄생]

[에콜 폴리테크니크 물리 연구소 누아르 1.0 개발 공식 발표]

[르프랑, “누아르 1.0을 포함한 새 물감 브랜드 출시 예정”]

우수한 착색력과 다양한 상품을 다루는 물감 제조사 르프랑이 새 브랜드 출시를 발표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 부속 물리 연구소가 고안해낸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 느와르 1.0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신기술을 얻은 덕이다.

새 기술 및 신상품의 최종 권한자 앙리 마르소는 “예술가들이 더욱 자유롭게 활동하길 바란다”고 밝히며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저렴한 가격으로 접근할 수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이는 반타 블랙을 독점한 아니쉬 푸어를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미술계는 누아르 1.0 출시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그동안 반타 블랙에 아쉬움을 느꼈던 예술가들은 앙리 마르소의 가시 돋친 비판을 지지하며, 르프랑 물감을 사용하겠단 뜻을 내비쳤다.

이처럼 관련 내용이 미술계를 뜨겁게 달구자 르프랑의 주가는 이틀간 17% 상승하며 고공행진했고.

르프랑은 앙리 마르소 효과를 제대로 누릴 수 있었다.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댘ㅋㅋㅋㅋㅋ

└자세히 설명해 줄 사람 없냐ㅠ

└아니쉬 푸어 성이 poor잖아. 말장난인 듯.

└사람 성이 어떻게 Poor야?

└음차로 표기해서 그런 듯? 원래 영어 아니고 힌디어나 뭐 다른 언어였을 테니까.

└사실 화날 만하지. 반타 블랙 쓰고 싶은데 아니쉬 푸어가 독점 걸어놔서 못 쓰던 사람 진짜 많았거든.

└맞아. 고훈 뉴튜브만 들어가도 이번 작품 할 때 반타 블랙을 못 써서 아쉽다고 얘기한 영상 있음.

└훈이 때문에 열받았던 거네.

└나 이해했어. 훈이가 물감 못 쓰니까 앙리가 빡쳐서 더 좋은 물감 만들어 줬단 얘기지?

└ㅇㅇ 앙리가 앙리했단 말임.

“억울한 사람이 많긴 했나 봐.”

고훈에게 누아르 1.0에 관한 기사를 정리해 보여주던 김지우가 입을 뗐다.

“덕분에 요즘 포럼에선 이 이야기밖에 안 하더라고. 아니쉬 푸어도 못 버티겠는지 입장문 내놨더라.”

아니쉬 푸어는 개인이 사용하기에는 가격이 너무 비싼 탓에 가난한 예술가가 소외감을 느낄 것을 우려했다고 밝혔다.

“다들 지금 와서 그렇게 말하면 믿겠냐고 하더라고.”

김지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당사자로서 어때?”

기사를 읽던 고훈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다고 말할 게 없어요. 처음 알았어요.”

“너 쓰라고 만들었다던데?”

고훈이 눈만 깜빡였다.

쉬민케가 새 물감을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앙리에게는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었다.

“아.”

그러다 문득 그에게 처음 <금환>을 보여준 날이 떠올랐다.

“그래서 놀랐구나.”

“무슨 일인데? 응?”

“아니에요.”

고훈이 시치미 뗐다.

아직 <금환>을 발표할 시기는 아니라고 판단한 탓인데, 질문에 답하다 보면 관련 내용도 언급하게 될 듯하여 말을 아꼈다.

“말 좀 해주라. 나 요즘 소재 떨어져서 힘들단 말이야.”

“책 많이 팔렸잖아요.”

고훈, 장미래, 앙리 마르소 세 명을 자세히 다룬 김지우의 저서 <빛의 미학>은 2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전처럼 생활고에 시달릴 리 없었다.

“할 수 없지.”

김지우가 종이 상자를 꺼내자 고훈이 눈을 크게 떴다.

유명 디저트 가게 아미띠에에서 만든 오페라였다.

하루에 200개만 판매되는데, 소문 난 맛집답게 개점과 동시에 완판되어 좀처럼 구하기 힘들었다.

평소 아미띠에의 오페라를 먹어보고 싶었던 고훈이 놀라 물었다.

“어떻게 구했어요?”

“6시부터 줄 서서 기다렸지.”

고훈이 손을 뻗자 김지우가 씩 웃었다.

“이번 작품 얘기해 주면 다 먹어도 되는데.”

고훈이 눈썹을 좁혔다.

“이거 진짜 맛있더라구. 가나슈랑 에스프레스 조합이 진짜 대박이야.”

초콜릿과 커피 조합이라면 무조건 맛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버터로 만든 크림까지 함께하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먹으면서 얘기할까?”

김지우가 상자를 열자 커피 향이 달콤하게 번졌다.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고훈이 크게 한 입 먹었다.

“한 달 전쯤에 그리스 다녀왔거든요.”

“그리스?”

“금환일식 보러 간 건데.”

고훈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미띠에의 오페라는 과연 요망스러웠다. 잠들었던 모든 미뢰가 깨어나는 듯했다.

악마의 유혹이라고 했던가.

가나슈의 농후한 풍미와 에스프레소 사이를 버터 크림이 연결해 주었다.

고훈은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오페라는 애틋하게 탐했다.

“금환일식?”

김지우가 한 번 더 묻자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거 그리려고 하다 보니까 검은색이 필요했어요. 반타 블랙 같은.”

“아.”

“그런데 독점이 걸려 있더라고요. 대체품을 찾아도 그만한 물건을 찾을 수 없어서 고생 좀 했어요.”

“아. 그래서 누아르 1.0으로 해결했구나? 아닌데? 몰랐잖아.”

김지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새 물질이 개발된 사실을 몰랐던 고훈이 반타 블랙 대신 누아르 1.0을 사용할 리 없었다.

“그전에 쉬민케에서 연락이 왔어요. 물감 만들어 주겠다고.”

“아! 그럼.”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1년이나 걸린다고 해서 거절했어요.”

“엥?”

“다른 방법으로 해결했어요. 더 이상은 비밀이에요.”

이른 새벽에 나서서 아미띠에 오페라를 구입한 김지우가 아쉬워했다.

그러나 이미 한 통을 다 먹어버린 고훈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금환일식을 대상으로 한 새 작품을 완성했고, 그 과정에서 앙리 마르소와 쉬민케가 도움을 주려고 했다는 정도만 활용할 수 있을 듯했다.

아쉬운 대로 글 소재로 활용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김지우가 펜을 내려놓았다.

“쇼콜라티에 쪽은 어때? 수익은 계속 늘던데.”

“음.”

고훈이 입맛을 다셨다.

“적자가 나거나 하진 않는데 좋은 상황은 아니에요.”

화가 공동체 쇼콜라티에는 고훈과 앙리 마르소 두 사람에게 크게 기대어 운영되고 있었다.

갤러리 자체가 고훈 소유이기도 하고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인기 작가 둘이 있으니 매해 수익이 늘곤 있으나 마은찬 외 성과를 보이는 회원이 없었다.

“원래 수익 생각하고 만든 건 아니니까 길게 보려고요. 은찬이 형 같은 경우도 있고. 블랑쉬는 언젠가는 꼭 인정받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김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4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로 주목받은 마은찬은 이미 영국 화이트채플과 단독전을 준비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블랑쉬 파브르 또한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으니 고훈의 예측대로 곧 빛을 보리라 판단했다.

“그러고 보니 한 명 더 있었잖아. 비다 라바니 그 애는? 전에는 가끔 얘기했었잖아.”

고훈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원한다면 모를까.

언론에 알려지면 아물어가던 상처가 벌어질 수 있으니 답하고 싶지 않았다.

김지우도 아쉽지만 더는 파고들지 않았다. 고훈이 거절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김지우가 아쉬워하자 고훈이 빙그레 웃었다.

“작품 완성되면 제일 먼저 보여드릴게요.”

“정말?”

“그럼요.”

* * *

인도 출신의 영국 예술가 아니쉬 푸어가 책상을 내려쳤다.

언론과 여론 모두 아니쉬 푸어를 질타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누아르 1.0의 개발 비화가 알려지니 비난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노년의 욕심이 전도유망한 화가의 앞길을 막아설 뻔했다는 강도 높은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 애송이가…….”

아니쉬 푸어가 앙리 마르소의 사진을 보며 주먹을 떨었다.

모든 분노가 멍청한 사람은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로 자신을 조롱한 앙리 마르소에게로 향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반타 블랙보다 나은 건 만들 수 없다며!”

아니쉬 푸어가 반타 블랙의 개발자를 질책했다.

“개선품을 만들자는 제안을 거절한 건 푸어 당신입니다. 인제 와서 제게 책임을 전가하시려는 겁니까?”

“뭐라고?”

“반타 블랙의 가치가 떨어지니 개발을 중단하라 하셨지요.”

개발자가 옷깃을 여미며 선을 그었다.

반타 블랙을 개발했을 때만 해도 상황은 긍정적이었다.

여러 기구에서 반타 블랙을 사용하길 원했고, 개발자는 설비를 확충해 반타 블랙의 품질을 개선하고 생산 단가를 줄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미 큰돈을 투자했던 아니쉬 푸어는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미 완성된 반타 블랙으로 최대한의 수익을 내고 싶었다.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여러 단체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반타 블랙 대신 대체품을 찾기 시작했고, 예술가들은 독점권 때문에 반타 블랙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B2B, B2C 등 모든 사업 모델을 잃은 개발진은 훌륭한 제품을 만들고도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다.

“빌어먹을. ……얼마면 되겠어.”

아니쉬 푸어는 누아르 1.0보다 나은 제품을 원했다.

그를 한 층 더 높은 위치에 서게 해준 연작, 블랙을 포기할 순 없었다.

얼마나 큰돈이 들든 가장 검은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란 타이틀을 되찾고 싶었다.

“아뇨. 저는 여기서 손 떼겠습니다. 또 버려질 게 뻔하니까요.”

“뭐라고?”

“그럼.”

아니쉬 푸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무실을 나선 그를 붙잡지 못했다.

* * *

1)누아르 1.0의 모티프는 블랙 2.0이다.

블랙 2.0은 스튜어트 셈플을 비롯한 몇몇 예술가가 합심해 아니쉬 카푸어의 반타 블랙에 맞서 개발한 물질인데.

스튜어트 셈플이 블랙 2.0을 아니쉬 카푸어와 그 관계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여기까지 보면 아니쉬 카푸어를 통쾌하게 비판한 일화나 실상은 다르다.

작중에서 나오는 누아르 1.0과 달리 블랙 2.0은 반타 블랙보다 저렴한 대신 품질이 낮고 이는 개선판 블랙 3.0 또한 마찬가지인데 이조차 허위‧과장 광고였다.

빛의 97.5%를 흡수할 수 있다고 광고한 블랙 2.0은 실험 결과 빛의 95%만 흡수하는 데 그쳤다.

개선품 블랙 3.0은 특별한 화학 공정이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으나 충격에 약해 착색이 잘 안 되는 단점이 있다.

아니쉬 카푸어의 독점을 비판한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스튜어트 셈플 역시 하나의 마케팅 수단으로 카푸어를 이용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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