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38화 (33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12화

-르네상스-

3. 물과 가슴에 풀어내다(6)

낭만을 모르는 친구다.

“아무튼. 하던 건 어떻게 됐어.”

“금환이요?”

“그래.”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마땅히 없더라고요.”

“그랬겠지.”

처음에는 미셸과의 일 때문에 기분이 좋은 거라 생각했는데, 묘하게 우쭐한 표정이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았어요.”

“뭐?”

갑자기 큰 소리를 내서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요. 뭐 잘못됐어요?”

“……아니.”

금세 얼굴을 찌푸리며 못마땅해한다.

“쉬민케에서 연락이 왔다더니 거기서 해결했어?”

“아뇨. 1년이나 걸린다고 해서 없던 일로 했어요.”

“그럼?”

“어차피 빛이 있어야 색도 있잖아요. 반타 블랙이 아무리 어두워도 빛이 없는 것보단 못할 테고. 그래서 암실을 만들었어요.”

* * *

반타 블랙을 찾는다고 해서 기껏 그보다 검은 물질을 개발해냈거늘.

녀석이 내놓은 대답은 충격이었다.

반타 블랙을 사용할 방법이나 그보다 검은 안료를 찾아야 한다고만 생각한 탓이다.

확실히 그 어떤 검은색도 어둠보다 검을 순 없다.

하지만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니 작품을 감상할 수 없을 터. 그렇기 때문에 미처 생각지 못한 방법이다.

“감상은.”

“보여줄게요.”

녀석이 일어나 앞장섰다.

“…….”

분명 보여준다고 말했다.

가장 먼저 시각 대신 다른 감각을 활용하는 방식을 떠올렸다.

완전한 암실에서.

해가 뜨기 전 금환일식을 앞둔 어둠 속에서 새벽 공기와 냄새, 바람, 파도치는 소리, 초목이 서로 스치는 소리 등을 경험하게 할 수 있다.

비록 금환일식을 마주하진 않지만 어둠 속에서 천천히 고조되는 긴장감을 느낄 테고.

제목을 통해 그것이 금환일식을 앞둔 상황임을 알게 된다면, 막연하게나마 동경할 것이다.

내 방식은 아니나.

관람객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측면에서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하나 녀석은 분명 보여준다고 말했다.

“여기예요.”

쇼콜라티에 갤러리 2층 서쪽 복도 끝 작은 방 앞에 섰다. 이런 곳도 있었나. 찾아올 일 없었던 외진 곳이다.

“아직 작업 중이니까 다른 거 만지면 안 돼요.”

쓸데없는 걱정이다.

문을 열자 차단막도 함께 길을 텄다.

“문 닫고 기다리면 돼요.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서. 너무 앞으로 가진 말아요.”

“넌 안 들어와?”

“좁아서 혼자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어요.”

녀석이 문을 닫았다.

밝은 곳에 있다가 밀폐된 공간에 들어서니 갑작스레 어둠이 밀려들었다.

시야가 차단되니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다. 숨을 들이마시자 미약하게 느꼈던 아크릴 물감 냄새가 강해졌다.

1분? 2분?

시간 감각이 무뎌진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시간은 되었을 텐데 뜨거나 감아도 차이가 없다.

슬슬 지루해지려던 차.

정면에 태양이 나타났다.

정면과 양쪽 옆면에 이른 구름이 태양의 자애로운 미소를 받아들였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고 말하듯.

해를 중심으로 펼쳐진 무지개 속에 놓이고 말았다.

조금 전의 어둠이 거짓말 같다.

“…….”

이 안도감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이 거룩함에 기대어 유년 시절을 보냈었다.

셰리.

셰리.

나의 어머니.

부모의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할 때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과 자아가 형성되기 전에도 피부와 본능으로 겪었던 소외감을 그녀의 따뜻한 품 안에서 잊을 수 있었다.

왼쪽에서 달이 찾아든다.

서서히 해를 가로막는다.

그럴수록 빛은 더욱 밝아지고 해와 달이 일직선에 놓이는 순간 완전한 금환이 태어났다.

약속이다.

태양은 미소를 가린 어둠 뒤에서도 빛을 내 약속의 증표를 이루었다.

그 무엇이 당신과 나 사이를 갈라두려고 해도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맹세의 반지.

그녀가 남겨준 사랑.

미셸.

그림자가 지기에 더욱 밝아오는 금환 앞에서 평온을 찾는다.

“…….”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둘러본다.

녀석은 가장 검은 물감에 기대지 않았다.

어둠 뒤에 광명을 마주한 경험을 전달하고자 더욱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완전한 암실을 경험하게 하고 태양 그림 뒤에 놓은 조명으로 빛을 강조했다.

검은 물감 대신 창백한 달로 태양을 막아서 그림자가 지게 했고 그럼으로써 반타 블랙을 대체했다.

조명을 더 세게 비추어 대조효과를 유도한 것이다.

이 좁은 공간은 또 어떠한가.

정면과 옆면에 햇살을 받아 무지개로 빛나는 구름을 그려 넣어, 어둠 속에 놓였던 감상자가 한순간에 창공에 이른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이건 솜인가.

구름 그림 사이에 조금씩 솜을 붙였다. 아마 현장감을 높이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러나 이 모든 것조차 녀석의 손길이 닿지 않았더라면 조잡한 장치였을 뿐이다.

문을 열고 나서자 녀석이 해맑게 웃는다.

“어땠어요?”

멋진 경험이었다.

그리스에서 금환일식을 접했던 순간만큼이나 벅찬 경험이었다.

무슨 물감을 사용해야 할까.

어떻게 칠할까.

물은 얼마나 섞어야 할까.

그러한 질문에 녀석은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물감을 가슴에 풀어내는 이 녀석에게 처음부터 누아르 1.0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1)

“나쁘지 않네.”

* * *

-네가 바라는 건 뭐든지 해줬어. 그런데 인제 와서 그만 만나자고?

-내가 바라는 거? 내가 너한테 돈 달라고 했니? 옷 사달라 했어?

-그럼 뭐야!

“오.”

최근 프랑스에 유행 중인 이한나 작가 원작의 드라마를 시청하던 미셸이 눈빛을 빛냈다.

여주인공이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남주인공의 뺨을 후리자 묘하게 속이 후련했다.

뺨 맞은 남주인공이 비아냥거렸다.

-왜. 넌 좀 달라 보이고 싶어? 웃기지 마. 차라리 달라고 해!

남주인공의 뺨이 한 번 더 돌아갔다.

-너 만날 때마다 내 기분이 어떤지 알기나 해? 내가 거지야? 적선하고 싶으면 딴 데 가서 알아봐. 사람 비참하게 하지 말고!

-뭔 소리야!

여주인공이 또 한 번 손을 올리자 남주인공이 움찔했다.

“아항핳핳핰핳.”

미셸이 웃음을 터뜨렸다.

찌질하고 돈 많은 남주인공은 어떻게든 여주인공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고.

재능 있으나 빛을 보지 못한 여주인공은 그런 남주인공을 경멸하고 있었다.

남주인공은 열심히 살아가는 여주인공에게 영향을 받아 천천히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전형적인 이야기였다.

미셸은 찌질하면서도 귀여운 면이 있는 남주인공이 마음에 들었다.

“귀엽지 않아?”

미셸이 고개를 돌려 앙리에게 물었다.

앙리 마르소는 빠삐용을 안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

미셸이 TV 소리를 줄이고는 물었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지라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걱정되었다.

“쇼콜라티에 다녀온다고 했었잖아. 무슨 일 있었어?”

“어.”

“끝?”

“뭐.”

“말 안 해?”

“왜?”

미셸은 앙리의 복부에 훅을 꽂아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상냥히 웃었다.

“걱정되니까.”

“걱정할 일 아니야.”

미셸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아빠 품에서 졸고 있던 빠삐용이 위험한 분위기를 느껴 도망쳤다.

“고훈이 완성했어.”

앙리와 고훈이 금환일식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든단 사실은 미셸도 잘 알고 있었다.

“누아르 1.0 어제 완성했다며. 벌써 전해준 거야?”

“아니. 필요 없었어.”

“대체품 찾았대?”

“아니.”

“그럼? 다른 그림 그렸어?”

“아니.”

미셸의 얼굴이 점차 험악해졌다.

“대화할 생각이 있긴 해? 뭘 어떻게 그려서 이러냐고.”

“너.”

미셸이 멈칫했다.

“나?”

“너랑 셰리.”

“훈이가 나랑 엄마를 그렸다고?”

“어.”

“……왜?”

당황스러웠다.

금환일식을 그린다던 고훈이 갑자기 왜 자신과 어머니를 그렸는지, 그걸 본 앙리가 왜 충격을 받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앙리가 간격을 두었다가 쇼콜라티에 갤러리 2층 끝에서 경험한 일을 상세히 전달하자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대단하네. 나도 보고 싶다.”

“전시용은 따로 만든다고 했어. 좁아서 한 명밖에 못 들어가니 전시하기엔 적당하지 않다고.”

“하긴. 그렇겠다.”

미셸이 앙리를 살폈다.

즐겨보던 드라마도 신경 쓰지 않더니 고훈에게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앙리 마르소의 작품은 어떤데?”

앙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흡족할 만한 결과를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셸은 그가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재촉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랑스레 작품을 보여줄 터였다.

다시 TV 음량을 높였다.

장면이 바뀌어 여주인공의 마음을 사고 싶은 남주인공이 연애지침서를 읽는 장면이었다.

-아버지가 도둑이신가 봐요? 별을 훔쳐서 눈에 넣어주셨으니?

-방금 지진 난 거 느꼈어요? 당신이 내 가슴을 흔들었잖아요.

-꽃에 물 주자고 하면서 머리에 물을 끼얹으라고?

-테이블이 별로네. 너랑 나 사이를 갈라놓았으니까.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에 밑줄까지 치며 외우는 남주인공의 행동이 어이가 없었다.

“킄흐흫흫큭.”

작품 고민으로 심각해하던 앙리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에 미셸이 웃고 있었다.

순간 오전에 고훈이 한 말이 떠올랐다.

“저게 좋아?”

“귀엽지 않아?”

앙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귀엽기는커녕 제정신이 아닌 듯싶었다.

“웃지 마.”

“왜. 재밌는데.”

“작품 생각을 못 하잖아.”

또 헛소리였다.

앙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미셸이 TV를 향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하며 고개를 돌렸다.

“방금 설마 나 예쁘다고 한 말이야?”

“아니. 시끄럽다고.”

* * *

1)Noir. 프. 검다는 뜻.

누아르 1.0은 앙리 마르소가 지원하여 개발된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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