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37화 (337/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11화

-르네상스-

3. 물과 가슴에 풀어내다(5)

“잘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딸과 저녁을 함께하던 셰리 가도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운을 띄웠다.

미셸 플라티니는 대답 대신 신경질적으로 오리고기를 썰었다.

앙리에게 관계를 강요하고 싶지 않아 그가 마음먹기를 기다렸거늘.

기어이 오늘에 이르고야 말았다.

“너도 알다시피 앙리 말투가 좀 거칠잖니. 평범하게 대했으면 좋겠는데.”

미셸이 음식을 입에 한가득 집어넣었다.

솜씨 좋은 어머니의 요리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꽁피 드 까나르였지만1)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림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설마 말도 없이 밥만 먹고 오는 건 아니겠지?”

듣고 싶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앙리의 맞선 이야기를 반복해 들어야만 했다.

앙리의 확실하지 않은 태도와 오랜 세월 관계를 숨겨 왔던 피로감, 앙리를 친아들처럼 여기는 어머니 등이 그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알고 보면 참 상냥한 아인데 그걸 표현할 줄 모르니까. 이번이 아니라도 좋으니 마음이라도 좀 열었으면 좋겠어.”

꾸역꾸역 음식을 씹던 미셸이 와인 잔을 들어 단숨에 넘겼다.

“얘, 천천히 좀 먹어. 체하겠다.”

미셸이 개의치 않고 볶은 그린빈을 입에 마구 넣자 셰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미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긴. 너 속상한 일 있으면 과식하잖아. 뭔데. 응?”

“없다니까.”

딸이 빵을 세 개나 뜯으니 보통 일이 아닌 듯싶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데다, 직장 때문에 충분히 사랑해 주지 못한 탓에 딸은 항상 아픈 손가락이었다.

의젓하고 성실하게 자라 주었으나 너무 일찍 철이 든 탓일까.

고민을 털어놓지 않고 홀로 삭이는 모습에 항상 마음이 쓰였다.

“요새 계속 야근하더니 일이 잘 안 돼?”

“아니.”

“그럼 뭔데. 말해 봐. 응?”

“됐어.”

딸이 그릇과 포크를 챙겨 일어나자 셰리가 다시 한번 물었다.

“엄마한테는 말할 수 있잖아.”

지난 며칠간 앙리 마르소와의 관계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미셸이 돌아섰다.

“그놈 얘기 좀 그만해.”

“그놈이라니. 앙리?”

눈물 맺힌 딸의 눈을 본 셰리가 문득 예전 일을 떠올렸다.

자신보다 앙리를 더 아끼는 것 아니냐며 울었던 어린 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단 한 번뿐인 일이었으나 큰 죄책감을 느낀 일이었다.

셰리가 딸의 손을 잡았다.

“걱정되어서 그랬지. 딸 힘든 것도 모르고 엄마가 앙리 얘기만 했구나?”

“대체 뭐가!”

미셸이 손을 뿌리쳤다.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데?”

“미셸?”

“말투 거친 게 어때서.”

그래도 좋았다.

그 누구에게도 친절하지 않았던 그가 단둘이 있을 때만은 서툰 말로 사랑을 속삭였다.

“미술 얘기만 하는 게 뭐 어때서.”

그래서 좋았다.

평소에는 망나니 같다가도 미술 이야기만 꺼내면 진지해졌다.

세상 그 무엇도 가질 수 있으면서 굳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그가 쉽게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코 그러지 않았다.

돈 많은 도련님의 나르시시즘이라며 조롱하던 평단을 끝내 본인의 전시회로 이끌기까지 수많은 좌절을 겪고 넘어섰다.

“표현 좀 못 하는 게 어때서!”

그럼에도 좋았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수없이 많은 교감을 나누었다.

마르소 저택 사용인 모두 휴가를 떠나는 매달 마지막 주 주말.

촛불 하나 켜두고 마주 앉아 손톱을 캔버스 삼는 그를 바라보길 즐겼다.

르 그랑 렉스에서2) 보는 신작 영화보다 그의 침대에서 보는 한물간 영화가 더 재밌었다.

알랭 뒤카스 오 플라자 아테네에서3) 먹는 값비싼 요리보다 빈 저택 식당에서 대충 만든 부르기뇽이4) 더 근사했다.

선물 받은 초콜릿 조각상을 아까워하니 밸런타인데이마다 새 초콜릿 조각상을 만들어 오는 그를 사랑했다.

“미셸 너…….”

셰리 가도는 딸이 왜 흥분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울먹이는 미셸을 보며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셰리가 딸을 앉혀 차분히 질문하려던 차 초인종이 울렸다.

한차례 감정을 풀어낸 미셸이 눈물을 훔치고 현관으로 나섰다.

“누구세요?”

“나야.”

앙리였다.

미셸은 그가 왜 이 시간에 찾아왔는지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너…….”

바람이라도 맞았는지.

평소 머리카락 한 올조차 삐져나오지 않도록 정돈하는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숨도 거칠었다.

“왜 여기 있어? 선보러.”

“내 자리니까.”

앙리가 미셸의 말을 막아섰다.

“네 옆이. 내 자리니까.”

에메랄드 눈이 고집스럽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올곧게 자신을 담고 있었다.

앙리 마르소가 품에서 반지함을 꺼냈다.

일렁이는 시야 너머로 은은히 빛나는 에메랄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물이 앞을 가렸으나 미셸은 그것이 앙리의 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수없이 많은 보석을 찾았지만 결국 <마르소의 보석> 전시 일정을 맞추지 못했던 그 눈이었다.

앙리가 연인의 왼손을 잡았다.

서로의 떨림을 느끼며 천천히 반지를 끼우고 받아들였다.

“하나뿐이야.”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을 찾아 헤맨 원석으로 직접 세공해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반지였다.

“잃어버리면.”

미셸이 앙리의 입을 막았다.

사랑스러운 멍청이가 지금의 분위기를 망치게 둘 순 없었다.

흘러내린 눈물보다 뜨거운 숨결을 나누기도 바빴다.

서로를 끌어안고 한참이 흐른 뒤에야 두 사람이 떨어졌다.

서로를 향한 애정 가득한 시선이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을 것처럼 그윽했다.

굳이 서툴게 표현하지 않아도.

이렇게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사랑할 수 있었다.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에 이성을 되찾은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셰리 가도가 핸드폰으로 두 사람을 촬영하고 있었다.

“뭐 해?”

미셸이 황당해하며 묻자 셰리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까워서. 하던 거 계속하렴. 아니면 잠깐 나갔다 올까?”

“무슨 소리야! 지워!”

* * *

“어쩜. 언제부터 만났니? 왜 말을 안 했어.”

앙리와 미셸이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 때문에 8년간 몰래 만나왔는지 되묻고 싶었다.

“그전에.”

미셸이 입을 뗐다.

“왜 이렇게 멀쩡해? 아니, 왜 좋아해?”

“좋아하지 않으면?”

싱글벙글 웃던 셰리가 숨을 길게 내쉬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조금 전 망나니 아들과 일 중독자 딸이 서로를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미셸이 왜 화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둘 다 누가 데려가나 싶었는데 잘 됐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셰리가 아들과 딸의 손을 잡아다가 포개었다.

“엄마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다른 누구도 걱정하지 말고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녀가 미소 지었다.

앙리의 조부 기욤 필리베르 드 마르소는 죽기 전 셰리에게 신신당부했다.

마르소 가문에 어울리는 여성을 찾아 앙리와 결혼시켜 대를 이으라는 유언이었다.

기욤 마르소에게 큰 은혜를 입은 셰리는 그것을 사명처럼 여겼다.

처음에는 여러 명문가와 혼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기욤 마르소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보다 앙리 마르소를 향한 사랑이 더욱 커지고 말았다.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키운 앙리를 친아들처럼 사랑했고, 그런 앙리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돕고 싶었다.

그렇게 덧없이 시간이 흐르고.

관절이 아파 치료받지 않고는 거동하기 힘들어지자 문득 먼 옛날의 약속이 떠올랐다.

기욤 마르소의 유언을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앙리에게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혼자 남을 앙리가 외롭지 않도록.

“엄마…….”

“셰리.”

셰리가 포개놓은 아들딸의 손을 툭툭 다독였다.

“할아버지. 그러니까 백작께서 내게 부탁하신 일이 있어.”5)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던 조부가 거론되자 앙리가 눈썹을 좁혔다.

“마르소 가문에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 앙리 너와 결혼시키라고.”

미셸이 눈매를 좁혔다.

기욤이 말한 ‘가문에 어울리는 사람’이란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우리 집은 남들이 우러러볼 정도로 대단하진 않지만, 내 딸은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 백작님이라도.”

셰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욤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으나 딸의 행복만은 누구도 건들 수 없었다.

“엄마…….”

미셸이 셰리를 끌어안았다.

그동안 엄마가 무엇을 걱정했는지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울지 마.”

앙리도 셰리를 달랬다.

“노친네가 뒤지기 전에 노망나서 한 말이야.”

“얘는. 할아버지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그딴 인간 조부로 둔 적 없어.”

앙리 마르소가 슬며시 셰리의 손을 잡았다.

“내 가족은. 어머니는 당신이야.”

* * *

앙리가 작업실로 찾아왔다.

그동안 서로 작업에 몰두하여 만나지 못했는데 뜬금없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럼 왜 왔어요?”

“그냥.”

평소와 똑같이 심술궂은 얼굴로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있지만, 발끝을 흔드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 보인다.

“좋은 일 있죠?”

턱을 왼쪽 위로 향하며 모른 척한다.

“뭔데요. 빨리 말해봐요.”

“궁금해?”

그리 궁금하진 않지만 기분을 맞춰주고자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자랑하고 싶었던 듯 곧장 입을 열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셰리에게 미셸과의 관계를 알리고 축복받았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할 땐 할 줄 알잖아!”

다가가 등을 두드렸다.

“이 자식이! 누구 몸에 손을 대?”

“잘했어요. 잘했어.”

앙리의 등을 토닥이며 초콜릿과 차를 꺼냈다.

작업 중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앙리에게 어찌 된 일인지 자세히 들어야겠다.

초콜릿을 먹은 앙리는 좀처럼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진 않았지만 물어보는 말에는 대답해 주었다.

“아니. 그럼 안 되죠.”

“뭐가 안 돼.”

“고백은 말로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말 안 해도 다 알아.”

앙리는 연애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래도 듣고 싶은 게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자, 불러줄 테니까 적어 봐요.”

“네가 뭘 안다고 난리야?”

“앙리보단 경험 많으니까 내 말 믿어요. 편지를 한 통 써서 꽃 한 송이랑 같이 주면 미셸도 좋아할걸요?”

앙리가 고개를 틀었다.

낯간지러운 일이라고 생각할 게 뻔하다.

“애초에 앙리가 미셸한테 먼저 얘기했으면 서로 힘들지도 않았어요. 고집부리지 말고 이리 와봐요.”

“…….”

“빨리.”

한 번 더 재촉하자 못 이기는 척 다가온다.

연필을 들고는 구애 편지를 쓸 때를 떠올렸다.

“로맨틱한 말을 쓰는 게 중요해요.”

앙리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곤 도화지를 내려다보았다. 미덥지 않은 모양이다.

수없이 많은 구애 편지를 썼던 솜씨를 보여줘야겠다.

“일단 이름으로 적는 건 너무 식상하잖아요. 예를 들어……. 오오, 나의 요정. 나의 별. 나의 아프로디테여. 아프로디테가 좋겠다.”

앙리의 얼굴이 더욱 찌그러졌다.

“불로뉴 숲의 산새도 그대보다 아름답게 노래하진 못하리오. 날 부르는 그대. 아!”

“집어치워.”

앙리가 도화지를 구겨버렸다.

* * *

1)Confit de Canard. 오리고기와 마늘을 활용한 프랑스 요리.

2)Le Grand Rex. 1932년에 설립된 프랑스 파리 최대 규모의 영화관.

3)Alain Ducasse au Plaza Athénée. 고급 레스토랑.

4)Bourguignon. 레드 와인을 넣은 쇠고기 스튜

5)프랑스는 1870년 공화정이 수립되며 귀족제가 폐지되었지만 1970년대만 하더라도 공식 석상에서 귀족 가문 인사를 백작, 공작 등으로 언급하는 관례가 유지됐었다.

이후 공적인 자리에서 귀족 명칭을 사용하는 일은 줄어들었으나, 현대 프랑스에서도 상류층 계급은 변형된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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