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10화
-르네상스-
3. 물과 가슴에 풀어내다(4)
쉬민케가 반타 블랙 같은 물감을 만들어주길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붓을 들고 싶다.
단 한시도 기다릴 수 없을 만큼 몸이 달아올랐다.
“후.”
해결할 문제는 두 가지.
하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빛이 투과되는 물질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당한 조명을 찾는 일이다.
말은 쉽지만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할지 막막하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사고가 막히는 듯해, 어떤 조명이 있는지 알아보고 생각도 정리할 겸 파리 시내의 큰 조명 매장을 찾았다.
“고훈 아니야?”
“맞네. 사인 해달라고 할까?”
“뭐 고민하는 거 같은데 괜찮을까?”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후로 길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내가 유명해진 건지, 아니면 미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늘어난 건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기분 좋은 일이다.
다만 한쪽에 몰려서 바라보는 건 조금 부담스럽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조명 매장 직원이 다가왔다.
“정해둔 건 없어요. 천천히 구경할게요.”
“편히 둘러보시죠.”
편하게 보라고 말했으면서 근처에 있는 걸 보면 아주 열정적인 영업사원 같다.
시선이 마주쳐서 웃어 보이니 저쪽도 활짝 웃는다. 다른 일을 볼 생각은 없는 모양.
조금 신경 쓰이지만 할 일을 하자.
우선은 밝기가 조절되는 게 좋을 텐데, 고리 모양의 등도 괜찮을 듯싶다.
흰색보다는 노란색이 괜찮을까?
아니.
어차피 그림을 보여주는 용도니 조명까지 노란색일 필요는 없다.
“작품 하시려고 찾으시는 건가요?”
한참을 둘러보고 있으니 직원이 또 말을 걸었다.
“네.”
“하하. 이번 작품도 기대할게요. 사실 작가님 팬이거든요. 쇼콜라티에 갤러리만 세 번 다녀왔어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주문 제작도 가능하니까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연락 주세요.”
“주문 제작. 그럴게요.”
기성품으로 답이 안 나오면 원하는 밝기, 모양 등을 만들어야겠지.
그때 이곳을 염두에 둬야겠다.
두 시간 정도 매장을 둘러보고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혹시 필요할까 싶어서 작은 전구만 몇 개 사서 밖으로 나섰다.
축제라도 열리는지 거리가 북적북적하다.
한동안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답답했는데 들뜬 분위기 속에서 걸으며 기분 전환이라도 해야겠다.
“…….”
바바파파 그림이 그려진 솜사탕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1)
먹고 싶은 건 아니나 머리를 잘 쓰려면 어쩔 수 없이 당분을 섭취해 줘야 한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오우. 세상에. 혹시 쇼콜라티에의?”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솜사탕 하나 주세요.”
“딸기맛과 포도맛이 있어요.”
“포도맛이요.”
기계에 설탕과 포도맛 분말을 넣고 돌리자 금세 자주색 실타래가 생겨났다.
“좀 더 크게 만들었어요. 행운이 깃들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행운을 빌게요.”
커다란 솜사탕을 챙겨 근처 벤치에 앉았다.
여름이 다가오는지 날이 제법 더워졌다.
공원 스프링클러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돗자리를 펴고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
나처럼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생쥐들만 없더라면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이리라.
“합.”
설탕과 인공 분말로 간단하게 만든 간식이긴 해도 솜사탕은 길거리 음식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지 않나 싶다.
달고 푹신푹신해서 먹는 재미도 있는 데다가 솜이나 구름처럼 생겨 보는 재미도 있으니 훌륭한 간식이다.
“…….”
문득 괜찮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꺼냈다. 조명을 켜고 솜사탕 뒤에 대자 과연 솜사탕이 멋지게 빛났다.
그림 주변을 이런 느낌으로 채우면 하늘에 떠 있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여명을 받은 구름처럼 말이다.
하지만 솜사탕을 붙였다간 녹는다든지, 단 냄새가 나는 등 생각지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가는 길에 솜을 좀 사 가야겠다.
“울랄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샤똥의 주인 피에르 말로가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콧수염이 평소보다 좀 더 둥글게 말려 있고, 공작새의 깃털을 꽂은 챙 높은 모자를 쓰고 있다.
연보라색 바탕에 노란색 굵은 사선으로 멋을 낸 정장도 아주 근사하다.
“이런 곳에서 만나네요.”
“그러게요. 피에르도 먹을래요?”
“솜사탕. 30년 만에 먹는 것 같네요.”
피에르 말로가 솜사탕을 아주 조금만 떼어갔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이 앞 공원에서 멋진 남자 콩쿠르가 열리고 있거든요. 참가했지만 떨어지고 말았어요. 의상이 문제였을까요?”
“아뇨. 아주 멋진 의상이에요.”
“그렇죠? 콧수염도 다듬었는데. 세월은 못 이기나 봐요.”
결코 50살을 바라보는 사람으로는 안 보인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사고도 건강해서 많이 쳐줘야 30대 후반 40대 초반 정도로 보인다.
아마 문제는 뾰족한 구두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 우리 태양께선 무슨 일로 방황하고 있었나요.”
“새 작품 구상하고 있었어요. 쉽지 않더라고요.”
“으흠?”
“그래도 작은 문제는 해결했어요. 솜사탕 덕분에요. 멋진 구름이 될 것 같지 않아요?”
피에르 말로가 고개를 갸웃하며 솜사탕을 살피더니 빙그레 웃었다.
“예술가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죠.”
“공통점?”
“구상 단계에서 하는 설명으로는 무엇이 대단한지 알 수 없다는 거죠.”
과연 그럴듯한 말이라 웃고 말았다.
* * *
“르네상스에 기술 지원한다던 일은 어떻게 됐어?”
“누군 한가한 줄 알아? 알아서 찾아봐.”
서류를 검토하던 앙리 마르소가 묻자 미셸 플라티니가 신경질을 냈다.
문을 세게 닫고 나가기까지 하자 아르센이 걱정스레 물었다.
“관장님과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니.”
아르센이 잠시 고민했다.
평소 합리적이고 어지간한 일에는 화내지 않는 미셸 플라티니가 저럴 이유는 모레로 다가온 앙리 마르소의 맞선뿐이었다.
“마담 셰리에게 맞선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따라가지 않으셔도 괜찮습니까?”
“뭐 하러.”
앙리 마르소가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 역시 심기가 불편해 보였기에 아르센은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앙리 마르소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앙리 마르소는 미셸이 무엇에 화를 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그녀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셰리는 맞선이라고 말했지만, 앙리도 미셸도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행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더는 숨기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 문제였다.
그동안 애써 피해 왔건만.
앙리 마르소가 숨을 길게 내쉬곤 시가를 찾았다.
두툼한 시가를 문지르며 그동안 반복해 온 고민에 다시금 빠져들었다.
“…….”
눈치 빠른 비서가 자리를 피했고 앙리 마르소는 가위로 시가 끝을 잘라냈다.
셰리 가도는 누구보다도 앙리 마르소를 잘 알았다. 갓난아기 때부터 좋은 면, 나쁜 면도 모두 봐왔고 그것이 앙리를 괴롭게 했다.
기억에도 없는 친어머니보다 사랑하는 그녀라 상처 주기도 상처받기도 싫었다.
두려웠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결혼에 반대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둘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앙리 마르소는 본인답지 않은 고민을 한다며 스스로 꾸짖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맞선 당일.
미셸은 외부 일정을 핑계로 미술관에 얼굴도 비추지 않았으며 앙리는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진 상태로 약속 장소로 나섰다.
맞선 상대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안 페이셰르 웬델.
마르소 가문 못지않은 명문가의 자제였고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를 맡을 정도로 개인 기량 또한 우수했다.
푸른 눈은 분명하여 총기가 흘러넘쳤고 입술에는 생기가 돌았다.
또한 반듯하고 안정적인 자세로 보아 그녀가 오랜 세월 규칙적으로 몸을 관리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앙리 마르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반가워요. 안이라고 해요.”
“앙리 마르소.”
안이 자리를 권하자 앙리 마르소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녀를 응시했다.
안은 여유로웠다.
시선을 마주하고도 흔들리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셰리 가도의 부탁으로 적당히 식사만 하고 돌아올 생각이었으나 생각이 달라졌다.
“사과하지.”
안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평소 앙리 마르소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접했던지라 그에게서 사과를 받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그녀는 의아함을 감추고 평온히 물었다.
“무엇을요?”
“헛걸음하게 해서.”
앙리 마르소가 안을 응시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오늘 일은 추후에 정식으로 사과하지. 아르센. 돌아간다.”
앙리 마르소가 뒤돌자 안이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추궁이라면 나중에 듣지.”
“당신이 무례한 사람이란 건 잘 알아요. 그만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다만 날 무시하는 태도는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렸다.
“알아.”
20세기 초, 아니, 부모가 살아 있었더라면 가문의 입장으로 안 페이셰르 웬델과 혼담이 오갔을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 그럴 정도로 안은 완벽한 상대였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도 미셸을 향한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실해질 뿐이었다.
앙리 마르소는 오늘이야말로 고이 간직해 둔 반지를 꺼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 * *
1)1970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동화책. 이후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프랑스 국민 캐릭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