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9화
-르네상스-
3. 물과 가슴에 풀어내다(3)
2층 다용도실을 청소한 뒤에는 빛을 완전히 차단해 달라고 주문했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여 사람을 불렀더니 시간이 꽤 걸릴 듯해 느긋한 마음으로 다른 작업을 진행했다.
“음.”
캔버스 뒤에 조명을 달면 조금 나아질까 싶었으나 어림도 없었다.
캔버스가 가로막는 탓에 투과되는 빛이 상당히 주는데, 거기에 물감을 두껍게 바르니 빛이 제대로 투과될 리 없었다.
캔버스보다 빛이 잘 통과하는 곳에 평소보다 물감을 얇게 바르면 나아질까.
작업실에 있는 종이란 종이는 몽땅 꺼내 대충 물감을 칠하고 전구 앞에 두었지만 썩 마음에 드는 방법을 찾진 못했다.
다음 날에는 마은찬이 영국 런던으로 가서 배웅을 나섰다.
혼자 보내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19살 때부터 타국에서 홀로 생활한 사람이니 분명 잘해내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힘내요.”
“응! 나 열심히 하는 건 잘하는 편이니까. 선생님, 대표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항상 건강부터 생각하게.”
“넵!”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감사합니다.”
잠깐 떨어지게 되었지만 마은찬은 우리 쇼콜라티에의 소중한 동료다.
방태호는 그걸 잊지 말라는 뜻으로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덧붙였다.
성귤 과장이 운전하는 차가 공항으로 출발하고 할아버지, 방태호와 함께 작업실을 찾았다.
“아이고. 흉해라. 귀신 나오겠다.”
한때 귀신이긴 했다.
할아버지가 검은색과 빨간색으로 가득한 작업실을 둘러보며 고개를 저으셨다.
“편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괜찮아요. 덕분에 안 해봤을 고민도 해보고 좋아요.”
할아버지 말씀대로 반타 블랙을 활용할 수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깊이 고민하진 않았을 거다.
이런 경험이 쌓여서 앞으로 더 큰 힘이 되어줄 거다.
“실은 물감 제조사들에 연락을 넣어봤는데 경제성 때문에 개발하는 곳이 없더군요.”
“그렇겠지.”
특별한 일이 없고서야 굳이 반타 블랙 같은 안료를 찾을 이유가 없다.
시중에 나와 있는 검은색 물감으로도 충분하고, 또 새 물감을 만들고 판매하는 공정과 유통에는 큰돈이 들어가니 말이다.
“그중에 쉬민케에서 관심을 보이더라고. 훈이 네가 원하면 만들어 보겠다고.”
쉬민케라면 이전에 홍보 활동 계약을 했고 지금도 즐겨 쓰는 브랜드다.
“네?”
“생각보다 수요가 있던 모양이야. 다른 예술가도 알아본 적 있는데, 그보단 산업 분야에.”
고개를 기울였다.
“태양열 발전기 집열기에도 쓰이고. 인공위성에도 바른대. 검게 칠해야 한다고 하더라고.”1)
“인공위성?”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어. 아무튼 작게나마 시장이 존재하긴 하는데, 그것만 믿고 진입하긴 망설였던 모양이야.”
“다른 제품에 비할 바가 아니니 말일세. 가격이라든가.”
“그렇습니다.”
방태호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근데 훈이 네가 그걸로 작품을 만들면 화제가 될 거라고 판단했나 봐.”
“그건 그래요.”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날 빤히 본다.
그전에는 전생의 삶으로 자신감을 많이 잃었지만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후 마침내 나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게 되었다.
어깨를 으쓱이자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셨다.
“핰하하핳! 그래. 우리 훈이가 하는 일인데 그 정도는 되지!”
“사실 그렇죠. 원로 예술가 아니쉬 푸어의 욕심 때문에 이 시대 최고의 천재가 고생한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니까요. 쉬민케는 그걸 해결해 주었다는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 수 있고요.”
“그럼 언제 완성할 수 있대요?”
“만드는 거야 금방 만들 수 있다더라. 대량 생산이라든가 상품화가 문제지.”
역시 세계적인 물감 제조사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만들 수 있으니 그런 제안도 했을 거다.
“한 1년?”
“…….”
그렇게나 못 기다린다.
* * *
“리치 프로젝트 착수했다는 보고입니다.”
아르센이 앙리 마르소에게 새 안료 개발이 시작되었다고 전했다.
프랑스 최고 명문대 에콜 폴리테크니크 부속 물리 연구소는 반타 블랙보다 검은 물질을 한 달 안에 만들라는 요청을 불가능하다며 일축했으나.
요청자가 매해 400만 유로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앙리 마르소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군말 없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수고했어.”
앙리 마르소가 캔버스를 응시한 채 답했다.
그 역시 고훈과 마찬가지로 금환일식을 표현해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르센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선 뒤에도 앙리 마르소는 한동안 캔버스 앞에 서 있었다.
검은 달이 감히 범하지 못한 찬란함은 앙리 마르소가 바라는 이상이었다.
“앙리?”
고민과 함께 밤이 깊어지고 유모 셰리 가도가 문을 두드렸다.
“잠깐 괜찮니?”
시간을 확인한 앙리가 놀라 물었다.
“집에 안 갔어?”
“이리 앉아 보렴.”
셰리 가도가 가지고 온 밀크티를 따르자 앙리가 눈썹을 좁혔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오랜만에 차 한잔할까 싶었지.”
“모른 척하지 마. 할 말 있을 때마다 가져오잖아.”
앙리가 밀크티를 가리키자 셰리가 작게 웃었다.
“이젠 우리 앙리 못 속이겠네.”
“뭐야. 빨리 말해.”
셰리 가도가 슬며시 앙리와 손을 포갰다.
유모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기에 앙리가 순간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깊어진 주름과 더불어 올해 66세를 맞이한 유모의 건강에 이상이라도 있는지 걱정되었다.
“어디 아파? 어?”
“허리가 좀 안 좋긴 하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쉬라고 했잖아! 어떻게 아파. 어? 많이 아파? 아르센! 아르센!”
“얘, 이 밤중에 누굴 부르니. 나이 먹으면 다 조금씩 안 좋아지는 거야. 괜찮아.”
셰리가 앙리를 달랬다.
“그보다.”
“어.”
“지금 혹시 만나는 사람 있니?”
“컵.”
밀크티를 마시던 앙리 마르소가 다급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렇잖니. 네 나이가 벌써 서른여덟이야. 요새는 결혼 안 하고 사는 사람도 많다지만 그래도 짝이 필요하지 않겠어?”
앙리 마르소의 눈이 흔들렸다.
미셸과 벌써 8년째 교재 중이라는 사실을 숨긴 탓이었다.
“있어?”
앙리가 시선을 피하자 셰리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혼담 이야기를 듣기 싫어한다고 판단했다.
“예전이라면 나도 이런 말 안 했을 거야.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는 널 누가 데려갈까 싶었으니까.”
“흥.”
“그런데 요새 다른 사람 생각해 줄 줄도 알고. 훈이랑 아이들하고 놀아주는 거 보니까 이젠 정말 장가 보내도 되겠단 생각이 들더라.”
“울긴 왜 울어? 이게 울 일이야?”
“그러니까. 앙리. 선 한번 보지 않을래?”
앙리의 얼굴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장 마르탱 웬델 씨 딸이 그렇게 사람이 좋다더구나. 나이도 서른넷이라 너랑 비슷하고 직업도 비비안 이스트우드 수석 디자이너래.”
“관심 없어.”
“당장 결혼하라는 게 아니야. 그냥 만나서 식사 한번 하는 거야.”
“싫다니까.”
셰리 가도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왜 또 울어!”
“내가.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해줬어야 했는데. 그게. 그게 너무 죄스럽구나. 흐흡흑흫.”
“울지 마!”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죽어서 네 할아버지랑 부모님을 무슨 얼굴로 보겠니. 미안해. 내가 미안해.”
셰리가 앙리의 팔을 붙잡고 오열했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진실로 그를 아들처럼 사랑했다.
처음은 앙리 마르소의 조부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이었으나, 태어날 때부터 38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하며 가족처럼 아끼게 되었다.
그런 아들을 위해서라면 눈물 연기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앙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있자 셰리가 그의 얼굴을 감쌌다.
“다른 거 바라지 않을게. 마지막 부탁이야. 식사하고 재밌는 공연도 보고 그러고 돌아오렴. 응?”
* * *
“선을 보라고 했다고?”
미셸 플라티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사실 너무 늦었잖니. 그쪽에서 먼저 이야기하길래 그러라고 했지.”
미셸이 헛웃음 지었다.
“하. 아하하. 그래서? 뭐래?”
“어찌나 싫다고 하는지. 난리도 아니었어.”
사랑스러운 멍청이를 믿고 있던 미셸은 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엄마 연기가 좀 되잖니. 젊었을 땐 오디션 보러 다녔는데 옆집 여자란 영화 아니? 엄마가 주연 오디션 최종심에서 아쉽게 떨어졌거든.”2)
“그 얘기는 백 번도 넘게 들었어. 앙리가 진짜 나간대?”
“그래.”
미셸이 입을 벌리자 셰리가 딸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너도 일만 하지 말고 주변 좀 돌아봐. 너 좋다고 따라다니던 애들 다 어디 갔니?”
앙리 마르소가 다 쫓아냈다.
“어. 언제? 언제 하는데?”
“멀리 잡으면 마음 바뀔까 봐 내일로 잡고 싶었는데.”
“내일?”
“아이고 놀라라. 얘가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내일로 하고 싶었는데 둘 다 바쁘잖니. 다음 주에 만나라고 했어. 멋진 곳에서 식사도 하고 공연도 보라고.”
“식사? 공연?”
8년째 만나면서 단둘이서는 한 번도 못 해본 일이었다.
“아이고 피곤하다. 엄마 잘 테니까 내일 얘기하자.”
자야 할 시간을 한참 넘긴 셰리 가도가 피로를 호소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혼자 남은 미셸은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엄마 얘기니까 대충 맞춰준 거겠지?’
‘그럼 대충 차나 마시면 되지 뭔 밥이고 공연이야?’
‘그보다. 왜 말을 안 해? 상황이 그 지경이 됐으면 사실대로 말해야지. 잘난 척은 다 하면서. 어?’
‘그렇게 하기로 해놓고 연락도 없어? 네가 진짜 미쳤구나?’
“하.”
미셸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생각이 자꾸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좋을 듯했다.
‘그래. 자기도 당황했으니까 그렇겠지. 시간도 늦었고. 내일 되면 얘기하겠지.’
주먹을 쥐었다 펴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길 노력했으나 시선은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1분, 2분, 10분이 흘렀을 때 미셸의 입에서 까득 이 가는 소리가 났다.
미셸이 핸드폰을 집어 앙리 마르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안 자] 오후 11:49
아직 잠들지 않았으니 당장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하라는 뜻이었다.
누구와 만나는지, 만나서 어떻게 할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모두 들어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오후 11:50 [난 잔다]
미셸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 * *
1)인공위성은 열 제어와 열 평형을 위해 열 교환이 잘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 복사에너지의 흡수율과 방사율을 확보해야 한다.
때문에 위성 내부의 방사율을 높이기 위해 검은색으로 칠해야 한다.
또한 반타 블랙의 본래 용도처럼 첩보용 인공위성에 칠하여 적의 시야에 띄지 않게 겉에 칠하기도 한다.
번외로 스타링크 프로젝트 등 인공위성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천문학자들이 우주를 관찰할 때 고충을 겪기도 한다.
천문학자들의 반발로 인공위성이 빛을 반사하지 않도록 검게 칠하자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세계관에서는 이러한 목소리가 받아들여져 인공위성 겉을 검게 칠하는 법이 만들어졌다는 설정이다.
2)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1981년 영화 <이웃집 여인(La Femme D'A Cote, The Woman Next Do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