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34화 (33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8화

-르네상스-

3. 물과 가슴에 풀어내다(2)

“헥.”

마카롱 상자를 치우자마자 블랑쉬와 비다가 들어왔다.

마은찬이 기겁했던 것처럼 작업실 내부를 본 비다가 기겁했고, 블랑쉬도 움찔하며 놀랐다.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죄책감 때문인지 나도 마은찬도 가슴이 철렁했다.

“이게 다 뭐야? 세상에.”

비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런 일이 있었어.”

미안한 마음에 자리 잡고 앉은 블랑쉬와 비다에게 냉장고에 있는 초콜릿과 주스를 꺼내 주었다.

“아르바이트한다며?”

“응.”

“안 힘들어?”

늦은 시간에 술 취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재밌어. 공부도 되고.”

“공부?”

“완전 대박이야.”

비다가 끼어들어 대신 설명했다.

“사장님이 다른 일 하지 말고 손님들한테 그림만 그려달라고 했대.”

와인 바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라니 들어본 적 없다.

“그림?”

마은찬도 궁금한지 설명을 재촉했다.

“말도 마세요. 와인 옮기다가 다 깨뜨렸대요. 2,000유로 어치나.”

어이가 없어 고개를 돌리니 블랑쉬가 당당하게 답했다.

“미끄러웠어.”

“그래서 뭐 옮기는 건 안 되겠다 싶어서 손님 상대하도록 했대요. 손님들이 비싼 와인 주문할 수 있게.”

“그런데?”

“매장에서 제일 비싼 와인만 추천해서 손님들이 바가지 씌우는 거 아니냐고 화내면서 돌아갔다는 거예요.”

한 번 더 고개를 돌리니 블랑쉬는 여전히 당당했다.

“난 시키는 대로 했어.”

사람에 따라 적당한 와인을 추천해야 했을 텐데, 사람 상대하는 데 서툰 데다 처음 하는 일이니 잘할 리 없다.

“술값에 깨뜨린 와인까지 손해가 크니까 사장님도 기다려 줄 테니 천천히 갚으라고 했죠.”

“그런데 왜 계속.”

“거기가 편해.”

“…….”

“이상한 사람도 많고.”

적어도 와인 바 손님들 눈에는 이상한 종업원이 있는 장소이긴 할 거다.

“사장님도 포기하셨죠. 그럼 일하는 대신 매장에 인테리어로 쓸 그림을 그려줄 수 있냐고 물었는데, 마침 바에 있던 손님이 블랑쉬 그림을 보고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했어요.”

“티르 부숑의 화가가 탄생한 날이었어.”

블랑쉬가 콧김을 내뿜으며 자신감을 보였다.

“티르 부숑?”

와인 따개의 화가는 또 무슨 말이지.

“와인 바 이름. 블랑쉬 그림 완전 인기 있어서 지금은 예약도 받고 있어. 덕분에 장사도 잘 되니까 와인 바 사장님으로선 대박이지!”

“돈도 받아.”

못 낸 술값과 깨뜨린 와인 때문에 착취당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더니 도리어 일이 잘 풀리는 것 같다.

“블랑쉬 파브르 완전 부활.”

게다가 본인도 만족하는 것 같으니 좋은 게 좋은 거다.

“비다는? 요즘 어떻게 지내?”

“엄청 바빠. 마르소 작가님이랑 훈이 네 덕분에.”

마르소 미술관에 도슨트 예약이 꽉 차 있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바쁘면서 왜 맨날 와?”

블랑쉬가 물었다.

“걱정되잖아. 술 취한 사람이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해.”

“정말로 코를 삐뚤어지게 해줄 거야. 앙리 선생님이 화가라면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했어.”

블랑쉬라면 정말로 주정뱅이의 코를 뭉갤 것 같아서 걱정된다.

비다가 급히 화제를 돌렸다.

“형은요? 영국 가신다면서요?”

“응. 곧. 내년까지는 바쁠 것 같아.”

“정말 잘 됐어요. 힘내세요.”

마은찬을 응원하는 비다 라바니는 웃고 있는데 무엇인가 마음에 걸린다.

본인이 만족한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하나 정말 더는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은 걸까.

“근데 입에 묻은 건 뭐예요?”

비다의 질문에 마은찬이 화들짝 입을 가렸다.

잠시 후.

“이렇게나?”

모임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 비다와 블랑쉬에게 마카롱을 세 상자씩 사 주었다.

벌써 한 입 먹은 블랑쉬는 만족스럽게 마카롱을 음미하였고 비다는 당황해했다.

“많이 먹어.”

“이 많은 걸 어떻게 먹어요. 같이 먹어요.”

“아, 아니야. 난 괜찮아. 그럼 난 먼저 가볼게. 다음에 봐.”

마은찬이 이번에는 이성을 지켜냈다. 곁에 있으면 더는 참을 수 없는지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도 갈게.”

“일하러 가?”

블랑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작업실로 돌아갈 생각이라 도중까지 함께 걷다가 쇼콜라티에 갤러리 정문에서 헤어졌다.

비다가 와인 바 티르 부숑을 응시한다.

“걱정 돼?”

“아, 응. 조금. 그래도 기운 차린 것 같아서 다행이야.”

씩 웃는다.

6년 전이었나.

처음 만났을 때의 비다 라바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졌다.

한여름에도 때 묻은 스웨터를 입고 어떤 행동이든 지나치게 조심하며 사람을 무서워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참으로 다행이다.

도슨트로 활동하니만큼 수입이 적고 불안정한 편이긴 해도 적어도 예전처럼 굶주리진 않아도 된다.

다만 혹시 예전 일을 신경 쓰는 건 아닌지 하고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괜찮으면 좀 더 있을래?”

“응? 그럴까?”

작업실로 들어섰다.

“여기 올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색 하나에도 이렇게 신중하니까.”

“그러고 싶어서 하는 거야.”

“그런 점이 멋져.”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참. WAPA에서 구인 공고 냈더라고. 도슨트도 뽑는대.”

세계 예술 진흥 협회에서 도슨트를 모집한다면 아마 내년으로 예정된 행사 때문일 거다.

“르네상스 때문에?”

“응. 1년짜리 계약직으로. 돈도 다른 데 보다 많이 주더라.”

“참가할 생각은 없어?”

“당연히 있지. 매번 새 일 찾는 게 얼마나 힘든데. 1년 동안 계속할 수 있으니까 완전 최고지.”

“아니. 작가로.”

비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하. 무슨 말이야. 내가 어떻게 그런 델 나가.”

“자격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못 할 거 없잖아.”

찻잎을 꺼내 잔에 덜었다.

“그렇긴 하지만 난…….”

“전처럼 힘들진 않잖아.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어.”

“내가 나가봤자 망신만 당할 거야.”

커피포트가 울렸다.

찻잎에 물을 부었다.

“비웃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잘못된 거야. 수만 명이 도전할 텐데 그중에 입상하는 사람은 손에 꼽잖아. 나머지 전부를 비웃는 게 정상인가?”

“…….”

“다른 걸 묻는 게 아니야. 가르치거나 다그치는 건 더더욱 아니고. 그냥, 이제 그림은 그리고 싶지 않은지 궁금했어.”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을 뿐이다.

* * *

3주간 여러 물감을 찾아봤지만 아무래도 반타 블랙만큼 검은 물질을 찾는 건 힘들 듯싶다.

할 만큼 했으니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차선책은 대조 효과.

반타 블랙만큼 어두울 수 없다면 아주 밝은 색을 곁에 두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눈을 감고 그리스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눈과 피부 가슴까지 모든 감각을 빼앗겼던 그때의 감정을 표현해내고 싶다.

깊이감.

그래.

금빛 반지를 연상케 한 한 지점으로 빨려들 것만 같은 깊이감을 담고 싶다.

심연 속에서 찬란한 빛을 마주하여 벅차오르는 감동.

눈을 뗄 수 없는 그 순간.

오늘도 고민이 길어질 것 같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책상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켜졌다. 할아버지가 전화를 거셨는데 벌써 밤 9시다.

“네, 할아버지.”

-이 녀석아, 밥은 먹고 해?

“아뇨. 지금 돌아갈게요.”

-그래. 조심해서 오고.

작업에 집중해서 밤을 새우거나 끼니를 거르는 일은 어렸을 적부터 반복된 일이다.

너무 걱정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도 잘 안 된다.

통화를 끊고 대강 정리할 생각으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검은색으로 가득한 작업실 내부가 마치 금환일식을 마주했을 때의 주변처럼 느껴졌다.

분명 어두운 정도는 다를 테지만 심연 한가운데에 놓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도, 앙리, 방태호, 마은찬, 비다, 블랑쉬 모두 작업실에 들어올 때마다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그래.”

가장 어두운 물감을 사용할 수 없으면 빛을 차단하면 된다.

모든 색은 빛의 반사로 시작되니 빛이 없으면 그것이 곧 가장 검은색이다.

다만 문제는 그런 상태에서는 그림을 볼 수 없다는 거다.

어쩐다.

다시 고민을 하다 보니 핸드폰이 또 울렸다. 액정에 10시 20분이라고 적혀 있다.

아차 싶다.

* * *

“빈방?”

“네. 문이랑 마주한 벽이 멀면 좋아요. 좌우로는 좁고.”

갤러리에 비어 있는 방이 있는지 묻자 방태호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비품 두는 곳이 그런 구조인데. 한번 볼래? 물건이야 치우면 되고.”

“네.”

2층으로 올라가 복도 끝 방을 찾았다.

문을 여니 과연 내가 바라는 공간이었다.

자세한 크기는 설계도를 보면 알겠지만 눈으로도 대강 짐작해 볼 수 있다.

좀 더 확실히 알기 위해 가운데에서 팔을 양쪽으로 벌리니 10㎝ 정도가 남는다. 가로로는 약 2m.

문에서 맞은편 벽까지는 12~13걸음이니 대충 9~10m 정도 될 것 같다.

“마음에 들어?”

“네. 여기 물건 치워도 돼요?”

“그럼. 여기 주인이 치우라는데. 모레까지 정리해 두라고 할게.”

남은 문제는 시야.

반타 블랙을 활용하는 대신 빛을 차단해 버리면 된다지만 그렇게 하면 열심히 그린 금환일식을 누구도 볼 수 없으리라.

최소한의 빛이 있어야 하는데, 천장 조명을 켜두면 어둠 속에서 맞이한 금환(金丸: 금으로 만든 고리)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 방으로 들어올 때는 어두웠다가 정면에서 빛이 들어와야 할 텐데.

또 고민이 깊어진다.

조명을 그림 뒤에 배치하면 조금 나으려나.

일단 해보는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또 어떤 작품을 할지 모르겠네. 기대되는데?”

방태호가 싱글싱글 웃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이것저것 해보려고요.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네가 한 작품에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건 많이 못 봤으니까.”

비품실에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은찬이 가면 심심해지겠네.”

“그럴 거예요.”

몇 년간 붙어 다녔으니 빈자리가 느껴질 거다.

“그래도 좋은 기회 얻었으니 응원해 줘야죠.”

“고생깨나 할 거야. 화이트채플 프리미어 전시에 르네상스까지 하려면. 영국 생활에 잘 적응할지도 걱정되네.”

“어디서든 잘 어울리잖아요.”

붙임성이 참 좋다.

“하긴. 참, 아침에 선생님께서 걱정하시더라. 요새 매일 늦게 돌아온다고.”

“그건 할 말이 없어요. 신경 써야죠.”

할아버지가 걱정하시는 일 중 가장 큰 건 아마 치안일 거다.

건강도 건강이나 동양인에 대한 증오 범죄가 계속 늘어나 밤 늦게 돌아다니는 걸 걱정하시는 거다.

방태호는 완전 자율 주행 자동차를 권했지만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사고 때문에 자율 주행을 믿지 못해서 걷거나 대중교통을 활용하고 있다.

“늦더라도 연락해 줘. 아니면 이 기회에 아예 매니저를 붙이자.”

“매니저요?”

“응. 운전 정도는 할 수 있게.”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 시킬 순 없잖아요.”

귀가가 늦어지는데 그 시간까지 사람을 곁에 둘 순 없는 노릇이다.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같이 다니고 회사 직원도 있다지만 평소에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잖아. 비서 한 사람 뽑자.”

“제가 무슨 비서예요.”

“네가 어때서? 이 쇼콜라티에가 네 덕에 돌아가는데.”

“……음.”

“내가 되도록 같이 있겠지만 그럴 수 없을 때도 있으니까.”

하긴.

방태호도 사장으로 있으면서 쇼콜라티에의 여러 일을 책임지고 있다.

몸이 두 개도 아니고 그동안 부담이 되었을 거다.

“그럼 그렇게 해요. 급하지는 않으니까 천천히 뽑아요. 믿을 만한 사람으로.”

“그래. 잘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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