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33화 (33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7화

-르네상스-

3. 물과 가슴에 풀어내다(1)

다음 날.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앙리가 고개를 기울이곤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안 보게 생겼어?”

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궁금해할 만하다.

반타 블랙 이외에 마음에 드는 색을 찾고자 구할 수 있는 검은색이란 검은색은 몽땅 모아두었다.

유화 물감뿐만 아니라 되도록 여러 안료를 구했는데.

아이보리 블랙, 램프 블랙, 마스 블랙, 바인 블랙 같은 기성품은 물론.

소귀나무, 옻나무, 떡갈나무, 고로쇠나무, 도토리, 밤 같은 천연 염료나 안료까지 닥치는 대로 찾았다.

덕분에 작업실이 온통 검은색과 빨간색투성이다.

발색을 확인하려고 캔버스를 있는 대로 깔아둬 칠해 두었는데, 그 과정에서 바닥이고 벽이고 내 몸까지 온통 검고 붉게 물들고 말았다.

작업이 끝나면 청소하는 데 꽤 힘들 것 같다.

“상담받아.”

“무슨 상담이요?”

“네 꼴을 봐. 보름째 이러고 있잖아.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어?”

“이미 받았다고 몇 번을 말해요. 난 정상이에요.”

어렸을 때 할아버지랑 함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제대로 진단받은 적 있다.

“문제없는 사람도 이딴 데 있으면 정신 나가. 당장 치워.”

최근 들어 기분이 좀 안 좋아지긴 했다.

할아버지와 마은찬도 왠지 작업실에 들어오길 꺼리는 것 같았고.

앙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문제야.”

“반타 블랙 같은 검은색을 찾고 있어요.”

“반타 블랙? 아니쉬 푸어?”

“알아요?”

“기억하기 쉽지. 머리도 가슴도 빈곤한 놈이잖아.”

아니쉬 푸어의 성을 빈곤하다는 뜻의 영어로 기억한 모양이다.

“아무튼 금환일식 그리려는 데 어울리는 색을 찾고 있는 거예요. 방해하지 마요.”

“더 있으라고 해도 거절이야.”

앙리가 밖으로 나가고 얼마 안 되어 마은찬이 찾아왔다.

“힉.”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서 주춤한다. 그렇게까지 이상한가 싶다.

“여기 좀 무서워졌어.”

“어서 와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블랑쉬, 비다와 함께 한 주간의 작업 내용을 공유하는 날이다.

“아, 같이 계셨네요.”

마은찬 뒤에서 성귤 과장이 얼굴을 보였다.

본래 WH 배움 미술관에서 근무하던 사람인데, 2년 전 쇼콜라티에 갤러리가 완공되면서 방태호가 섭외한 직원이다.

쇼콜라티에 소속 작가 관리과를 맡겼는데 일을 야무지게 처리해서 신용하고 있다.

“기획과 아몽 씨 부인 분이 디저트 가게를 열었대요. 드셔 보세요.”

“마카롱이네요?”

마은찬이 활짝 웃으며 마카롱 상자를 받아들었다.

“관리과에선 반응이 좋던데. 아몽 씨가 피드백 부탁드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건 얼마든지 해드려야죠.”

발을 동동 구르는 걸 보면 몹시 흥분한 듯하다.

최근 다이어트를 하느라 디저트를 오랜만에 접하기 때문일 거다.

“혹시 블랑쉬 어디 있는지 아세요? 작업실에는 없던데.”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럼 이것도 드리겠습니다. 그럼.”

성귤 과장이 마카롱 상자를 하나 더 주고는 자리를 피해주었다.

고민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나도 단 게 끌려 서둘러 상자를 열었다.

“하아아아.”

마은찬이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감탄했다.

라즈베리를 감싼 분홍색 머랭 위에 식용 장미 꽃잎 한 장을 올려놓은 모습이 참 귀엽다.

한 상자에 여섯 개가 들어 있으니 마은찬, 블랑쉬, 비다와 나누면 세 개씩 먹을 수 있겠다.

“너 먹어.”

마은찬이 눈을 질끈 감고 상자를 밀었다.

“안 먹어요?”

“응. 살 빼야지…….”

똥 마려운 개도 이보다 불쌍해 보이진 않을 거다.

“조금은 먹어도 괜찮을 거예요. 앙리가 그랬는데 너무 안 먹으면 우리 몸이 칼로리 소비를 줄인대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저칼로리 식단을 계속하면 그에 적응한단 말이에요. 핸드폰 저전력 모드처럼.”

“그런데?”

“그러니까 가끔 탄수화물이나 당을 충분히 먹어서 몸을 속여야 한대요. 그래서 치팅 데이라고 하잖아요.”

말 그대로 몸을 속이는 날이라고 한다.

“아.”

마은찬이 얼굴을 폈다.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나한테 주는 상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실제로도 필요한 일이라고 했어요.”

마은찬이 라즈베리 마카롱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거짓말 아니지?”

“그럼요.”

“나, 나 그런 말 믿고 싶은 편이라구.”

귀가 얇은 편도 아니고 믿고 싶다고 말하는 거 보니 어지간히 참아온 듯하다.

그리스에서 돌아온 이후 얼굴색이 좋아진 걸 보면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

“정말이에요.”

“히힣. 자, 먼저 먹어.”

마카롱을 하나 집어 한입에 넣었다. 마은찬도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었는데 역시 먹을 줄 안다.

마카롱은 입 한가득 물고 먹어야 맛있다.

싱싱한 산딸기의 청초한 향과 다디단 머랭의 퇴폐스러움이 어찌 이다지도 잘 어울린단 말인가.

나도 검은색과 금색을 이렇게 멋스럽게 대조하고 또한 조화롭게 활용하고 싶다.

마카롱 세 개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말았다.

“맛있었지.”

“맛있었어요.”

“이건 성공할 거야.”

동의한다.

자동화가 많이 이뤄진 세상이라, 마카롱 가격도 매우 저렴해졌지만, 이렇게 장인급 실력을 보여주는 이들은 여전히 수요가 있다.

수제 마카롱이라 비싸긴 해도 찾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다.

마은찬이 블랑쉬와 비다 몫의 마카롱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하, 하나만 더 먹을까?”

“안 돼요.”

“맞아. 안 돼.”

잠시 서로 말을 잊고 새 마카롱 상자를 바라보았다.

아직 여운이 남은 입안을 혀로 훑으며 번뇌에 빠지고 말았다.

“그, 블랑쉬랑 비다는 단 거 싫어하지?”

“아뇨. 엄청 좋아해요.”

“좋아하는구나.”

“……보기만 할래요?”

“그럴까?”

강아지에게 산책하러 나가자고 해도 이보다 좋아하진 않을 거다.

마은찬이 포장을 뜯었다.

“블루베리잖아!”

라즈베리가 그렇게 맛있었는데, 블루베리는 또 어떤 맛일까.

마은찬이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 하나만 먹으면 피드백을 제대로 못 하잖아. 개업하셨는데 성의 있게 해야 하지 않아?”

“그건 그래요. 아니, 그래도.”

“주력 상품이란 것도 있잖아? 뭐가 더 인기 있는지 파악해야 마케팅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고 들었어!”

“확실히.”

미끼 상품이라든가, 할인 적용률이라든가.

분명 인기 있는 상품을 파악하는 건 판매의 기본이다.

“그럼. 딱 하나씩만 먹어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손을 내밀고 말았다.

“하으아앙.”

타락한 마은찬이 달뜬 마음을 그대로 표현했다.

그러나 나 역시 양심을 저버렸으니 이를 어찌할까.

마은찬이 또 마카롱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이젠 정말 안 돼요. 두 개씩은 줘야죠.”

“하지만 이 빈자리는 어떻게 설명하게?”

“네?”

“누가 봐도 여섯 개 들어 있을 자리잖아.”

“화, 확실히.”

이대로 블랑쉬와 비다에게 상자를 건네주면 먹어버린 마카롱의 행방을 궁금해할 것이다.

이토록 맛있으니까.

“게다가 오해할 수도 있어.”

“무슨 오해요?”

“처음부터 여섯 개만 받았다고 생각해서 하나씩만 먹고 나머지 두 개를 우리한테 양보하는 거야.”

“그럼 안 되죠.”

“안 되는데 그 상황에서 참을 수 있겠어? 그 죄책감을 견딜 수 있겠어? 분명 후회하면서 결국 먹을 거라구!”

마은찬이 마카롱을 하나 더 집었다.

“먹자. 먹고 생각하는 거야.”

“정신 차려요!”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2주 동안 다이어트를 하고 마카롱을 접한 마은찬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나조차 속아 넘어갈 정도로 달콤하게 유혹하다니, 악마에게 홀린 것이 분명하다.

“나도. 나도 내가 제정신이 아닌 거 알아. 먹는 걸로 이러는 내가 싫어. 하지만, 하지만 이미 늦었어.”

“아니에요. 아직 안 늦었어요. 지금이라도 블랑쉬하고 비다한테 사과하고.”

“그래!”

마은찬이 소리쳤다.

“먹고. 먹고 새로 사 오는 거야! 아몽 씨한테도 그게 좋지 않겠어? 매출도 늘고, 우리도 참지 않아도 되고, 비다랑 블랑쉬도 이 맛있는 걸 다 먹을 수 있고!”

천재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묘안이다.

더는 참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손을 뻗고 말았다.

* * *

앙리 마르소가 나서자 비서 아르센이 곧장 그를 영접했다.

“알아볼 일이 있어.”

“말씀하시죠.”

“아니쉬 푸어라는 놈이 반타 블랙에 독점을 걸어두었어.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해 봐.”

“몇몇 예술가가 접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앙리 마르소를 보필하며 미술계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파악하던 아르센이 모르는 일은 없었다.

“수감되기 전에 데미안 카터도 요청했는데 거절당했습니다. 아마 돈으로 해결하긴 힘들 듯합니다.”

데미안 카터라면 적지 않은 금액을 제시했을 테고 그럼에도 거절당했다면 쉽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쉬 푸어 또한 성공한 예술가인지라 더더욱 힘들 것 같았다.

“법적인 문제는 없어?”

“당시에 숌즈하고 이야기 나눴지만 여러 국가에서 특허 등록을 해두었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자식.”

“반타 블랙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건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

“작가님이 투자하고 계신 태양광 발전 업체에서 반타 블랙의 98%에 효과를 가진 물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빛 흡수율이 좋아 집열기에 사용되고 있죠.”

“……같은 건 아니라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잠시 고민했다.

고훈에게 반타 블랙을 구해서 주고 싶은 그가 대체품에 만족할 리 없었다.

“예술적 목적 외에는 독점이 걸려 있지 않을 텐데. 반타 블랙을 두고 굳이 왜 대체품을 쓰고 있는 거야?”

“경제성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반타 블랙은 지나치게 비싸니 저렴한 대체품이 낫다고 판단했죠.”

앙리가 눈을 감고 다시 고민하다가 결심했다.

“만들어.”

“예?”

“만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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