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6화
-르네상스-
2. 금환일식(3)
와인 가격을 확인하자 연거푸 석 잔을 마시던 블랑쉬가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급히 마신 탓에 취기가 뒤늦게 올라왔고, 술조차 마음 놓고 못 마시는 상황마저 더해지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심해.”
비다 라바니는 놀랐다.
굳은 심지를 지녔던 친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같은 반 학생들이 그녀를 무시하고 조롱해도 당당함과 기개를 잃지 않았으며, 성과가 나지 않아도 꿋꿋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외모를 높이 산 몇몇 업체가 손을 내밀 때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었다.
비다 라바니는 그런 그녀를 내심 선망했다.
“블랑쉬…….”
비다 라바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가 얼마나 대단한데. 아르누보 공모전에서도 입상했었잖아. 기사도 나고 TV에도 나오고.”
첫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10위를 하며 이목을 집중시켰으나 벌써 4~5년 전 일이었다.
그때 일이 아직도 대표 경력이라는 사실이 블랑쉬를 괴롭혔다.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반쯤 남은 잔을 들었다. 단숨에 넘길 때는 몰랐던 와인 향과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너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는 거 내가 알아. 재능도 있잖아. 누가 뭐라 해도 쇼콜라티에 소속 작가고. 잘 될 거야.”
침묵이 이어졌다.
“알고 있었어.”
긴 간격을 두고 블랑쉬가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받았던 관심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언론은 그녀의 작품보다 어린 나이와 외모에 관심을 보였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교만해지지 않았다. 진정한 자신을 보이고자 더더욱 분발했다.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반 고흐도 피카소도. 앙리 선생님도 10년 넘게 고생했으니까.”
“블랑쉬…….”
“내가 분한 건 자꾸 흔들려서야. 알고 있는데. 다 헛소리라는 거 알고 있는데.”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음에도.
주변의 목소리가 가슴을 찔러대는 통에 집중할 수 없었다.
“재미없다고. 진부하다고. 질린다고. 옛날 그림이라고 하잖아.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해?”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꺼낼까.
블랑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술은 자신을 성찰하고 닦아내 빚어내는 행위. 그 결과물은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비판이라는 이름 아래 한 사람을 진부하고 식상하다고 말하는 행위가 정당화되다니.
블랑쉬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지녔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블랑쉬가 남은 와인을 마저 들이켜자 와인 바 사장이 새 잔을 따라주었다.
“서비스입니다. 싸구려지만.”
“……감사합니다.”
비다 라바니가 한 번 더 친구를 위로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네 그림 멋있어.”
화가 났다.
비다 라바니는 꿈을 향해 걸어가는 블랑쉬를 자랑스레 여겼다.
재능과 환경을 갖추고도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많았다.
매일, 한시도 붓을 놓지 않는 블랑쉬가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다.
“옛날 그림이라니. 다 모르고 하는 말이잖아. 카메라가 나오면서 똑같이 그리는 그림은 의미가 없어졌다고? 다 변명이야! 그럼 사진작가들은 예술가가 아니야?”
비다 라바니가 친구를 대신해서 화를 냈다.
미술계에는 오랫동안 잘못된 관념이 심겨 있었다.
유행처럼 매번 새로운 것에 휩쓸렸다.
독창적인 작품을 좋아한다면서, 새로운 것이 나오면 시장에 유행되었고 금방 사그라졌다.
때문에 전에 없던 무엇을 창조하기 위해 기행을 저지르고, 그 논란을 유명세 삼아 돈을 벌기도 했다.
그들은 그림을 예술이 아니라 소모품처럼 다뤘다.
“마르소 작가님도 말씀하셨잖아. 새로운 걸 만들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그리라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은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비다 라바니가 앙리 마르소의 말을 인용했다.
블랑쉬는 수년 전, 앙리 4세 고등학교 재학 시절을 떠올렸다.
은방울꽃에 자신을 대입시켜 그린 그림을 앙리 마르소가 칭찬했었다.
“난 미술은 모르지만.”
와인 바 사장이 입을 열었다.
“이 와인은 1988년에 만들어졌습니다. 20세기 초부터 지금도 항상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지요.”
블랑쉬와 비다가 노인을 보았다.
“100년이 넘도록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지만 아주 인기가 많죠. 와인을 오래 즐긴 사람에게도, 두 분처럼 처음 마셔본 사람에게도요.”
“비싼 이유가 있었어…….”
비다 라바니가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미술을 몰라요. 하지만 옛날 방식이라고 해서 무시당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와인은 새로운 술인 것처럼요.”
“…….”
“그림을 오래 봐 온 사람은 자연스레 다른 걸 추구하게 되고, 또 이제 막 접한 사람들은 기존 작품에도 감동하기 마련이죠. 무지한 사람들의 비난으로 영혼이 다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블랑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 일을 하다 보면 오지랖이 넓어져서 말이죠. 마음에 두지 말아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기운을 차린 블랑쉬가 일어섰다.
취기가 올라와 살짝 어지럽고 몸이 달아올랐지만 응어리진 감정은 다소 풀어졌다.
홧김에 찾은 장소지만 나쁘지 않았다.
“괜찮아?”
블랑쉬가 살짝 비틀거리자 비다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응. 괜찮아. 다음에 또 올게요.”
“얼마든지.”
주인이 내민 계산서를 확인한 블랑쉬가 눈을 크게 떴다.
취기가 가셨다.
* * *
성귤 과장의 전화를 받고 돌아온 방태호가 의아한 말을 꺼냈다.
“블랑쉬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요?”
“응. 쇼콜라티에 갤러리 앞에 작은 와인 바가 있는데 거기서 한대.”
작품이 거래되지 않아서 의기소침해 있던 블랑쉬가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쇼콜라티에가 지원금을 주고 있으니 경제적 문제는 아닐 텐데, 자립심 강한 친구니 그것을 더 부담스럽게 여겼을 수도 있겠다.
“갑자기 왜요?”
“술 마시고 돈이 부족했나 봐.”
“……네?”
당황해서 되물으니 앙리가 인상을 썼다.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그래서요?”
“주인하고 합의하고 한 달간 일 도와주기로 했답니다. 저녁에 잠깐.”
걱정스레 물어본 미셸도 황당한지 미간을 좁혔다.
방태호와 할아버지는 허탈하게 웃었다.
“지금도 그런 일이 있을 줄이야. 사장이 용케 봐줬구나.”
“연락했으면 대신 지불해 줬을 텐데 그러기는 싫었던 모양입니다.”
“나름대로 생각하는 게 있겠지. 화실 안에만 있는 것보단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그 아이에게도 좋을 걸세. 모른 척해주게.”
“같은 생각입니다.”
하기는 나도 술값이 부족해서 그림을 그려 준 적도 있으니까.
할아버지 말씀처럼 이것저것 경험해 보는 게 블랑쉬에게도 좋을 거다.
몸을 움직이면 나쁜 생각 들 새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그림은 화실이 아니라 화실 밖에서 태어나는 법이다.
“엄청 속상했나 봐.”
접점이 많진 않지만 마은찬도 내심 걱정되는 모양이다.
“돌아가면 같이 밥이라도 먹어요.”
“응.”
“슬슬 시간이 됐는데.”
방태호가 시계를 보곤 혼잣말했다.
과연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다가 구름 위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른 새벽.
멀리 마크로니소스섬의 산 위로 펼쳐진 여명을 넋 놓고 바라보다 보니 달이 태양에 가까워졌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인다.
“아르센.”
“네.”
아르센이 미리 준비한 카메라를 확인했다. 달이 태양을 가리는 순간은 아주 잠깐이니 기록해 둘 필요가 있었다.
태양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달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강렬한 빛을 막아서고 있으니 그리 보일 테지만, 빛이 분열되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팔레트를 이루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대지는 어둡다.
칠흑처럼 어두워서 무지개색으로 물든 하늘과 무척 대조적인데, 문득 시선을 옮기자 달이 태양 한가운데에 놓였다.
이름 그대로.
검은 달을 황금으로 만든 반지가 감싸고 있다.
“아.”
이 얼마나 경이로운 광경인가.
광활한 우주에서 항성과 행성 그에 딸린 위성이 직선을 이루는 찰나가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 있는가.
지금 벅차오르는 마음을 잘 간직하자.
다음 그림을 그리는 소중한 물감이 될 터이니.
* * *
그리스를 다녀오고 일주일이 흘렀지만 마음에 드는 색을 찾지 못했다.
<149,597,870.696㎞> 이후로 색이 전달하는 감정에 주목해 왔는데, 이번에는 쉽지 않다.
검은 달. 칠흑 같은 대지. 금색으로 빛나는 태양.
빛이 분산되어 팔레트처럼 물든 하늘까지 색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똑똑-
누군가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네.”
“쉬엄쉬엄하려무나.”
할아버지가 포도를 가지고 들어오셨다.
“잘 먹겠습니다.”
“열심히 찾고 있구나. 어떠니.”
흐뭇하게 웃으시더니 여러 물감을 칠해 놓은 캔버스를 보시곤 작업 상황을 물어보셨다.
“확신이 안 서요. 대조 효과를 강조하고 싶은데 이거다 싶은 게 없어요.”
“음.”
할아버지는 항상 물어보실 뿐, 답을 주지 않는다. 대답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길을 찾길 바라시는 거다.
색을 스스로 만들어 봤으니, 다른 작품을 참고해 볼 생각으로 인터넷에 검은색을 검색해 봤다.
검은색에도 종류가 많은데, 기성품으로는 내가 바라는 극적인 연출이 힘들다.
“반타 블랙?”1)
직접 보는 것만 못하겠지만 액정 화면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검은색처럼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을 침식시킬 듯한 어둠에 마음이 동하고 말았다.
좀 더 찾아보니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이란다.
이거다.
“아니쉬 푸어 말이구나.”
“네?”
“아니쉬 푸어가 독점을 걸어두었단다. 사서 그릴 순 있겠지만 발표하지는 못할 거야.”
“독점이요? 안료에요?”
“음. 예술적 목적으로는 못 쓴다고 하더구나.”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관련 문서를 읽어내리자 과연 그런 내용이 적혀 있다.
“유일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인지. 욕심이 과하더구나.”
“라이센스를 사거나 할 순 없어요?”
고개를 저으신다.
“여러 사람이 요청했지만 들어주질 않았다고 들었다. 아니쉬 푸어 입장에서는 본인만 사용할 수 있다는 강점을 내려놓고 싶지 않겠지. 장사를 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
마음에 들진 않지만 별다른 수가 없다.
그들이 연구 개발한 것이니 허락 없이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
좋은 물감을 찾았다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할애비가 도와줄까?”
“아니에요. 답은 하나가 아니니까요. 찾다 보면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림에 유일한 답이란 존재할 수 없다.
* * *
1)빛의 99.965%를 흡수하는 물질.
2019년 9월까지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이었다.
2016년 인도 출신 예술가 아니쉬 카푸어가 반타블랙을 예술적 목적으로 사용할 권한을 독점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후 2019년 9월 12일 MIT 연구진이 빛의 99.995%를 흡수하는 물질을 개발하며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물질이란 수식어를 내려놓았다.
이후 여러 단체 및 예술인이 반타블랙처럼 검은 물질을 만들고자 노력하여 현재는 대체품이 여럿 개발되었다.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세계관에서는 아직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이라는 설정으로 132화에 첫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