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5화
-르네상스-
2. 금환일식(2)
“맛있어!”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하고 처음 방문한 식당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아르센이 추천한 식당답게 다들 기뻐했고 나 역시 닭고기를 카타이피로 감싸고 기름에 튀긴 이 그리스식 음식에 반하고 말았다.
실 같은 반죽으로 감싸 노릇노릇하게 튀겨내니 겉은 매우 바삭한데, 안에는 육즙을 가득 품은 닭 다리 살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해 완벽하다.
함께 나온 소스도 독특하다.
시큼한 요거트에 민트를 넣어 만든 것 같은데 기름진 닭고기 튀김으로 느끼해진 입을 상쾌하게 해준다.1)
“이 소스는 뭐예요?”
“짜지키라고 합니다. 수제 요거트에 식초, 민트, 마늘, 올리브유를 넣어 만들었습니다.”
“마늘이요?”
“마늘?”
나와 할아버지, 방태호, 마은찬이 동시에 묻자 식당 주인이 빙그레 웃었다.
“네. 한국에서 오셨다고 해서 향을 입혀 봤습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갈아서 넣으신 거예요?”
“하하. 설마요. 만들어 놓은 소스에 마늘을 넣었다가 제거했습니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마늘을 좀 갈아서 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이죠.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식당 주인이 마은찬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마늘 좋아해서요.”
마늘이 들어가면 어떨지 궁금하긴 하다.
“합.”
한 번 더 입에 넣어 접시를 비웠다. 닭을 튀긴 음식은 항상 옳다.
“훈아, 하나 더 먹어라.”
할아버지도 그리스풍 음식이 마음에 드신 듯하다.
맛있는 건 항상 덜어주시니까.
“할아버지 드세요. 더 시켜 먹으면 되죠.”
“아니야. 할아버진 많이 먹었어.”
할아버지와 서로 음식을 양보하던 중 앙리가 입을 열었다.
“화이트채플에서 연락이 왔다고?”
“네. 천천히 준비해서 내년 이맘때에 하자고 했어요.”
마은찬이 반갑게 답했다.
화이트채플은 1901년에 개관한 유서 깊은 갤러리다.
방태호는 마크 로스코, 프리다 칼로, 잭슨 폴록처럼 당대의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한 거장들을 다룬 갤러리라며 높이 평가했다.
앙리도 잘 아는 듯 잔을 돌려 와인 향을 맡더니 드물게 칭찬한다.
“나쁘지 않지.”
“히힣.”
“정말로. 화이트채플에서 프리미어 전시한 작가는 정말 드물어. 축하해.”
미셸도 거들자 마은찬이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그런데 시기가 좀 걱정이네.”
“시기요?”
“르네상스하고 겹치잖아.”
내년 6월부터 시작하는 세계 예술 전람회 ‘르네상스’와 비슷한 시기에 예정이 잡혔다.
“화이트채플에서도 고려할 겁니다. 르네상스 시작하기 전으로 일정을 조금 당긴다든지. 영향은 받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죠.”
방태호의 말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조금씩 인지도를 쌓고 있는 마은찬에게 이번 일은 확실한 팬층을 확보할 좋은 기회다.
영국에서 손에 꼽는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거니까.
이것저것 따지면 어떤 일도 하지 못한다.
“그러지 않아도 말씀하시더라고요. 두 달 전에는 시작할 수 있게 준비해 달라고.”
“그래야지. 르네상스도 준비해야 할 테니.”
마은찬이 앙리를 보았다.
“네?”
“뭘 놀라.”
“어……. 저 개인전 준비해야 하니까.”
대규모 개인전을 여는 일이다.
그 전부터 작업해 온 작품이 있다고는 해도, 내년 3~4월까지 부지런히 준비해야 할 터다.
말이 쉽지 근 1년간 쉬지 않고 달린 뒤에 다시 르네상스 출품작을 준비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리라.
“개인전에 이어 국제무대도 준비되어 있어.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을 것 같아?”
양쪽 모두 참여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분명 좋은 흐름을 탈 것이다.
평단과 미술 애호가들도 마은찬은 달리 보게 되어 아마 일정 궤도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놓치지 마. 죽을힘을 다해.”
마은찬이 앙리를 보더니 이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넵.”
준비하기 벅찬 일이라는 걸 앙리가 모를 리 없다.
10개월 만에 대규모 개인전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무리하게 될 터다.
그럼에도 르네상스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이유는 하나뿐. 다시 오지 않을 기회기 때문이다.
“마늘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은찬이 그릇을 받아들고 멈칫했다. 친절한 식당 주인이 가져온 마늘은 티스푼으로도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어…….”
“뭔가 더 필요하신 거라도?”
“죄송하지만 마늘을 좋아해서요. 좀 더 주실 수 있으실까요?”
“물론이죠. 얼마나 더 드릴까요?”
눈치를 보니 할아버지와 방태호도 필요해 보이고 나도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이 그릇 정도요?”
“네?”
* * *
“다음엔 더 나아질 거야. 재능 있잖아.”
“네.”
블랑쉬 파브르가 쇼콜라티에 갤러리를 나섰다.
멀리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더위가 어깨를 짓눌렀다.
천재 화가로 불렸던 그녀는 반듯하게 서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차량, 그리고 여름을 바라보았다.
쇼콜라티에 갤러리의 성귤 과장은 매번 응원해 주었지만 이번 달에도 판매된 작품은 없었다.
2년 전 두 작품이 거래된 이후로 줄곧 소식이 없었다.
고훈과 앙리 마르소에 이어 쇼콜라티에 작가로 가장 오래 활동한 그녀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좌절감과 불안을 감출 뿐 블랑쉬 파브르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갤러리 밖이 유독 낯설었다.
매일, 매번 최선을 다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보다 더 열심히 할 순 없을 거라 자부할 정도로 노력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포기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매일 밤 엄습했다.
포기하면?
캔버스에서 벗어나면?
화실과 갤러리에만 틀어박혀 살았던 그녀는 미지의 공간으로 내쫓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차마 발을 움직이지 못했다.
천재로 불렸던 일이 머나먼 과거의 일 같았다.
따돌림당해도 개의치 않던 천재 화가의 스물한 살은 깨질 듯 말 듯 위태로웠다.
“뭐 하고 있어?”
비다 라바니였다.
“돌아가는 거야? 오늘은 일찍 가네?”
친구는 많이 변했다.
수줍음 많고 자존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전과 달리,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응.”
“나 이거만 반납하면 되는데. 같이 갈래? 조금만 기다려줘. 금방 나올게.”
비다 라바니는 대답도 듣지 않고 건물로 들어섰다.
“…….”
블랑쉬는 달라진 친구를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그가 도슨트로 활동하고 자리 잡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곁에서 쭉 지켜봤었다.
매일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고, 수줍은 성격을 고치고자 억지로 사람을 만나고 다녔고 발성법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끝.”
비다 라바니가 돌아왔다.
그가 먼저 계단을 내려갔고 블랑쉬가 작은 한숨과 함께 뒤따랐다.
“마르소 작가님하고 훈이 진짜 대단하더라. 예약이 가득 차서 도슨트가 부족하대.”
“…….”
“그거 알아? 작가님 요즘 작품 왠지 따뜻해졌다? 훈이처럼. 그러고 보니 훈이도 약간 달라진 것 같아. 전에는.”
블랑쉬가 걸음을 멈췄다.
조잘대던 비다 라바니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해했다.
“술 마실래.”
“술?”
블랑쉬 파브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래된 간판을 내건 바가 눈에 들어왔다.
술을 마셔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의 우울함과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티르 부숑(Tire-bouchon: 와인 오프너)이란 이름의 와인바에 들어서자 잔을 닦는 나이 든 주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비다 라바니가 친구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나 이런 데 처음인데.”
“여기요.”
블랑쉬가 무시하고 바 주인을 부르자,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이라 모르겠어요. 추천해 주세요.”
“글쎄. 어떤 걸 좋아하시려나.”
노인이 잔을 내려놓고 두 사람 앞에 섰다.
“단 걸 좋아해요.”
“단 거.”
노인이 시선을 옮겨 비다 라바니에게도 물었다.
“저도. 쓴 건 못 마셔서요.”
“그렇다면 이걸로 한 잔씩 드리지.”
노인이 두 사람 앞에 잔을 두고 와인을 따라주었다.
“색이 엄청 예쁘네요.”
조명을 받은 와인은 황금으로 빛났다.
“하하. 샤토 디켐이란 와인이지요.”
“와인은 처음이라서 어떻게 마시는지 모르는데…….”
낯선 곳에 들어온 비다 라바니가 주인 눈치를 보았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와인바 사장도 손님이 와인을 어떻게 즐기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한 잔이라도 더 팔고 싶다면 말이죠.”
“하핳. 말씀 재밌게 하시네요.”
“진심이 섞인 농담은 항상 즐거운 법이죠.”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 잔을 노려보던 블랑쉬 파브르가 단숨에 와인을 삼켜버렸다.
혀에 닿자마자 단맛이 이성을 잠식했다.
“…….”
블랑쉬 파브르가 놀라서 잔을 살폈다. 꿀보다도 진한 단맛을 자랑하는데, 진득하지 않았다.
도리어 입안과 목이 산뜻했다.
비강을 타고 오르는 톡 쏘는 향취 또한 매력적이었다.
“어떠신가요.”
“한 잔 더 주세요.”
“기꺼이.”
와인을 받아든 블랑쉬가 또 한 번 잔을 비워버렸다.
“처, 천천히 마셔. 큰일나.”
“마실 거야.”
무슨 일로 안 하던 행동을 하는지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블랑쉬가 비다를 봐왔던 것처럼, 그 역시 친구로서 그녀를 지켜봐 왔었다.
아는 척하지 않았지만 최근 그녀의 작품이 팔리지 않고, 평단에서 언급되는 일도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비다 라바니는 어떻게 친구를 위로할지 고민하며 와인잔을 들었다.
달콤한 벌꿀 향이 났다.
“맛있다.”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한 잔 더요.”
“블랑쉬.”
“말릴 거면 가. 주세요.”
블랑쉬가 엄포를 놓고는 와인을 더 달라고 주문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기에 비다 라바니는 그녀를 두고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와인 맛도 나쁘지 않으니 속상한 친구 곁을 지켜줄 생각이었다.
‘나도 한 잔만 더 마셔볼까.’
“메뉴판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비다 라바니가 메뉴판을 펼쳐 어떤 술이 있는지 확인하다가 샤토 디켐 이그렉 Y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 병에 350유로나 한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한 잔 더.”
“자, 잠깐.”
“말리지 말라고 했잖아.”
“이러다 큰일 난다니까?”
“안 취했다고!”
“취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큰일 난다고!”
* * *
1)Tzatziki. 차지키, 짜지키.
그리스 음식 전반에 곁들이는 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