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1화
-르네상스-
1. 마르소 미술관(1)
토요일 이른 아침.
맥주와 물, 비타민 음료를 배합하던 이수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들 고훈이 식탁 위로 얼굴만 내놓고 있었다.
곯아떨어진 남편을 의식한 이수진이 입술에 검지를 대자 고훈이 고개를 끄덕이곤 걱정스레 말했다.
“섞어서 마시면 머리 아파요.”
“마시는 거 아니야.”
텀블러에 맥주를 따르던 이수진이 손을 멈췄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웠어?”
“뭘요?”
“섞어 마시면 머리 아픈 거.”
오랜 음주 생활로 체득한 경험이었으나 당신의 아들이 사실은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고 고할 수는 없었다.
“아빠가요.”
“이 인간이 못 하는 말이 없어. 훈이는 커서 술 마시면 안 된다?”
“네.”
고훈이 맥주를 응시하다가 물었다.
“한 모금은 괜찮지 않아요?”
“안 돼.”
“목마르면요?”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지.”
고훈이 아쉬워하며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1)
마시지도 않을 맥주를 다른 음료와 섞으니 아깝기 그지없었다.
“그럼 뭐 하시는 거예요?”
“아빠 혼내주려고.”
고훈이 눈을 껌뻑이자 이수진이 피식 웃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아이는 텀블러를 챙겨 안방으로 향하는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이수진은 남편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이불을 들춰 혼합액을 부었다.
잠옷과 깔아놓은 이불이 축축해졌지만 어제 과음한 고해성은 꿈에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한 고훈이 씩 웃었다.
이수진은 아들을 데리고 안방을 나섰고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준비했다.
“프라이 몇 개 먹을래?”
“네 개요.”
“네 개나? 다 먹을 수 있어?”
“먹을 수 있어요.”
“베이컨이랑 빵도 있는데?”
“그럼 세 개만 먹을게요.”
먹성 좋은 아들이 접시를 꺼내고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자 이수진이 피식 웃었다.
“우리 아들 다 컸네? 엄마 도와주기도 하고.”
“별일 아니에요. 아침으로 와인 한 잔 어때요?”
“그래.”
큰 기대 없이 꺼낸 말이었거늘.
어머니가 와인을 준다고 하니 고훈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좋아하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자, 훈이 와인.”
이수진이 가족이 함께 만든 해바라기 컵에 포도 주스를 따라주었다.
비록 와인은 아니나, 포도 주스의 감칠맛은 그가 즐겨 마셨던 몽마르트르산 싸구려 와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혀를 휘감는 점성과 비강에 차오르는 싱그러운 향, 영혼을 감싸 안듯 고혹적인 당도에 만족한 고훈이 TV를 틀었다.
아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프랑스 화가 앙리 마르소가 평론가 위고 요리스의 멱살을 잡아 논란이 일었습니다.
“스펀지빵 할 텐데?”
“안 봐요.”
“왜? 재미없어?”
말을 빨리 익히고자 쉬운 단어를 사용하는 애니메이션을 봤지만,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해진 뒤에는 뉴스를 보는 편이 나았다.
“네.”
고훈이 젊은 남자의 멱살을 빨래 널 듯 털어대는 앙리 마르소를 보며 물었다.
“저 사람은 왜 매일 싸워요?”
“누구?”
“앙리 마르소요.”
“글쎄? 훈이는 왜 그런 거 같아?”
고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불안해서요.”
“그럴 수도 있겠네.”
조만장자로 알려진 앙리 마르소가 무엇에 불안해할까 싶기도 하지만, 이수진은 굳이 아들의 추측을 고쳐잡지 않았다.
명성과 부가 따른다고 해서 삶이 안정되는 건 아니고, 또 본인의 판단을 아들에게 주입하고 싶지도 않았다.
“훈이는 불안하면 화나?”
“네. 무서우니까 화내서 잊으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전 화 안 나니까요.”
“화가 안 나?”
“엄마랑 아빠가 있잖아요.”
고훈이 포도 주스가 담긴 잔을 내려놓자 이수진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부모와 함께라 불안할 일이 없다는 말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엄마도.”
“엄만 화내시잖아요.”
“엄마가?”
고훈이 안방에 시선을 주었다.
이수진이 장난스레 웃으며 아들의 지적을 받아들였다.
“그러네. 아빠 깨워줄래?”
“네.”
고훈이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안방으로 향했다.
뉴스와 대화 소리, 베이컨이 구워지며 나는 냄새 그리고 고간에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 때문에 잠에서 깬 고해성은 잔뜩 굳어 있었다.
무심코 이불 안으로 넣은 손이 심상치 않은 상황을 알려주었다.
‘설마.’
고해성이 손을 코에 가져다 댔다.
시큼한 냄새가 나면서 어제 마셨던 맥주 향이 풍겼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한 고해성이 문 앞에 서 있는 아들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훈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어, 어……. 훈이도 잘 잤어?”
일곱 살 아들도 하지 않는 일을 저질렀다니.
고해성은 본능적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
“아침 먹어요.”
“어, 그래. 먼저 먹어.”
“같이 먹어요.”
“응. 아빤 화장실 갔다가 갈게. 훈이 먼저 먹어.”
고훈이 씩 웃으며 이불을 끌어 내리려고 하자 고해성이 기겁했다.
힘을 주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지만 어린 아들이 다칠까 봐 그럴 수 없었다.
“훈아, 잠깐. 잠깐!”
“흐흐흥. 빨리 일어나세요.”
“아빠가 아파서 조금만 더 잘게. 훈아! 훈이 손 놓으세요~ 착하지?”
고훈은 고해성이 당황할수록 이불을 세게 당겼다.
어머니처럼 화가 나진 않았지만, 이불에 오줌을 쌌다고 믿는 아버지를 놀리지 않을 순 없었다.
“훈아, 잠깐만. 잠깐.”
“뭐 해? 빨리 와.”
아들은 이불을 들추려고 하고 밖에서는 아내가 재촉하자 고해성의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나이 마흔에 소변을 지렸다는 사실을 아내와 아들에게 알릴 순 없었다.
“머리가 좀 아프네. 조금 더 잘게. 먼저 먹어.”
“아파?”
아내가 안방으로 들어오자 고해성이 눈을 크게 떴다.
“어디. 봐 봐.”
“아, 아니야. 좀 더 자면 돼. 빨리 가서 밥 먹어.”
“어디가 어떤데. 어?”
이수진이 걱정스레 다가가자 고해성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냄새라도 나지 않을까 싶어 괜히 이불을 끌어안게 되었다.
“열은 없는데?”
“그냥. 그냥 몸살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그래. 아, 그냥 가서 먼저 먹으라니까?”
“아프면 병원 가야 해요.”
고훈이 거들었다.
“그래. 밥 먹고 병원 가자. 아님 바로 갈래?”
“괜찮다니까 그러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나중에 더 안 좋아져서 응급실 갈 바에 지금 가는 게 낫지.”
토요일이라 병원 진료 시간이 길지 않았다.
늑장 부리다가 병원이 문을 닫으면 애꿎은 돈만 나간다고 하니, 고해성으로서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운명이 도래했음을 직감한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마지막 자존심만을 지키려 했다.
“훈아, 아빠가 엄마랑 할 말 있는데 잠깐 자리 좀 내줄래?”
“네.”
영민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은 고맙게도 냉큼 방을 나섰고 고해성은 참담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보.”
“왜? 많이 아파?”
이수진이 침대 위에 앉아 걱정스레 묻자 고해성이 흠칫했다.
이 처참한 상황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고해성은 억지로 웃었다.
“그게. 어제 좀 과했나 봐. 하하하핫!”
이수진이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속 많이 안 좋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 하핳.”
“뭔데. 응?”
“…….”
“빨리 말해.”
고해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줌. ……싼 것 같아.”
“뭐?”
“하. 하핳! 당신도 웃기지? 이게 대체 뭔 일이야. 빨래. 빨래하고 나갈게. 훈이랑 먼저 먹어. 하핳!”
고해성이 필사적으로 웃어넘기려고 했으나, 어제 취한 남편 덕에 두 시간이나 함께 춤을 춰야 했던 이수진의 화는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그런 농담을 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진짜야?”
고해성이 잔뜩 시무룩해져 고개만 끄덕였다.
“어디 봐.”
“보긴 뭘 봐? 아!”
이수진이 이불을 들추자 노란 액체가 침대 가득했다.
그녀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고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깜빡 속아 넘어갔는지 한숨만 쉴 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진짜 오줌이야?”
“냄새는 왜 맡아? 어?”
이수진이 코를 가져다 대려고 하자 고해성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말렸다.
“그냥. 그냥 실수한 거야. 미안해.”
고해성은 단지 이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바랄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묻어두고 싶었다.
“당신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어?”
“그렇잖아. 아무리 취했어도 누가 나이 마흔에 오줌을 싸.”
고해성이 입만 뻐끔거렸다.
분명 어젯밤만 해도 마감을 끝낸 기념으로 기분 좋게 취했고 아내, 아들과 함께 춤추어 즐거웠거늘.
속옷과 잠옷, 이불까지 몽땅 적셔버린 자신이 정말 어딘가 잘못된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 아픈가?”
“흡. 그래.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래. 훈아, 훈아?”
이수진이 아들을 부르자 고해성이 기겁했다.
“훈이는 왜 불러!”
“훈이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아빠가 아픈데.”
“아니. 훈아! 안 와도 돼! 응?”
고해성이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엄마와 함께 아빠를 놀리는 데 재미 들린 고훈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엄마가 미리 챙겨놓은 바가지를 가져와 아빠 머리에 씌어 주었다.
바가지를 쓴 고해성은 아들과 아내를 번갈아 보았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얼떨떨한 그를 이수진이 재촉했다.
“뭐 해. 소금 얻어 오지 않고.”
“소금?”
“끟핰핰핳!”
고해성이 눈을 껌뻑이자 이수진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고 고훈도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항핳핳.”
그제야 이수진과 고훈이 자신을 놀렸다는 걸 깨달은 고해성이 벌떡 일어나 아내와 아들을 끌어안았다.
* * *
내 웃음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버렸다.
버뱅크 집과 다른 구조와 너무나 고요한 분위기, 창문으로 투과된 햇살이 너무 밝아서 잠시 혼란스러웠다.
오랜만에 부모님 꿈을 꾸었다.
“…….”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서니 할아버지가 차를 마시고 계셨다.
“일어났어?”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뭐가 그리 재밌었어?”
“그냥요.”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면 신경 쓰실 게 뻔하니 대충 얼버무렸다.
식탁에 만체고(Manchego) 치즈를 가득 끼얹은 라자냐가 있다. 양상추와 파프리카, 올리브가 잔뜩 들어 있는 샐러드도 있다.
할아버지가 조식으로 주문하신 모양이다.
“라자냐네요?”
“맛이 괜찮더구나.”
“합.”
진득하고 꾸덕한 식감과 고소한 치즈 향이 일품이다.
“방 대표가 10시에 데리러 온다던데.”
“데리러요?”
“마르소 미술관 행사 있잖니.”
“아.”
축사를 맡아주기로 했는데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깜빡하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의아해하시는 눈치다.
“일식 보고 싶어서 이것저것 찾다 보니 깜빡했어요.”
“일식?”
“네. 달이 해를 가린대요.”
전부터 하늘에 관심이 많았는데, 달이 해를 가리는 현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꼭 한 번 직접 보고 싶었다.
몇 년을 기다린 일이니 놓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니 뉴스로 본 것 같기도 하고. 여기서 볼 수 있어?”
“그리스에서 볼 수 있대요. 6월 1일. 보러 가요.”2)
뉴스에서는 알제리와 리비아에서 시작해, 그리스와 터키, 러시아를 지나간다고 설명했다.
파리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면 그리스나 터키다.
할아버지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우리 훈이가 보고 싶으면 보러 가야지. 그리스엔 구경할 것도 많으니 겸사겸사 괜찮겠어.”
“맛있는 것도 많대요.”
“껄껄껄. 그래. 그래. 한 번 알아보자꾸나.”
* * *
1)물에 석회질이 많았던 유럽에서는 예부터 식수 확보가 힘들었다.
이 때문에 맥주와 포도주가 식수 대용으로 발달했는데, 이는 근대적 상수도 시설이 설치된 산업혁명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2)현실에서는 2030년 6월 1일.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세계관에서는 2034년에 발생한다는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