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26화
56. 비 온 뒤에
미술 교양 프로그램 ‘대화를 나눠요’는 비엔날레 역사상 가장 흥행한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되새기는 의미로 두 화가를 초빙했다.
<149,597,870.696㎞>와 <2년 8개월>이 공개된 이후 수많은 매체가 고훈과 앙리 마르소를 다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적은 처음이었다.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가운데 진행자 우진이 나섰다.
“누적 방문자 1,400만 명을 기록한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다음 주로 마무리된다고 하죠. 오늘은 역사상 가장 흥행한 비엔날레의 주역 두 분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앙리 마르소, 고훈입니다.”
카메라가 세트장에 입장하는 고훈과 앙리 마르소를 잡았다.
고훈은 방긋방긋 웃으며, 앙리는 턱을 치켜든 채 거만히 걸어 나왔다.
“반갑습니다. 고훈 군, 마르소 씨.”
“반가워요.”
고훈만 대답했다.
“휘트니 비엔날레 때 출연하셨으니 2년 만인가요?”
“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방송에 행사. 행사에 방송. 방송. 방송. 행복하게 보냈죠.”
“바쁘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건강도 살펴야 해요. 좀 여위신 것 같은데. 밥은 잘 먹고 있죠?”
“사실.”
장이 좋지 않아서 음식을 마음껏 못 먹고 있다고 말하려던 우진이 멈칫했다.
저번 방송에서도 고훈이 이것저것 물어 대답하는 바람에 시청자들로부터 누가 게스트냐, 네가 어떻게 살든 궁금하지 않다는 등의 비난을 받았었다.
“잠깐. 오늘은 당하지 않을 거예요. 질문은 제가 할게요.”
“그럼 방송 끝나고 얘기해요. 오랜만이잖아요.”
우진이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응시했다.
“이렇게 상냥한 화가를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죠? 오늘부터 전 펭귄입니다.”
감동한 우진이 고훈의 뉴튜브 채널 구독자를 자청하자 방청객들이 가볍게 웃었다.
“자, 그럼.”
우진이 고쳐 앉고는 질문을 꺼냈다.
“쇼콜라티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분이 함께 설립한 화가 공동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나요?”
“서로 돕자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제가 보기에는 두 분이 도움이 필요할까 싶기도 한데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순 있어도.”
“필요해요.”
고훈이 단언했다.
“정말 여러 사람에게 영감을 받아요. 은찬이 형은 정말 긍정적이라 같이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블랑쉬는 소재랑 교감을 잘해요. 주로 곤충을 그리는데 생각지도 못한 데에서 감동을 주고 비다가 바라보는 세상은 정말 따뜻해요.”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네.”
“멋지네요. 마르소 씨는 어떠신가요?”
우진이 앙리에게 같은 질문을 건넸다.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그는 쇼콜라티에에서 무엇을 얻고 있는지 궁금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도 있지.”
우진과 방청객, 시청자 모두 놀라고 말았다.
프랑스 미술계의 영웅이자 <2년 8개월> 이후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앙리 마르소는 일찍이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로 알려져 있었다.
고훈과 만나기 전에는 협업은커녕 다른 예술가와 접점조차 없었으며 전시회조차 홀로 개최하는 등 남과 어울리기를 꺼렸다.
멍하니 있던 우진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물었다.
“지금까지 보여주신 모습과는 사뭇 다른데.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요?”
앙리가 무심히 답했다.
“앙리 마르소 002, 변치 않는 가치, 2년 8개월을 작업하면서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세 작품 모두 한 사람이 만들기에는 벅찼다.
<앙리 마르소 002>는 개벽을 활용하여 어떻게든 완성했지만, 건물 자체를 작품으로 한 <변치 않는 가치>부터는 힘에 부쳤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고훈과 함께라 겨우 완성할 수 있었지만, <2년 8개월>은 아예 건설사 한 곳을 인수해 지어야 했다.
“아무래도 스케일이 워낙 큰 작품을 해오셨으니까요.”
“그런데 성에 차는 인간은 적어. 찾기도 힘들고.”
“그렇겠죠? 사실 마르소 씨처럼 완벽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마음에 꼭 드는 결과를 바라는 건 무리가 있죠.”
우진이 긍정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여러 회사와 함께 일했지만 클라이언트의 마음에 꼭 드는 결과물을 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앙리 마르소처럼 완벽주의자라면 특히나 더 그럴듯했다.
“일이 생길 때마다 그런 사람을 찾아서 처음부터 가르칠 바에는 아예 데려다가 육성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지.”
“……네?”
이타적인 화가 공동체로 알려진 쇼콜라티에를 노동자 양성소로 여긴다는 말에 우진도 시청자도 모두 굳어버렸다.
고훈만이 웃을 뿐이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다들 앙리 작업을 제일 좋아해요.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고 수당도 제일 높거든요.”
“마르소 씨의 작업을 제일 좋아한다는 건 다른 일도 있다는 뜻인가요?”
“네. 다들 개인 활동을 하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게시판에 어떤 작업을 하는데 몇 명을 구한다고 걸어둬요. 기간이나 보수 같은 조건도 같이요. 그럼 작업에 관심이 있거나, 여유가 있거나 돈이 필요한 회원들이 지원해 주는 거예요.”
“아하.”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 미술에서는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규모의 작업이 종종 있었고, 팀을 꾸려 활동하는 예술가도 많았다.
각자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와중에 빈 시간을 활용하고, 뛰어난 다른 예술가의 작업을 도우며 경험을 쌓고, 돈도 벌 수 있는 데다 강제되지도 않으니 이상적인 화가 공동체 같았다.
“그럼 지금 새로 작업 중이신 뷰그레넬리 쇼핑몰 벽화도 고훈 군이 회원을 모아서 진행한 일인가요?”
“비슷해요. 아이들이랑 함께 그리면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거든요. 질문도 많이 하고요.”
“아이들의 질문은 끝이 없죠.”
고훈이 공감한다는 듯 작게 웃었다.
“맞아요. 그래서 기왕이면 더 잘 그리고 싶은 아이들을 위해서 회원들하고 같이하고 있어요. 앙리도요.”
“멋집니다. 세상을 따뜻하고 달콤하게 만든다는 쇼콜라티에라는 이름이 정말 어울리네요.”
우진이 채팅창을 확인하고는 다음 질문을 꺼냈다.
“모두 149,597,870.696㎞와 2년 8개월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하네요.”
고훈이 우진을 빤히 보았다.
우진이 의아해하며 얼굴을 쓸었다.
“그렇게 잘생겼나요?”
“아니요.”
고훈이 확답하자 우진과 방청객들이 즐거워했다.
“149,597,870.696㎞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씀하신 분은 처음이라서요. 대본도 안 보시고.”
“프로 진행자라면 미리 준비해야죠. 제가 괜히 7개 프로그램을 맡은 게 아닙니다.”
“7개나요? 어떤 거요?”
“대화를 나눠요. 너만 모름. 책 속에 감춰진 신비한…….”
프로그램명을 읊던 우진이 정신을 차렸다.
“149,597,870.696㎞와 2년 8개월은 어떻게 만들어졌죠?”
고훈이 웃었다.
“다들 많이 말씀해 주셨고. 하고 싶은 말은 작품에 담았어요. 제가 설명을 덧붙여서 감상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요. 다만 김지우 작가가 쓴 글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김지우가 보자르에서 연재한 칼럼은 고훈과 앙리 마르소 두 사람을 다루어 큰 인기를 끌었었다.
“얼마 전에 책으로도 출간되었죠. 저도 재밌게 읽었는데, 노을이 지난 자리에 단풍이 졌다는 마지막 문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김지우 작가는 마르소 씨께서 의도하신 일이라고 추측하던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당연하지.”
앙리가 새침하게 답했다.
“149,597,870.696㎞는 해가 진 뒤에도 노을을 품은 단풍을 표현한 작품이야. 그 연속성을 표현하기에 그보다 좋은 방법은 없어.”
“정말 천재 아니에요?”
고훈이 앙리를 추켜세웠다.
“이제 겨울이 되어서 단풍이 사라질 텐데 내년 여름에는 또 노을이 들 거예요. 가을이 되면 다시 단풍이 들겠죠. 앙리는 천재예요.”
고훈이 앙리의 무릎을 탁탁 치며 자랑했다.
“그만해.”
“사실이잖아요.”
“다들 아는데 뭐 하러 당연한 말을 해?”
“자랑하고 싶으니까.”
앙리 마르소가 콧방귀를 뀌곤 고개를 돌렸다.
“정말 남다른 우정이네요. 클림트와 에곤 실레, 마티스와 피카소,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 이상의 관계로 보는 팬들의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우진이 몇몇 사이트에 올라온 비교 글을 보여주었다.
스승과 제자로 만나 서로에게 영감을 주었던 클림트와 에곤 실레.
최고의 두 화가가 만나서 평생 경쟁자이자 뮤즈로 여겼던 앙리 마티스와 피카소.
바스키아의 재능을 알아봐 그를 후원하고 나선 앤디 워홀.
나이 차이가 많은 두 천재 미술가가 한쪽을 끌어올려 주고, 그러는 한편 그 넘치는 재능에 동하여 작품에도 영향을 받은 일화는 여럿 있었다.
앙리는 관심 없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런 두 분이 또 함께 작품을 내지 않을까 기대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계획은 있어요.”
“어떤 계획인가요?”
우진이 반가워하며 물었다.
“베를린 필하모닉하고 같이하기로 했어요. 파우스트 오페라 아세요?”
세기의 천재 배도빈이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를 원안으로 작곡한 오페라였다.
초연 직후 공전의 대흥행을 거두었지만, 배우와 가수가 등장하지 않아 오페라로 볼 수 없다, 이해가 힘들다 등의 비판이 따르기도 했다.
“모를 수가 있나요.”
“가사를 최소화하고 악기로 꾸민 오페라인데 그러다 보니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많았대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그래서 배경 그림 작업을 더하기로 했는데, 마침 스위스 아트 바젤에서 꽃을 보고 적임자라 생각하셨대요.”
“이거 정말 놀랍네요. 마에스트로 배도빈과의 콜라보라니.”
“그러니까요. 저도 기대돼요.”
“그럼 마르소 씨도 함께하시는 건가요?”
앙리가 고개를 돌리자 고훈이 대신 답했다.
“네. 같이해요. 사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앙리가 막아서자 고훈이 웃었다.
“하지 마요?”
“하지 말랬어.”
배도빈이 <파우스트> 미술 작업을 의뢰하는 대가로 <꽃>을 제시하자 처음에는 단호히 거부했던 앙리 마르소도 차마 거절하지 못했었다.
고훈은 협상 테이블에서의 즐거운 일화를 풀어내고 싶었지만, 앙리가 싫어하니 굳이 꺼내진 않았다.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던 우진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두 분이 사이좋게 대화하는 모습은 여러 매체에서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지냈는데 요즘 바쁘다고 안 놀아주더라고요.”
“미술관 개관 일정 때문이라고 했잖아.”
“마르소 미술관 말씀이시군요.”
또 하나 중요한 이슈가 언급되자 우진이 놓치지 않고 짚어냈다.
“오르세 미술관에 버금가는 미술관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내년 3월에 개관한다죠?”
“3월 3일.”
“멋집니다. 어떤 구성인지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시간 흐름으로 분류한 전시관이 3개. 작가별로 모은 전시관이 4개.”
“작가별이라고 하시면?”
“모네, 반 고흐, 클림트, 고훈.”
우진과 방청객들이 고훈에게 시선을 모았고, 고훈은 앙리 마르소를 보았다.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말을 잘못 들었나 의심한 고훈이 확인차 물었다.
“뭐라고요?”
“모네, 반 고흐, 클림트, 너라고.”
“네?”
“궁금해?”
앙리가 굳어버린 고훈을 두고 스마트폰을 펼쳐 마르소 미술관 별관 고훈관의 전경을 띄웠다.
입구에 고수열의 <사랑7>이 걸려 있었다.
고훈이 짜장면을 입에 묻히고 먹는 모습이 공개되자 우진과 방청객, 시청자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귀엽다
└귀여워
└훈이 저렇게 보니 진짜 완전 앤데? ㅋㅋㅋㅋㅋㅋ
└누가 그렸지?
└고수열 작품임ㅋㅋㅋㅋㅋ 앙리한테 선물했다고 하던데 저기에 걸어뒀넼ㅋㅋㅋㅋㅋㅋ
└훈이 이불킥각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저런 작품이 있었다고?
└진짜 핑구 채널 편집자님 건강은 나중에 챙기시고 일 좀 하세요. 저런 게 있었으면 올려주셨어야죠 ㅠ
└ㅋㅋㅋㅋㅋ훈이 표정 봨ㅋㅋㅋ
└정색했닼ㅋㅋㅋㅋ
고훈이 벌떡 일어났다.
“뭐야!”
앙리가 씩 웃었다.
“뭐냐고! 저걸 왜 저기에 걸어요?”
고훈이 앙리의 스마트폰을 확대했다.
화폭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은 자연스러움과 고풍스러움이 병존하는 액자가 눈에 띄었다.
“이 액자 피에르 말로가 만들었어요?”
“흔쾌히 만들어 주더군.”
“만든 건 그렇다 치고 이걸 왜 거는데! 이거 만들려고 내 그림 다 모았던 거야?”
앙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왜. 귀여운데.”
1부 후기
안녕하세요, 우진입니다!
326화로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부를 완결하고 8월 5일부터 2부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뒤이은 이야기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서 부득이하게 간격을 두게 되었는데, 재밌는 이야기도 뜯어낼 머리카락도 많이 만들어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1부를 마치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다시 태어난 반 고흐>를 시작하기 전에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살아생전에는 미치광이, 괴짜로.
죽어서는 위대한 화가로 추앙받는 빈센트 반 고흐가 얼마나 대단한 화가였는지만 말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가 남긴 여러 편지를 보면서 그가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단히 열정적이고, 이상적이기도 하지만 고집스럽고 인간관계에서는 실패를 반복했죠.
한없이 자애롭다가도 어떨 때는 격정에 휩쓸려 난폭한 행동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실연에 슬퍼하고 실패에 좌절하고 또 본인을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부정하고 합리화도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지식인으로서 당시 사회를 향한 문제의식을 표출할 방법이 없었던 반 고흐에게 그림은 유일한 수단이었고.
그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가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어떤 일도 해결할 수 있었던 초인이었다면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큰 울림을 주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사람이라서.
그 발버둥에 마음이 동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 반 고흐>는 위대한 화가 반 고흐보다는 부족하지만 따뜻하고 열정적인 인간 반 고흐로 다뤘습니다.
사실 무엇 하나에 몰두한 사람은 그밖에 일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술이 곧 삶이었던 고훈과 앙리는 그 외 부분에서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많이 보입니다.
한 사람에게 허용된 시간은 한정적이니 그럴 수밖에 없고, 그러한 모습은 사회화가 덜 된 고집불통인 성격이나 의외로 허당인 면모를 보여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앙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네요.
이해받지 못했던 반 고흐는 다시 태어나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괴짜 취급받는 앙리 마르소를 만나게 됩니다.
다만 두 인물의 관계가 일방적이진 않습니다.
앙리가 고훈을 통해 사회화를 겪듯 고훈 또한 그와 함께하면서 예전 자신을 돌아보죠.
많은 에피소드가 고훈이 앙리를 교화하고 이해해 주는 흐름으로 흘러가지만, 고훈도 앙리를 통해 성장함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가장 어두운 밤도 언젠간 끝나고 해는 떠오를 것이다.”
작중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 있는 반 고흐의 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개벽’이라고 칭하는 앙리 마르소는 고훈의 태양이죠.
자존감과 자신감을 잃은 고훈에게 앙리 마르소는 특별했습니다.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앙리 마르소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하고 아낍니다.
적도 많죠.
누구보다도 많은 팬을 보유하긴 했지만 큰 힘 앞에서도 당당한 앙리의 태도는 고훈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소설을 보시면 고훈은 항상 ‘~하는 것 같다’, ‘듯싶다’ 등을 사용합니다.
추측할 뿐 단언하진 않죠.
한 번의 죽음으로 자존감과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반대로 앙리 마르소는 대부분 단호한 말을 사용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해도 자신만은 본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외침이, 비다 라바니뿐만 아니라 고훈에게도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고훈은 앙리에게서 자신의 과거뿐만 아니라, 자신이 바랐던 모습을 찾았고.
앙리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시상식에서 한 독백처럼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자아를 고훈을 만남으로써 형성하게 됩니다.
멋진 관계 아닌가요?
1부를 기점으로 고훈과 앙리 마르소의 내적 성장은 대부분 마무리되었습니다.
여전히 티격태격할 테지만 적어도 서로 길을 찾지 못했던 시기처럼 방황하진 않을 겁니다.
충분히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결국 이겨냈으니까요.
작품과 연결지어 보면.
고훈은 자신이 죽은 장소에서 얼어붙은 밀밭을 그리면서도 희망과 용기를 놓지 않았습니다(서리 밀밭).
부모님과 함께 놀러 가기로 한 동해바다에서 사고로 먼저 떠난 부모님을 그리워하면서도 끝내 작품으로 승화했죠(여름 너울).
앙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으로 다른 존재를 바라보았으며(그림자), 자신 안에 타인을 들여서 소통을 시도했습니다(앙리 마르소 002).
그런 두 사람이 서로 완벽히 이해하게 된 계기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출품한 <변치 않는 가치>였고.
그 결실이 <149,597,870.696㎞>와 <2년 8개월>이었습니다.
사실 두 천재의 작품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자니 어려움이 컸습니다.
대단하다고 서술만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정말 두 사람을 천재로 볼 수 있도록 <다시 태어난 반 고흐>를 연재하는 내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습니다.
천재가 아닌 제가 천재를 표현하려고 하니 무리도 아니죠.
해바라기의 관점에서 관객을 바라보는 <손님>, 그림을 찢고 찢어진 부분마저 꽃잎으로 표현한 <가면> 등 작중 고훈과 앙리가 만든 작품은 모두 제 머리카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고민의 과정을 고훈이 <총탄>을 그릴 때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고훈이 <총탄>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구도가 언급되었는데 제가 고민한 순서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149,597,870.696㎞>와 <2년 8개월>은 1부 마지막 작품이니만큼 정말 두 사람의 결과물을 멋지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149,597,870.696㎞>에 노을이 닿는 정도만 생각했지만,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구도는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또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한 끝에 노을이 떠나간 자리에 단풍이 지고.
단풍이 지난 자리에 노을이 다시 찾아오는 연속성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저 좀 장한 것 같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 <149,597,870.696㎞>와 <2년 8개월>이 단순히 얼마짜리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가격이 정해지게 되면 딱 그 정도의 가치로 다가갈 듯해서, 경매 이야기는 최대한 줄였습니다.
소년 만화에서 흔히 이뤄지는 파워 인플레이션처럼 작품이 더 비싸게 팔리고, 더욱더 비싸게 팔려 그전에 그린 작품의 가치가 절하되는 경우는 처음부터 배제했습니다.
때문에 <다시 태어난 반 고흐>의 이야기는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진행했습니다.
성공 신화가 아니라 함께하는 따뜻한 이야기죠.
그것은 빈센트 반 고흐의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해바라기가 되고 싶었던 반 고흐를 더 대단한 화가, 더 많은 돈을 버는 화가로만 표현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 힘든 사람과 어울리고 더 많은 사랑을 나누는 사람으로 그렸습니다.
가능한 많은 것을 사랑하자고 말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니까요.
2부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은 사람과 사랑을 나눌 예정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이 주신 과분한 사랑을 사랑으로 갚기 위해서 잠시만 준비 기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알림 설정 꼭꼭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8월 5일 오후 8시에 다시 인사드리길 약속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