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25화 (325/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25화

55. 화룡점정(30)

묘한 기분이다.

파리를 떠나 아를과 생레미,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이르기까지 내 앞에는 밀밭과 해바라기, 밤하늘과 별만이 있었다.

한때 열렬했던 고갱, 라파드, 로트렉 같은 옛벗들과 소원해지고.

그나마 안부를 나누던 집배원 조제프 룰랭은 멀리 마르세유로 떠나고.

나를 지탱해 준 이는 이따금 편지를 주고받았던 테오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얼떨떨해 있는 나보다도 더욱 기뻐하는 할아버지, 방태호, 장미래, 차시현, 비다 라바니, 블랑쉬 파브르, 미셸 플라티니, 아르센 르블랑.

그리고 분명 앙리도.

큰 상을 받은 사실보다 저들과 함께하고 있음이 행복하다.

“대단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적은 없었어요.”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서. 그릴 수밖에 없어서 캔버스 앞에만 있었어요.”

탄광촌에서 매일 죽어가는 이들을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빛이 있을 거라고.

주께서는 항상 이겨낼 수 있을 만큼만 시련을 주신다고 말했지만, 입에 발린 말이었을 뿐.

희망을 심어주진 못했다.

면직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을 잘린 사람에게 봉급 주기가 아깝다던 짐승에게 제대로 된 항의 한 번 하지 못했다.

주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목사가 되고자 했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보다 눈앞의 재물을 탐하고 교조화된 교회에 절망했다.

가난한 농부가 작은 촛불에 기대어 저녁을 먹을 때, 빵 하나 얹어주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캔버스에 담는 일뿐이었다.

이름 없이 사라지는 이들이 있음을 남기고 싶었다.

이들에게도 삶이 있고 이들도 사랑을 갈구한다고.

은혜로운 햇살에 감사하고.

땀 흘려 밭을 일구어 감자 한 알에도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렇게 소박한 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살았음을 남기고 싶었다.

대단한 일을 하려던 게 아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캔버스를 채울 때마다 제가 위로를 받더라고요.”

아무것도 아닌 내가 무엇인가를 만들어냈다는 만족감.

그 과정에서 스스로 돌아보고 성찰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랬을 뿐인데. 저를 이해해 주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분들이 없었더라면.”

아니.

이 기쁜 날에 부정적인 말을 꺼내지는 말자.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고마운 이들과 시선을 나누었다.

“그분들이 저를 알아봐 준 덕에. 여러분이 함께해 주신 덕에 지금은 정말 행복합니다.”

그래.

이미 큰 사랑을 받고 있지 않은가.

“오늘 이 상을 받은 것보다 제 그림이 많은 분께 위로가 되고 또 그분들이 제게 행복을 전해주셔서 기쁩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갈색 머리. 깊고 맑은 에메랄드빛 눈동자. 고집스러운 콧대와 다부진 입술을 굳게 닫은 남자가 서 있다.

“혼자서는 받지 못했을 것 같고요.”

<149,597,870.696㎞>는 <2년 8개월>을 만나 비로소 완전해졌다.

* * *

“대단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적은 없었어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낯선 감정의 정체를 오늘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열등감도 경쟁심도 아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서. 그릴 수밖에 없어서 캔버스 앞에만 있었어요.”

녀석은 나 앙리 마르소를 뒤흔들고 고작 만 3년도 안 되어 미술계 중심에 섰음에도 대단한 일을 생각지 않았다고 말한다.

빛나는 재능을 지니고도 자신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녀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그림뿐이었단 말도 거슬린다.

처음부터 맞지 않았던 거다.

세상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음에도 미술을 선택한 내가, 그림밖에 선택할 수 없었단 녀석을 인정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릴 수밖에 없다는 말에는 마음이 간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캔버스를 채울 때마다 제가 위로를 받더라고요.”

빈 캔버스처럼.

내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미술만이 가슴을 뛰게 했다.

무엇에도 무관심했던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바라는지 알게 했다.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만 점의 그림을 가슴에 담았고, 수천 점을 그려냈다.

아무것도 없던 가슴에 부셰와 렘브란트. 모네와 마네. 르누아르가. 반 고흐와 고갱이 들어설 때마다 만족감을 얻었고.

그들을 내 것으로 만듦으로써 나를 찾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가슴 속에 미술관을 세웠다. 가슴을 움직이는 작품을 모으고, 모았다.

가슴 속 미술관이 커질 때마다 그림 실력은 나아졌지만 갈증은 더해갔다.

가슴 속 미술관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실물을 내 손 안에 넣어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

작품을 모을수록 갈증은 더해졌다.

채워도 채워도 만족할 수 없었다.

틀이 없는 빈 곳에 그저 쑤셔 넣기만 할 뿐이니 채워질 리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저 녀석을 만났다.

“그랬을 뿐인데. 저를 이해해 주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분들이 없었더라면. 그분들이 저를 알아봐 준 덕에. 여러분이 함께해 주신 덕에 지금은 정말 행복합니다.”

수만 점의 그림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나를.

너만이 만족시켰다.

더하고 모으고 쌓을 뿐이었던 나의 미술관에 너가 깃들면서 비로소 어디가 비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내 미술관의 빈 곳을 비추는 네가 싫었다.

처음에는 그 감정이 열등감인 줄 알았다.

내게 없는 걸 가진 널 극복하고 싶었다. 너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 역겨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들이 우습게도 나를 완성했다.

비어 있는 줄조차 몰랐던 공간을 하나씩 채워나가자, 넣어도 넣어도 만족할 수 없었던 미술관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해도 찾을 수 없었던 나라는 존재를 그릴 수 있었다.

너를 가져야만 내가 온전해지기에 그때까지의 버릇대로 네 것을 모두 담으려 했다.

간절하게.

절실하게.

겨우 찾아낸 단서가 떠나갈 것만 같아서 절박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너를 잃을 뻔했다.

너의 <137년>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며, 2년 8개월을 돌이켜보며, 너의 <149,597,870.696㎞>를 담아내고 나서야 비로소.

내 안에 이미 네가 있음을 깨달았다.

내 빈 곳을 비추었던 것이, 나를 완전히 했던 것이 네 그림이 아니라 너였음을 알게 되었다.

녀석이 뒤돌아보고는 웃는다.

“혼자서는 받지 못했을 것 같고요.”

순진무구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같은 생각이라고 말한다.

* * *

[고훈, 2030 베네치아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

[20여 년 만의 쾌거!]

[고훈, “함께했기에 가능했다”]

[앙리 마르소, “당연한 결과. 야단 떨지 마라.”]

[한국‧프랑스 공동 전시관 최고 국가관으로 선정!]

[장미래, 은사자상의 영광을 쥐다]

[이변의 2030 베네치아 비엔날레]

8일. 2030 베네치아 비엔날레 시상식이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서 고훈이 앙리 마르소와 함께 황금사자상을 손에 넣었다.

개최 전부터 화제를 모은 한국‧프랑스 공동 전시관 역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데 이어 장미래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은사자상을 거머쥐었다.

미술계는 파격적이고 공정한 심사였다고 평한다.

심사위원을 맡은 에릭 다우어 휘트니 미술관 관장은 “본 전시(국제전)와 국가관을 구분하지 않고 심사에 임했다”며 “국가관의 의미가 흐려지는 가운데 아르세날레와 자르디니를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의견을 모았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시대착오적인 내셔널리즘으로 비판받아 온 베네치아 비엔날레 조직위원회는 시상식 뒤에 점차 국가관을 줄여나가고 대신 더 많은 작가에게 기회를 주리라 약속했다.

한편 황금사자상 개인 수상은 2009년 해송 고수열 화백 이후 21년 만의 일이다.

대단한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네. 아, 죄송합니다. 이미 선약이 잡혀 있어서. 다음 달은 어떠신가요.”

여기저기서 섭외 문의가 들어오는데, 덕분에 방태호는 전화기를 놓을 새도 없었다.

시상식 당일에 내 이름이 들어간 기사만 1,000개가 넘게 올라왔다고 하니 무리도 아니지.

두 달 동안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강단에도 서면서 바삐 보냈는데, 아무래도 올해는 계속 이럴 것 같다.

통화를 마친 방태호를 불렀다.

“아저씨.”

“응?”

“비엔날레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돼요?”

“어……. 잠깐만.”

방태호가 일정표를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행사 다니느라 작품 다 보지도 못했고. 149,597,870.696㎞랑 2년 8개월도 늦기 전에 한 번 더 보고 싶어요.”

“으음. 하긴. 때 놓치면 안 되는 작품이긴 하지. 아니, 이미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말이에요?”

“계절이 바뀌었으니까. 해가 이동하는 경로도 바뀌어서 예전처럼 딱 들어맞진 않을 것 같은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기상학자까지 섭외해서 각도와 높이를 조절했다고 했으니 그때의 은은함이 오래 갈 리 없다.

“흥.”

앙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날 뭘로 보는 거야.”

나도 방태호도 의아해서 고개를 기울이니 앙리가 책을 덮고 일어났다.

“갈 거면 다음 달에 가.”

다음 달이면 베네치아 비엔날레 막바지다.

“그럼 뭐가 달라져요?”

“완성된 걸 볼 수 있지.”

앙리가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2년 8개월>의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영문을 알 수 없어 방태호에게 답을 구했지만 그도 모르는 눈치다.

* * *

“다시 봐도 멋지네.”

“그러니까.”

김지우와 이인호가 석 달 만에 베네치아를 다시 찾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장소이기도 했으며.

김지우가 연재한 칼럼이 큰 호응을 얻어 출간 제의를 받은 터라 여행도 할 겸 자료 수집차 방문했다.

“비엔날레 끝나면 어떻게 되려나. 다른 전시로 활용하기는 힘들 텐데.”

이인호가 불한당 전시관을 훑어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방 대표님 말로는 그대로 둔다고 하더라고.”

“그래?”

“응. 비엔날레 조직위도 상징적인 작품으로 남기고 싶다고.”

“하긴. 이런 걸 철거하면 안 되지.”

두 사람이 <2년 8개월> 안으로 들어섰다.

차분히 감상하고자 늦은 시간에 찾기도 했고 행사 기간이 많이 지난 터라 내부는 제법 한산했다.

김지우는 고훈의 지하로 내려갔다.

노을을 조명 삼아 빛나는 <149,597,870.696㎞>이 여전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

그러나 8월 당시의 그 벅찬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아쉽다.”

“내년에 또 볼 수 있잖아.”

“어떻게 될지 모르지.”

1년에 1~2주 정도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니, 시기가 맞지 않으면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 듯했다.

그러나 그런 시간적 제약이 <149,597,870.696㎞>의 가치를 높이는 것 같기도 했다.

김지우는 미술계의 흐름을 뒤바꿔 놓은 두 작품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며 한동안 <149,597,870.696㎞>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머리에 무엇인가가 떨어진 것을 느꼈다.

“뭐지?”

“낙엽인데?”

이인호가 머리에 붙은 낙엽을 떼주었다.

“이게 어디서…….”

김지우가 단풍 낙엽을 들고 고개를 돌리자, 노을빛이 들어오던 창문을 통해 단풍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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