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70화 (32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70화

18. 볼 수 없는 걸 보여주는 사람(4)

식사 후.

피로와 포만감을 이기지 못한 고훈이 결국 쓰러져 잠들고 말았다.

“같이 보자고 하더니.”

손자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을 함께 보길 기대했던 고수열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손자를 안아 들었다. 침대에 눕히고 방을 나선 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놈의 고집이 그리 센지.”

“흐흫. 선생님하고 똑 닮았어요.”

“끄응.”

장미래가 테이블을 정리하며 물었다.

“훈이 콘셉트 아트 그리기 힘들 텐데. 괜찮을까요?”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 남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별개의 일이었다.

더군다나 고증을 기반으로 한 사실적인 묘사가 필요한 콘셉트 아트는 고훈이 그려온 그림과 방향부터 달랐다.

“안 해보고 판단할 순 없지요.”

고수열이 은근히 미소 짓는 장미래를 의아히 보았다.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 뜻을 비치자 장미래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해성 선배 때는 반대하셨다고 알고 있어서요.”

고수열이 그릇을 챙기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내를 일찍 보내고 키운 하나밖에 없는 아들 고해성.

한국화의 지평을 연 대가 고수열도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는 처음이었다.

좋은 걸 보여주고, 맛있는 걸 먹이고, 비싼 옷을 입히는 것만 생각했지 아들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함께하면 좋은지 몰랐다.

고해성이 자아를 확립할수록 두 사람의 갈등은 심해지기만 했다.

“영화라서 반대한 게 아니었어요.”

고수열에게 미술과 관련한 일은 모두 동등했다.

회화, 공예, 시각 디자인, 산업 디자인, 애니메이션, 서예 등 그 각자의 필요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자신의 꿈과 함께해 주길 바랐다.

재능 있는 아들이 그저 자신의 뜻을 이어받아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저 내 욕심이었죠.”

한국 미술은 오랜 세월 추상과 단색화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식을 갖춘 이들만 이해할 수 있는 작품만 쏟아지던 시기가 있었다.

작품의 가치와 의의를 떠나서.

그러한 경향은 미술이 대중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고수열은 그 과정을 보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80년대.

민중 미술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추상은 다시 구상으로 넘어왔다.

그 흐름의 중심에 고수열이 있었다.

그는 모더니즘의 엘리트 중심적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순수 미술과 대중 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데 크게 힘썼다.

고수열을 비롯한 여러 뜻 있는 화가들로 인해 한국 미술계는 이미 서구권에서는 낡은 사상이었던 모더니즘을 버리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미술이 시작할 수 있었다.

스승의 그러한 업적을 잘 알고 있는 장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고수열과 고해성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다른 방법을 취했을 뿐이었다.

고수열은 순수 미술이 대중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고해성은 대중 미술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대화가 없었어요. 나중에는 일어났냐, 밥은 먹었냐는 말도 안 했으니.”

아주 작은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는 대화가 단절되었기 때문.

살갑지 못했던 두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데 서툴렀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통하는 게 있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흘러간 세월이 차곡차곡 쌓여 두 사람 사이에 큰 절벽을 이룬 것이었다.

고수열은 아들과 크게 싸우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아들이 죽고 난 뒤에야 후회했다.

“훈이 정말 행복해 보여요.”

장미래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도요.”

스승을 걱정해 가끔 찾아왔던 그녀는 두 사람이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곤 안심할 수 있었다.

그 마음을 눈치채고 있던 고수열이 슬며시 웃었다.

“매일매일 얼마나 행복한지. 글쎄, 그새 친구를 사귄 모양이에요.”

“정말요?”

“그렇다니까. 놀러 오라고 해도 되냐고 하더라고요. 껄껄.”

손자가 친구 한 명 사귄 일마저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고수열은 행복했다.

그림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날에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을 나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느끼고 있었다.

* * *

점심시간.

카레 우동을 먹어보려고 했는데 오늘은 안 하는 모양이다.

능이버섯삼계탕과 닭죽, 섞박지로 구성된 한식을 먹느냐.

오므라이스, 치킨 가라아게, 무 피클로 구성된 일식을 먹느냐를 두고 고민이 깊어진다.

“왜 안 골라?”

차시현이 속 모르는 질문을 했다.

“신중해야 해. 오늘 하루의 기분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이야.”

능이버섯삼계탕이란 건 대체 무슨 맛일까.

일반 삼계탕은 먹어봤지만 능이버섯이란 것은 처음 보는 식재료다.

맛있을까.

이름과 사진만 놓고 보기에는 오므라이스가 무척 끌린다.

“나 먼저 고른다.”

차시현이 특식을 골랐다.

“아.”

예상치 못한 선택이다.

확실히 핫도그와 웨지감자, 치킨 샐러드 조합도 궁금하다.

“그건 무슨 맛이야?”

“핫도그 맛.”

이 녀석은 음식 선택에 조금도 도움 되지 않는다.

오랜 고민 끝에 삼계탕을 골랐다.

언뜻 심심한 음식처럼 보이지만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굳이 찾아서 먹어보진 않을 것 같다.

음식을 받아 자리에 앉으니 차시현이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정말 괜찮아?”

“용기가 없으면 새로운 경험을 못 하는 법이야.”

닭 한 마리를 통째로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능이버섯이라는 것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었다.

이 큰 녀석을 어디서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된다.

젓가락질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상당히 힘겨운 식사가 될 것이다.

“……맞아.”

차시현이 제법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여 내 말에 동의했다.

일단은 살점을 조금 떼어 입에 넣었다.

“…….”

역시나.

예전에 먹었던 삼계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닭 육질이 제법 부드럽긴 하지만 굽거나 튀기는 조리 방식에 비하면 심심한 맛이다.

아쉽다.

이번에는 닭죽으로 손을 뻗었다.

할아버지 음식처럼 짜지 않았으면 싶다. 그렇다고 너무 심심하면 오늘 점심이 무척 슬퍼질 터.

적당한 간이 되어 있길 바라며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혀를 한 번 움직이곤 실망했으나.

두 번 움직일 땐 예상치 못한 깊은 맛에 눈을 뜨게 되었다.

세 번 움직이자 근원을 알 수 없는 은은한 풍미와 함께 혀끝에 감칠맛이 감돌았다.

이것이 능이버섯삼계탕인가.

삼키고 나니 몸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따뜻해진다.

어디.

이번에는 국물을 마셔볼 차례.

뜨거운 김을 후후 불어 조심스레 대하자 어머니의 온기가 떠올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묵직한 향 뒤로 기름지면서도 말간 국물이 입안을 감싸 안는다.

이 무슨 포용력이란 말인가.

거듭 한 술 떠먹으니 피로한 몸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나 해볼래.”

능이버섯삼계탕의 축복에 감격하고 있을 때 차시현이 굳은 결의를 보였다.

녀석도 처음 먹어보는 음식에 도전하는 것 같다. 다부지게 한 입 크게 물더니 씩씩하게 씹는다.

“맛있어?”

“그냥.”

삼계탕을 선택하길 잘했다.

“한두 번 실패한다고 실망하면 안 돼.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다 보면 분명 얻는 게 있을 거야.”

“응. 처음부터 잘 그릴 거라곤 생각 안 해.”

“…….”

그림 이야기였나.

“근데 어제.”

머쓱한 마음에 닭죽을 퍼먹는데 차시현이 어제 대화를 언급했다.

“내 그림 따라 해본다고 했잖아.”

“그랬지.”

“너 그림 되게 잘 그리는 거 아니야? 왜 내 걸 따라 해?”

“좋아 보였으니까.”

차시현이 눈을 깜빡인다.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한 눈치다.

“네 파란 나무가 좋아서 배우고 싶었을 뿐이야.”

“……모르겠어.”

“잘 그리는 건 중요하지 않아. 좋아하는 걸 그리고 멋진 기법을 따라 하다 보면 기술은 자연스럽게 늘어.”

“따라 하면 안 되잖아?”

“똑같이 그리면 안 되지.”

차시현이 눈을 빛냈다.

“그래도 난 그림 못 그리잖아. 네가 뭘 배우려는 건지 모르겠어.”

예시가 필요하겠다.

“난 조속, 피카소, 로트렉, 할아버지 그림을 좋아해.”

차시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 사람들 그림도 따라 했어?”

“물론이지.”

끈적해진 입 주변을 닦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조속은 숙조도란 그림을 그렸는데, 그걸 보기 전까지 난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그렇게 귀여운지 몰랐어.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낀 거지.”

차시현이 스마트폰을 펼쳐 숙조도를 검색해 보았다.

“네 파란 나무도 그래. 네 그림을 보기 전에는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다.

“머릿속에 없던 걸 본 거야. 네 그림을 본 뒤에야 아, 내가 파란 나무를 좋아하는구나 싶었던 거지.”

“응.”

“그림을 보는 건 그 화가만의 세계를 엿보는 일이야. 반대로 그림을 그리는 건 자기를 표현하는 거고. 거기에 훌륭하고 부족한 건 없어.”

사상과 감성에 어떻게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림은 그저 서로 다른 생각과 시각,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는 대화다.

문자로는 할 수 없는 영역을 다루는 또 하나의 대화 방법.

“그러니까 나도 네 그림에서 배울 게 있는 거야.”

국물을 몇 번 삼키고.

닭죽으로 몸을 달랜 뒤 섞박지를 씹으니 아삭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에 생동감이 넘친다.

‘이런 조합이구나.’

은은하고 깊은 풍미가 있지만 다소 심심했던 맛이 섞박지와 함께하니 이렇게나 즐겁다.

이 음식 조합을 만든 사람에게는 상을 내려야 한다.

* * *

오후 특별 수업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오니 차시현이 양쪽 가방끈을 붙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끝나자마자 바로 왔는데 어지간히도 서둘렀나 보다.

“가자.”

“응.”

건물 밖으로 나섰다.

처음 보는 남자가 걸어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차시현네 사람인 듯하다.

계급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예전 귀족 가문에 고용되었던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게 행동한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니 내게도 묵례하여 예의를 지킨다.

“어제 말씀드렸던 애예요.”

“네. 대표님께서 인사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훈아.”

할아버지가 나를 발견하시곤 다가오셨다.

남자가 할아버지께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학장님. EI제당 대표이사 비서 정진호입니다. 대표님께서 초대에 감사드린다며 보내셨습니다.”

정진호가 종이 가방을 들어 보였다.

할아버지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친구끼리 노는데 선물은 무슨. 마음은 고맙게 받겠다고 전해드려요.”

“받아주십시오.”

정진호가 한 번 더 정중히 말하자 할아버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다음부턴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 네가 훈이 친구구나.”

“안녕하세요. 차시현입니다.”

차시현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이상한 아이지만 가정 교육이 엄격한 탓인지 아는 것도 많고 예절도 차린다.

“그래. 그래. 아이고 이쁘게 생겼네.”

할아버지도 마음에 드시는 것 같다.

“5시까지 모시러 가겠습니다.”

“……네.”

고작 세 시간밖에 못 논다고 생각해서인지 차시현이 시무룩하게 답했다.

“왜. 좀 더 놀게 해주시지. 저녁은 잘 먹일 테니 걱정 말아요.”

할아버지의 말씀에 얼굴이 금방 밝아진다.

정진호가 고민하더니 차시현의 간절한 표정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께 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할아버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이 무딘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보며 눈을 빛내는 걸 보니 영락없는 아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