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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69화 (322/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69화

18. 볼 수 없는 걸 보여주는 사람(3)

부끄럼을 많이 타는 모양이다.

딱히 누가 들었을 리 없지만, 고개를 끄덕여 당황한 차시현을 안심시켰다.

녀석이 입술을 내밀고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말하면 안 돼.”

“그래.”

어린아이에게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을 테니 굳이 건드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아이는 나를 못 믿는 눈치다.

“……뭘 원해?”

“뭘?”

“말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필기 파일 줄게.”

“그런 거 없어도 말 안 해.”

“거짓말.”

의심하는 걸 보니 그림 그리는 걸 어지간히 숨기고 싶거나 타인을 못 믿는 듯하다.

“정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기에 흔들어 재촉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손가락을 걸었다.

어떤 애플리케이션을 썼는지 다시 물어보고 싶지만 그마저도 이 아이한테는 당황스러운 질문일 듯해 숟가락을 들었다.

이 오묘한 냄새가 나는 수프가 무슨 맛일지 느낄 차례다.

달래된장찌개를 입에 넣었다.

생기 넘치는 알싸한 맛 아래 정체를 알 수 없는 묵직함이 느껴진다.

생전 처음 맛본 된장찌개가 썩 유쾌하진 않다.

소불고기로 입가심을 하려던 차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드니 차시현이 뾰로통한 얼굴로 보고 있다.

의심 많은 아이다.

“걱정 마. 약속했잖아.”

거듭 안심시키고 소불고기를 집었다.

“……미술 교육용 앱 썼어.”

미술 시간에 쓰는 애플리케이션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아직 수업을 받지 않아서 써본 적은 없다.

여러 붓을 쓸 수 있는 걸 보면 허투루 만들진 않은 것 같다.

“안 써 봤는데 기능이 많나 봐.”

차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파란 나무 그릴 때 썼던 브러시 이름이 뭐야?”

“그냥. 수채로.”

특별한 설정을 맞췄거나 효과가 있는 붓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도 않은 모양.

둥글고 뾰족한 붓으로 찍어낸 듯한 느낌이었으니, 기본 붓으로 하려면 시간과 공이 제법 들었을 거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저장하지 않고 지우다니.

“그건 왜 물어봐?”

“기법이 재밌어서. 따라 해볼까 싶었지.”

차시현이 눈을 깜빡였다.

“태블릿으로도 그려?”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몸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왜? 캔버스에 그릴 수 있잖아.”

“캔버스에 그리는 거랑은 다르지.”

종이 질감과 물감의 농도를 직접 느끼며 캔버스에 직접 그리는 것과 여러 효과를 사용하며 태블릿에 그리는 것이 같을 수 없다.

차시현이 자세를 고쳐 앉더니 입술을 곰지락댄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참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들릴 듯 말 듯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물었다.

“캔버스에 그리면 어떤 기분이야?”

그림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직접 그려본 적 없는 듯.

공들여 그린 그림을 지운다든가, 캔버스를 써본 적 없다든가 이상한 아이다.

“직접 그려보면 되잖아.”

“…….”

차시현이 고개를 숙였다.

저 작은 아이의 어깨가 축 처진 걸 보니 마음이 다 안쓰럽다.

혹시 집이 가난해서 그림을 그릴 형편이 못 되나 싶기도 했지만, 이내 이 학교의 1년 학비가 떠올랐다.

그럴 리 없다.

뭔가 사정이 따로 있겠지.

“그려볼래? 내 거 빌려줄게.”

안타까운 마음에 제안하니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반가워하는 표정이 이내 식는다.

“아니.”

“왜? 그리고 싶은 거 아니야?”

“……아버지가 싫어하셔.”

교육 방침 문제였구만.

예나 지금이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부모의 반대에 많이 부딪힌다.

부모로서는 자식이 잘 살아가길 바라는데, 화가는 그렇게 살아가는 경우가 몹시 적다.

테오에게 빌붙어 살았던 나로서는 부모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있을까.

“놀러 와. 내 할아버지 집에서 그리면 모르실 거야.”

“정말? 그래도 돼?”

“응. 오늘 여쭤볼게.”

눈을 빛내는 모습이.

이제야 아이답다.

* * *

“다녀왔습니다.”

고훈이 힘없이 차에 올라탔다.

“쯧쯧. 밤을 홀딱 새니 몸이 버텨?”

“정말 이젠 한계예요.”

고수열이 반쯤 눈을 감은 채 안전벨트를 메는 손자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집에 가서 일단 푹 자자.”

“네.”

차를 몰기 시작한 고수열은 신호를 받고 고개를 돌렸다.

꾸벅꾸벅 졸던 고훈이 문득 눈을 떴다.

“아, 할아버지.”

“음?”

“내일 친구 놀러 오라고 해도 돼요? 집에요.”

“친구? 친구 사귀었어?”

“네. 차시현이라고 같은 반이에요.”

“시현? 여자애야?”

“남자요. 그림 그리고 싶은 것 같아서 같이 놀려고요.”

반 친구 이야기라고는 이상한 애들이다, 가정 교육이 이상하다 등 투덜대기만 하던 손자가 친구를 사귀었다고 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좋지. 그런 건 할아버지한테 안 물어봐도 돼.”

“네.”

“어떻게 친해졌어?”

“친하진 않아요. 오늘 처음 이야기했어요.”

“그래도 같이 놀기로 했으면 마음에 든 거 아니야?”

고훈이 졸음을 이겨내기 위해 눈을 비볐다.

“그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집에서 못 그리게 하나 봐요. 캔버스에 그려본 적 없다고 해서 불렀어요.”

“취미 삼아 그리면 좋을 텐데 엄한 집안인가 보구나.”

“그러니까요.”

스트레스와 욕구를 푸는 여러 방법 중에서 그림은 퍽 건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에겐 이해할 수 없는 교육 지침이었다.

“그림 그리고 싶으면 놀러 오라고 해. 부담 갖지 말고.”

“그럴게요.”

고훈이 늘어지게 하품했다.

“흐흐. 그렇게 재밌었어?”

“네. 그런 소설은 처음이었어요.”

흥미를 자극하는 장르 소설은 처음 접한 고훈으로서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 <기암성>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체감하기로 불과 1년 전에는 <기암성>의 배경과 비슷한 시대에서 살았기 때문에 몰입도 잘 되었다.

“어렵진 않았고?”

아르센 뤼팽 시리즈가 정통 추리 소설과 달리 활극 형태를 띤 소설이긴 하지만 아이가 이해하기엔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네. 구도가 재밌었어요. 이지도르, 가니마르, 헐록 숌즈 중에 누가 뤼팽을 잡을지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고수열이 오래전에 읽은 원작 소설을 떠올렸다.

괴도 뤼팽을 잡기 위해.

천재 소년 이지도르 보트를레, 노련한 형사 쥐스탱 가니마르, 영국 탐정 헐록 숌즈가 경쟁하는 이야기였다.

“세 사람 다 특출했어요. 결국 이지도르가 앞섰지만 가니마르와 헐록 숌즈가 없었다면 뤼팽을 찾지 못했을 거예요.”

고훈의 설명에 고수열이 의아해했다.

“헐록 숌즈가 큰 역할을 했어?”

“네. 결국엔 그의 추론이 옳았단 게 밝혀지더라고요.”

“흠.”

모리스 르블랑의 <기암성>은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에서도 특히나 사랑받는 작품인 동시에.

셜록 홈즈의 팬들에게는 모욕적인 작품이기도 했다.

영국 소설가 코난 도일이 창조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탐정 셜록 홈즈를 모티브로 한 ‘헐록 숌즈’가 민폐 덩어리로 표현된 탓이었다.

덕분에 원작 소설을 마지막까지 읽은 사람들은 마지막 반전에 놀라는 한편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노먼 감독이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구나.”

“뭘요?”

“원작에서는 헐록 숌즈는 무능하게 그려지거든.”

영국의 저명한 탐정 헐록 숌즈는 뤼팽을 잡기 위해 프랑스로 오자마자 그에게 납치되었다.

이후에는 뤼팽을 잡기 위해 그의 나이 든 유모를 인질로 잡았고, 끝내 뤼팽의 연인 레이몽드를 죽였다.

작품 안에서의 선악을 논하기 이전에 우스꽝스럽고 무능하며 정의롭지 못한 인물로 그려졌다.

“몰랐어요.”

그러나 크리스틴 노먼의 각본에서는 헐록 숌즈는 모티브 ‘셜록 홈즈’와 같이 명석하고 매력적인 소시오패스로 그려졌다.

<기암성>의 선 굵은 스토리라인과 반전, 그리고 아쉬움을 채우면서도 셜록 홈즈의 팬들을 위한 각색이었다.

“영화가 나오면 꼭 봐야겠구나.”

고수열의 말에 고훈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를 직접 볼 수 있다면 퍽 즐거운 경험이 되리라 확신했다.

“이거 해볼래요.”

고훈의 말에 고수열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하고 싶은 일은 뭐든 해봐야지.”

그날 저녁.

집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진 고훈이 피자 냄새에 눈을 떴다.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온 고훈이 장미래와 피자를 반겼다.

“오셨어요.”

“잤어?”

“네.”

고훈이 건네받은 피자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선생님, 식사하세요.”

“고마워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고훈은 잠이 충분치 않은 탓에 고개를 꾸벅이며 피자를 먹었다.

장미래가 웃으며 물었다.

“밤에 못 잤어?”

“네. 각본 읽느라.”

“각본?”

장미래가 고개를 갸웃했다.

“노먼 감독이 콘셉트 아트 의뢰를 했어요.”

고수열의 설명에 장미래가 크게 놀랐다.

심심하면 월드 와이드 박스 오피스 10억 달러를 달성하는 크리스틴 노먼 감독이 고훈에게 일을 의뢰한 것도 놀라웠고.

그것을 고수열이 받아들인 것도 믿을 수 없었다.

“하기로 한 거예요?”

“훈이가 하고 싶다고 하니, 이제 이야기해 봐야죠. 허허. 이 녀석아, 코 박겠다.”

장미래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훈을 깨우는 스승이 달라 보였다.

아들 고해성과 싸우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진로 문제였다.

대중적인 미술을 지향했던 고해성은 맥스 스튜디오를 비롯해 영화, 게임 등 멀티미디어 분야에서 활동했고.

아들이 침체 된 회화계를 부흥시키길 바랐던 고수열은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결국에는 서로 연락을 하지 않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할아버지도 좀 드세요.”

“먹고 있어. 자, 김치도 좀 먹고.”

“피자에 김치는 좀 아닌 것 같아요.”

“건강에 좋아.”

“피자도 건강에 좋아요. 피망이랑 양파도 있잖아요.”

“골고루 먹어야지. 맨날 피자만 먹으면 몸 나빠져.”

“3일 만인데.”

장미래는 서로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화하는 고수열과 고훈을 보며 작게 안도했다.

‘달라지셨어.’

동료, 학생에게는 한없이 인자했던 고수열은 아들에게만큼은 유독 엄격했다.

당신이 이루려는 꿈을 함께해 주길 바랐던 마음이 너무나 굳건하여 부자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후회하신 걸까.’

그러나 손자와 함께 살면서 그도 조금씩 변화했다.

고훈이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했고, 손자가 관심 있는 영역은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돕고 나섰다.

“너무 짜단 말이에요!”

“그럼 김치가 짜지, 달아?”

장미래는 고수열의 그런 변화가 아들과 소원해지고 난 뒤의 후회와 가슴에 담아둔 말조차 풀어내지 못하고 사별했단 자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만든 김치는 정말 너무 짜요.”

“그럼 어제 산 갓김치 먹을래?”

“그건 맛있어요?”

“그럼.”

장미래는 김치를 먹는 걸 가지고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다가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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