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67화
18. 볼 수 없는 걸 보여주는 사람(1)
“콘셉트 아트를 의뢰하시는 겁니까?”
방태호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콘셉트 아트라는 말은 처음 듣지만 단어 뜻으로 유추하면 개념 그림 또는 관념 그림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고훈 군의 그림을 쭉 살펴봤어요.”
크리스틴 노먼은 방태호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19세기 세기말의 분위기를 내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받았죠. 이 작품과 어울린다고 판단했고요.”
노먼이 가볍게 깍지를 꼈다.
“아르센 뤼팽 읽어 봤어요?”
“아니요.”
“모리스 르블랑이란 작가가 1909년에 쓴 소설이에요. 이건 그 시리즈 중에서 기암성이란 작품을 기반한 각본이고요.”
내가 죽고 20년쯤 뒤에 나온 소설이다.
모리스 르블랑,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을 보아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듯하다.
“난 이 작품을 읽으면 클로드 모네가 떠올라요. 뤼팽의 활동 지역이 루앙이었거든요.”
<인상, 해돋이>를 시작으로 인상주의를 널리 알린 클로드 모네.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가 그렸던 <루앙 대성당>을 본 적 있다.
시간이 없던 탓에 로트렉을 위주로 봤지만 모네의 작품을 놓칠 순 없어 잠시 눈에 담기라도 했었다.
노먼이 스마트폰을 펼쳐 그림 한 점을 띄웠다.
해가 뜨는 시기의 해안 절벽이다.
바람과 물결에 빛을 담아낸 걸 보니 영락없이 클로드 모네의 작품이다.
‘……아니야.’
시간이 오래 흐른 걸 감안하면 내 그림처럼 변색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또 이때 사용했던 붉은 계열 물감은 그 색상을 잃기 쉬웠다.
내 <붉은 포도밭>도 그랬으니까.
해수면에 듬성듬성 남아 있는 붉은색이 원래 훨씬 많았다면 해가 지고 있는 광경일지도 모르겠다.
자세히 보니 구름 형태와 바람의 흐름.
해 주변이 어둡게 표현된 것이 일몰이라고 봐야겠다.
‘역시 클로드 모네.’
검게 그린 해안 절벽에서 기괴함이 느껴진다.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이란 그림이에요. 기암성의 배경이죠.”1)
소설 기암성의 배경이 된 장소라.
읽어 보진 않았지만 이 그림만 봐도 어떤 분위기인지 알 것 같다.
에트르타 절벽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이 그림을 통해 소설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영상을 다루는 영화에서 굳이 그림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막 물어보려던 차.
크리스틴 노먼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콘셉트 아트는 영화를 만들기 전의 지침 같은 거예요. 이미지를 선명히 해서 촬영할 때 참고가 되죠.”
문학을 이 세상에 끄집어내는 일을 부탁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 것 같다.
“잠시만.”
방태호가 나섰다.
“훈이 그림이 그 시절 화가의 느낌을 풍기긴 하지만 훈이는 콘셉트 아트를 그려본 적 없습니다.”
사실이다.
“더군다나 고증이 중요한 작업인데 훈이는 아직 어리고요.”
하지만 고증이라면 지금 숨 쉬는 사람 중에선 가장 자신 있다.
그 시절을 살아 본 유일한 사람이니까.
문제는 내가 이런 작업을 해본 적 없고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아직 명확히 모른다는 점이다.
크리스틴 노먼이 나와 방태호를 번갈아보았다.
“방태호 큐레이터께서 고훈 군의 대변인 역할도 맡고 계신가요?”
“아뇨. 아직은 아니지만.”
“아직?”
“앞으로 함께할 사이예요.”
방태호 대신 답했다.
노먼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관심이 있는 만큼 직접 대화하는 게 빠르겠다 싶어 질문을 던졌다.
“이 소설을 읽고 그림을 그려달라는 말씀이죠?”
“맞아요.”
“고증은 얼마든지 반영할 수 있어요. 부족한 게 있으면 배우면 되죠.”
노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전 이걸 왜 필요로 하는지 이해 못 했어요. 감독도 생각해 둔 이미지가 있을 텐데.”
소설을 영상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나름의 형상이 있을 거다.
주인공은 어떻게 생겼을 것이며 배경은 어떤 모습일지 말이다.
“맞아요. 내 머릿속에 있는 걸 표현해 줄 사람을 찾고 있어요.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단다. 콘셉트 아티스트는 감독의 이미지를 형상화해 주는 일을 하는 거야.”
할아버지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흠.’
해보지 않은 일이고.
처음 받는 그림 의뢰라 관심이 가기도 한다.
내 경험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시대와 장소를 배경으로 한 터라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되도록 해보고 싶다.
“한 번도 안 해본 일이라 답은 못 하겠어요. 감독도 아마 저만 생각해 두고 있진 않으실 테고요.”
노먼이 씩 웃었다.
“맞아요. 그래서 대본을 읽고 마음에 들면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어요.”
“그런 이야기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네요. 읽어 볼게요.”
흔쾌히 수락했다.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의견을 내놓지 않던 할아버지가 나섰다.
“어린아이에게 일을 맡기는 게 부담스러울 텐데, 어찌 생각하셨습니까?”
나도 궁금했던 점이다.
내 그림을 봤다고 해도 정해진 일정과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일을 아이에게 맡길 수 있는 결단력이 신기하다.
“나이가 중요한가요. 능력만 있다면 누구와도 일할 수 있죠.”
노먼의 목소리와 시선은 확고했다.
자기 눈과 감에 확신을 가지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태도다.
“학교나 다른 일정 때문에 해외에 오래 나가 있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그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두셨습니까.”
“네. 처음에야 며칠 정도 같이 있어야겠지만 나중에는 통화로도 가능할 거예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확인하고 싶으셨던 듯하다.
“그럼 읽어 보고 연락드릴게요.”
“마음에 들 거예요.”
크리스틴 노먼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묻어나온다.
강한 어투는 아니지만 마치 반드시 마음에 들 거다, 재미없을 리 없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겠지만 보통 자신감이 아니다.
21세기 최고의 거장이라고 했던가.
시선 하나, 손짓 하나마저도 당당하여 묘하게 믿음이 간다.
확실히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녀가 내민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 * *
배움 미술관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귀가했다.
뜨거운 물로 씻고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노먼 감독이 준 <기암성>을 읽어 보려는데 할아버지가 따뜻한 우유를 가져다주셨다.
“읽어 보려고?”
“네.”
“그 일 하는 시간에 그림 그려서 팔면 돈 훨씬 많이 벌 텐데?”
마음에 없는 말씀을 하신다.
“그림 그리는 이유가 돈 때문은 아니니까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돈이 필요한 거지 그 반대는 결코 아니다.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곤 앉으셨다.
“그래. 돈에 연연할 시기는 지났으니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이번 전시회가 정말 크게 도움되었다.
경매에 올린 다섯 작품 중에 세 점이 낙찰되었다.
정가를 매긴 작품 중에서는 열네 점 중 열두 점이 팔렸고 수수료를 제하면 114억 원에 달한다.
세금으로 20퍼센트를 내면 법인에 남는 돈이 91억 2,000만 원 정도.
작년 수입과 합하면 100억 원이 훌쩍 넘는다.
평생 돈 걱정 안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게 소원이었거늘.
그것이 이루어진 지금 돈에 연연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유찰된 그림이나 팔리지 않은 그림도 배움 미술관에 빌려주는 것으로 또 수입이 생기니까.
“할아버진 자야겠다. 내일 학교 가야 하니 너무 늦게 자진 말고.”
“네. 안녕히 주무세요.”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고 첫 페이지를 넘겼다.
늦은 밤 갑자기 난 소리에 놀란 두 여성 레이몽드와 수잔느가 저택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러다 한 남자와 마주치고.
동시에 쓰러져 있는 수잔느의 부친 제스브르 백작과 비서 쟝 다발을 발견한다.
백작은 살아 있지만 비서는 처참하게 죽었다.
‘애들이 볼 이야기는 아니네.’
어깨를 으쓱이고 글을 읽어내렸다.
레이몽드가 장총을 꺼내 도망가는 남자를 쏘아 맞혔다.
‘사격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그 시절 장총을 잘 다룰 줄 아는 여성이라면 집안이 부유한 것을 넘어서 본인이 무척 활동적이고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소설이지만.’
하지만 총에 맞은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차꾼이 쓰는 모자 하나가 남았을 뿐이다.
원한 때문에 의한 살인도 아니고, 무엇을 훔쳐 갔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흥미롭다.
소설이 아니고 상황 지문과 간단한 해설, 대사뿐인 각본이기도 하지만 내가 읽던 문학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처음부터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의 동기도 모른 채 단서는 모자 하나뿐.
이야기가 대체 어떻게 풀릴지 의문이었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모자 상점에서 그 모자를 산 인물이 누구인지, 범인이 도주할 수 있는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등 여러 방식으로 수사를 해나갔다.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일인지라 점차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때론 안타까워하고.
또 아르센 뤼팽에게 분노하기도 하며, 이지도르 브트를레라는 천재 탐정 소년을 응원하고 연민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새고 말았다.
재밌다.
‘이런 소설이 나왔구나.’
문학도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고작해야 내가 죽은 뒤 20년이 흘렀을 뿐인데 이렇게나 흥미로운 소재를 다뤘다니 믿을 수 없다.
삶과 죽음, 명예, 죄악을 다루던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면서도 가슴 뛰는 이야기다.
내가 살던 시기랑 비슷하여 공감하는 부분이 많으면서도, 전자 벨이 언급되었을 땐 깜짝 놀라기도 한다.
이때 이미 귀족들은 그런 걸 사용했던 모양.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를 그릴 수야 있겠지만 조사와 공부 없이 그릴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일을 하는 것이 무척 기대된다.
설렌다.
이것이 영상이 되어 정말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 또한 얼마나 큰 즐거움일지.
오늘 학교 다녀온 뒤에는 이 이야기를 상상하며 그려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나려는데 할아버지가 거실로 나오셨다.
“아이고 이 녀석아. 날을 샌 거야?”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 자면 어떡해. 안 졸려?”
“너무 재밌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쯧쯧쯧. 큰일 나. 큰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건강해지지.”
맞는 말씀이지만 오늘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
* * *
1)에트르타 절벽의 일몰, 클로드 모네, 1883, 캔버스에 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