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66화
17. 첫 의뢰(5)
무슨 일로 보자는 건지 짐작할 수 없다.
“무슨 일인가?”
“부탁할 게 있다고 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고 싶다고 합니다.”
방태호가 스마트폰으로 이메일을 보여주었다.
배움 미술관 계정으로 보낸 크리스틴 노먼 감독의 편지는 상당히 정중하고 교양 있었다.
함께 본 할아버지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나쁘지 않겠지. 내일 오후 괜찮다면 차 한 잔 나누자고 해주게. 훈이 학교 다녀온 뒤에.”
“네. 그리고.”
“아무렴. 함께해야지.”
할아버지의 말씀에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집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테이토 피자가 도착했다.
손을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한 입 크게 물었다.
“할아버지.”
“음?”
“오늘 일 어떻게 생각하세요?”
할아버지가 아주 잠시 망설였다.
“좋지.”
본심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아마 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으신 듯하다.
“전 당황스러워요.”
할아버지가 갈릭 소스를 짜주었다.
“계속 해보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솔직한 마음을 꺼냈다.
“비싸게 팔려서 좋아요. 재료 걱정 안 해도 되고, 먹고 살 걱정 안 해도 되니까.”
들고 있던 피자를 내려놓았다.
“그림도 사람들이 더 많이 봐주면 좋겠어요. 제 그림이 유치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공감하는 그림이 뭐가 나쁘냐고 증명해 보이고 싶고. 제 그림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더 많이 대화하고 싶어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건 아니에요.”
잘못되었다.
그림 한 점에 163억 원.
초등학생이 한 말이지만 1억 원이면 뛰어난 사람을 1년간 고용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내 그림에 그 사람이 163년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금액만 한 가치가 있을까?
할아버지도 피자를 내려놓았다.
잠시 간격을 두시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우리 훈이 똘똘하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말하마.”
“네.”
“우선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는 짚고 넘어가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술 하는 사람 중에 착각하는 부류가 있어. 바로 저들이 예술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경우야.”
좀 더 들어봐야 이해할 수 있겠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예술을 한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단다. 난 화가지 예술가가 아니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되.
예술가는 아니라는 말씀에서 조금씩 할아버지가 무엇을 말하고 싶으신지 알 것 같다.
“훈이는 예술을 누가 만든다고 생각하니?”
“관람객이요.”
할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작게 웃었다.
“할아버지 생각도 그래. 예술은 화가나 평론가가 아니라 그걸 느끼는 사람이 정하는 거야.”
할아버지와 동시에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앙리 마르소가 내 그림을 사고 싶다고 했을 때 거절했던 일 기억해?”
“네.”
처음에는 그가 싫어서 팔지 않았나 싶었지만, 할아버지는 그 명성에 비해 함께한 지난 9개월간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않았다.
앙리 마르소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그 망나니가 싫기도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단다.”
할아버지가 콜라로 목을 축였다.
“젊었을 땐 그저 좋았지. 돈 많은 사람들이 내 그림에 미쳐서 수십억이고 수백억이고 가져다주었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그때 그렸던 그림이 도무지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없더구나.”
아마.
수집가들이 자기 집에 꽁꽁 감춰두고 있을 터다.
혹은 과거처럼 그림이 투기나 탈세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권력과 돈을 가진 이들에게 그림은 부피가 작은 돈일 뿐이니까.
“명성은 높아졌고, 내 그림을 사고 싶은 사람은 더 많은 돈을 준다고 하는데. 정작 내 그림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아.”
“…….”
“사람들은 내 그림을 이야기하지 않고 내 그림이 얼마에 팔렸는지, 누가 샀는지만 궁금해했어.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단다.”
할아버지가 피자를 내려놓았다.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서 회한이 묻어나왔다.
“훈아, 할아버지는 위대한 그림은 있을지언정 위대한 화가는 없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화가는 없다.
“예술의 주체가 관람객에게 있기 때문이야. 예술은 하는 게 아니다. 되는 거야.”
할아버지가 토해낸 오랜 번뇌를 듣는 순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예술로 인정해 줄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기는 거란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잊고.
그저 할아버지와 시선을 마주했다.
“돈은 벌어야지. 암.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화가잖니. 그림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무슨 옷을 입었는지, 입에서는 무슨 냄새가 나는지로 주목받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구나.”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리라.
할아버지는 평생을 이 딜레마를 고민하셨을 터다.
나날이 치솟는 명성과 그림 가격에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림들.
무엇을 그렸는지조차 모르면서 찬양하는 사람들.
할아버지는 그 사이에서 충분히 고민하고 힘들어하셨을 터다.
하나 의문이 드는 건 지난 몇 달간 내 그림이 경매에 오르는 걸 막아설 수도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왜 말씀 안 해주셨어요?”
할아버지에게 물으니 피자를 한 조각 떼서 먹으라고 권하셨다.
“경험과 지식을 단순히 말로 전하는 건 쉬워.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참 느끼기 힘들지. 아무리 말을 조리 있게 해도 말이다.”
부모의 가르침, 교사의 가르침, 선배의 가르침 모두 그러하다.
옳은 말이고 좋은 말인 걸 알면서도 와닿지 않는다.
“경험해 봐야 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훈이는 할아버지랑 다른 답을 낼 수도 있으니까.”
피자를 입에 욱여넣었다.
“그림을 비싸게 팔고 싶다면 그래도 돼. 수만 명의 화가가 그러지 못해서 배를 곯고 살아. 누구도 네게 뭐라 할 수 없어.”
피클도 하나 집어 먹었다.
“하지만 만약. 만약에 네가 그저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그걸 누군가 보는 게 좋아서 그린다면 앞으로 여러 경험을 해보길 바란다.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 일은 모두 보여주고 들려주겠지만 스스로 찾아봐야 해. 네가 그림을 즐겁게 그릴 수 있는 방법을.”
즐겁게.
그 단어 하나에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며 적어도 배를 곯진 않아야 한다.
경매장을 찾는 이들에게 그림을 비싼 값에 파는 게 목적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지금 상상도 못 할 큰 돈을 얻었지만, 덕분에 휘트니 비엔날레에 걸 작품이 없다.
내 그림이 어디에 전시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해바라기>, <손님>에 이어 오늘 팔린 <서리 밀밭>까지.
콜라를 쭉 들이켜 찌릿한 청량감에 머리와 가슴을 식혔다.
성격은 개차반이지만 뛰어난 화가이자 조각가인 앙리 마르소가 내 그림을 돈 취급할 리는 없다.
하지만 분명 지금 경매장에는 문제가 있다.
앙리 마르소나 리처드 필립스처럼 순수하게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할아버지의 그림이 사라진 것처럼 다른 목적으로 참가하는 사람도 있을 터다.
“사실.”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정말 놀랐단다. 네가 그 돈의 가치를 이해할지 모르겠다.”
“몰라요.”
적당히 많아야 감이 오지.
돈이라고는 1,000원, 2,000원 하는 과자와 28,000원짜리 포테이토 피자를 사는 데 썼던 내가 163억 원이라는 금액이 현실적으로 느껴질 리 없다.
“그래. 그럴 거야. 좀 전에 나눈 대화와는 다른 이야기지만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란다. 할아버지가 훈이 그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네.”
“그런 할아버지한테도 말이 안 되는 액수란다. 좋아할 게 아니라 뭐가 잘못되었는지 생각해야 해. 할아버지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네.”
이건 아마도.
앙리 마르소란 인간의 비상식적인 행동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내게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몰라도 첫 만남부터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벌써 내 그림을 두 점이나 샀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른다.
내 그림을 비싸게 살 테고.
앙리 마르소만이 소유하려는 작가의 그림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다.
앙리 마르소에게만 그림을 파는 작가가 되고 싶지 않다. 그에게 의지해 작품 활동을 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수입을 내려면 그림을 팔아야 하는데.
“…….”
더 많은 일을 경험하자.
분명 그림 그리는 사람이 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파는 일만 하진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그런 일을 찾아서 경험해 보는 것이 우선이리라.
진로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위대한 화가는 없다고 하셨잖아요.”
“음.”
“밀레나 피카소도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그래. 만종과 게르니카는 위대한 그림이지만 말이다.”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게 된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어쩌면 위대한 화가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위대한 스승은 내 앞에 있다.
* * *
다음 날.
집 앞에도 그러더니 학교 앞까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덕분에 등하교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졌다.
배고플 때 먹으려고 가방에 넣어두었던 몽 셰르 통통을 꺼냈다.
다 찌그러졌다.
분노에 떨다가 문득 김지우의 말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영화 보여주세요.”
“영화? 무슨 영화?”
“아무거나요.”
“음. 좋지.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내일 보자꾸나. 보고 싶은 거 있어?”
“아니요. 그냥 어떤지 한 번쯤 보고 싶어서요.”
할아버지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납득하셨다.
기억이 없어서 영화에 대해서도 잊었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영화 볼까?”
“제목이 뭐예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1)
노인이 얼마나 빠르면 세상에서 가장 빠르다는 수식어가 붙을까.
제목만 들어도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진다.
“좋아요.”
“그렇게 나와야지. 팝콘도 튀기자꾸나.”
“팝콘?”
할아버지에게서 영화를 보는 방법을 배우다 보니 어느새 배움 미술관에 도착했다.
방태호가 반갑게 인사했다.
“선생님, 훈아.”
“벌써 오셨는가?”
“네. 응접실에 계십니다.”
약속한 시각까지 5분 남았는데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을 열자 중년 여성과 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여성은 경매장에서 봤던 크리스틴 노먼이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고.”
그녀의 목소리와 말투에서 품격이 묻어나온다.
노먼이 할아버지에게도 인사했다.
“처음 뵙습니다. 크리스틴 노먼이에요.”
“고수열이에요. 반가워요.”
자리를 잡고 앉으니 고맙게도 미술관 직원이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얼음을 다섯 개 넣은 콜라를 보니 마시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진다.
한 모금 마시자 크리스틴 노먼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만나 달라고 해서 놀랐죠?”
“놀라진 않았어요. 무슨 일일까 궁금했고.”
솔직하게 말하니 노먼이 씩 웃었다.
여유로운 미소 속에 눈빛은 올곧다. 현명함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실은 팬심에 보고 싶었어요. 서리 밀밭을 사지 못한 아쉬움도 풀고 싶고.”
“아.”
“듣기로는 하루 만에 그렸다고 하던데. 실제로는 어땠어요?”
직접 작업한 시간만 따지면 반나절 정도지만 <서리 밀밭>은 꽤 오래 생각해 왔다.
단지 시간이 흐르고 할아버지를 만나면서부터 <황금 밀밭>을 그리려던 마음이 변했을 뿐이다.
“그렇긴 한데 구상하는 시간을 따지면 꽤 오래됐어요. 1년쯤.”
크리스틴 노먼이 눈썹을 들고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서리 내린 밀밭을 표현하려고 꽤 노력했고. 바람이 부는 겨울 밤하늘을 표현하기까지도 오래 걸렸고요.”
굳이 정확히 설명하면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지금까지 쭉 노력해 온 모든 기량과 사색이 결집된 것이다.
하루 만에 그렸다고는 할 수 없다.
크리스틴 노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노먼에게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두께의 종이 뭉치를 건넸다.
노먼은 그것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영화 좋아해요?”
“아뇨.”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유롭던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면 놀라도 보통 놀란 게 아닌 듯하다.
“본 적이 없어서 내일 한번 보려고요. 보고 나서 알려드릴게요.”
“아.”
노먼이 웃으며 종이 뭉치를 밀었다.
“이거 내년에 촬영할 영화 대본이에요. 혹시 관심 있으면 읽어줬으면 해요.”
겉표지에 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2)
‘비어 있는 바늘?’
제목만으로는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감이 안 잡힌다.
“그리고 만약.”
크리스틴 노먼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 대본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꼭 연락해주길 바라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돌리자 방태호가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뜨고 있다.
* * *
1)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
원제 .
2005년 개봉한 영화로 버트 먼로(1899~1978)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로저 도널드슨(1945~)이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2)기암성(아르센 뤼팽 시리즈), 모리스 르블랑, 1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