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64화
17. 첫 의뢰(3)
장미래는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앙리 마르소가 마음에 든 미술품을 사들이는 데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세간에 알려진 만큼 돈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WH 서울 옥션에서 가장 높은 낙찰가는 57억 원으로 고수열과 쌍벽을 이루었던 김현기 화백의 작품이었다.
소더비 등 해외 경매장에서는 고수열, 김현기 화백의 작품이 100억 이상에 거래된 적도 있었지만.
500만 유로는 대한민국 경매장에서 처음 나온 수치였다.
장미래가 놀라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고 그것은 현장을 지켜보는 모든 이가 마찬가지였다.
해외 고액 자산가가 유독 많이 참가한 경매라고는 해도.
500만 유로, 한화 68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현금으로 보유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경매 참가자 대다수가 의지를 잃고 말았다.
‘무슨 생각이야?’
장미래는 아끼는 아이의 작품이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으로 인정받았단 기쁨에 앞서, 앙리 마르소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고훈의 <손님>이 마르소 옥션에서 400만 유로에 낙찰된 전례가 있긴 했지만 회화 작품이 500만 유로를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녀 역시 <서리 밀밭>에 흠뻑 빠져 있었고 그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500만 유로는 작가 개인의 인기와 작품 고유의 가치를 넘어,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작품에나 어울릴 법한 금액이었다.
‘설마.’
장미래는 순간 앙리 마르소가 고훈의 작품을 ‘다른 용도’로 생각하고 있는지 의심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런 사람은 아니야.’
무례하고 괴팍한 남자지만 적어도 미술을 대하는 마음만큼은 진실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녀와 같진 않았다.
사람들은 앙리 마르소가 고훈의 작품을 투기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혹은 세금을 피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려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500만 유로라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흥.’
앙리 마르소는 떨거지들과 어울리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어차피 모두가 수백만 유로 수준으로 예상하는 상황에서 감질나게 금액을 올리는 경매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600만 달러.”
한 여성이 정적을 깼다.
경악에 찼던 경매장 내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한곳에 집중되었다.
앙리 마르소와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키던 21세기 최고의 영화감독 크리스틴 노먼이었다.
‘노먼 감독이잖아.’
‘맙소사.’
경매장에서도 간혹 말실수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허위 입찰은 경매장에서 강력히 대응하나, 순간적인 판단 실수로 능력을 벗어난 금액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신원이 확실하고 600만 달러를 지불할 수 있는 영화계의 거장이 허투루 입찰할 리 없었다.
“뭐야. 진짜야?”
“600만 달러?”
“고수열 작품이 아니라고.”
장내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정시준 경매사가 간신히 냉정을 유지하며 크리스틴 노먼의 제시를 받아들였다.
“600만 달러 최고가. 원활한 진행을 위해 미합중국 달러화로 입찰받겠습니다.”
정시준은 어떤 금액을 제시해야 좋을지 판단할 수 없었다.
상식의 영역이 다른 두 거부를 상대로 굳이 금액을 정해둘 필요도 없었다.
<서리 밀밭>을 향한 두 사람의 의지는 그들의 입찰가로 충분히 드러나 있었고.
남은 일은 두 사람의 경쟁을 보조하는 것뿐이었다.
“700만.”
앙리 마르소는 크리스틴 노먼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자금을 확보해 보려던 다른 참가자들의 의지가 완전히 부러지고 말았다.
“800만.”
정시준이 앙리의 입찰가를 부르기도 전에 노먼이 번호표를 들었다.
사람들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두 재력가를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서리 밀밭>의 작가 고훈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고개를 젓고 눈을 비볐다.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정면 스크린에 800만 달러가 명시되어 있었다.
‘제정신인가?’
고훈은 앙리 마르소도 크리스틴 노먼도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도 큰 의의를 두고 특히나 아끼는 작품이었지만 상상조차 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900만.”
앙리 마르소가 또다시 가격을 올렸고 사고가 멈췄던 고훈이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들 왜 저래요?”
손자의 귓속말에 어리둥절하던 고수열이 정신을 차렸다.
“그러게나 말이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마르소 저놈은 원래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
“1,000만 달러.”
고수열의 말과 크리스틴 노먼의 목소리가 겹쳤다.
기어이 1,000만 달러를 넘기고 만 상황에 나란히 앉아 있던 할아버지와 손자는 그저 눈만 껌뻑였다.
└아닠ㅋㅋㅋㅋ돌았냐곸ㅋㅋㅋㅋ
└미쳤다 진짜. 기어이 100억이 넘어가네.
└우리나라에서 그림 100억에 판 작가 있음?
└살아 있는 사람 중엔 고수열, 김현기, 장미래 셋뿐임.
└저 세 명도 우리나라 경매장에선 100억 넘은 적 없음.
└훈이 표정 봨ㅋㅋㅋ
└⊙◇⊙
└귀엽닼ㅋㅋㅋㅋㅋ 놀라서 고장났나 봐ㅋㅋㅋㅋㅋ
└누가 손자 아니라고 고수열이랑 똑같네ㅋㅋㅋ
└1,000만 달러가 얼마임?
└스크린에 나오잖아. 지금 환율로는 109억 원인가 보네.
└나 진짜진짜 이해가 안 되는데 고훈이 그림 잘 그리는 것도 알고 나도 고훈 그림 좋아하고 그러는데 어떻게 그림 한 점에 100억이 넘어?
└돈 많은 놈들 머릿속을 어태 이해하겠냐.
└애초에 쟤들한테 그림은 소모품이 아니야.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사는 거라서 소비가 아님.
└그럼?
└좋게 말하면 투자고 나쁘게 말하면 투기지.
└앙리 마르소처럼 한 번 산 작품 안 파는 사람한테는 소비 맞지.
└위에 채팅 친 애가 착각하는데, 저 가격에 샀다고 나중에 저 가격 받을 수 있진 않음.
└빈센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 처음에는 수수료 포함해서 8,250만 달러에 낙찰되었는데 나중에는 반값에 팔림.
└ㅁㅊ. 4,000만 달러가 증발하네.
└고훈이 나중에 어떻게 평가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런 가격 주는 건 그냥 무조건 사겠다는 뜻임.
└그니까 암만 가지고 싶어도 100억이 말이 되냐고.
└당연히 말이 안 되지. 근데 쟤들한테는 말이 됨. 우리도 소고기 진짜 너무 먹고 싶으면 큰맘 먹고 사 먹잖아. 그런 거야.
└못 먹어.
└억지 부리지 말고. 우리가 소고기 사 먹는 거랑 저 사람들 그림 사는 거랑 비슷한 문제라니까?
└못 먹는다고…….
└……미안.
└와 앀ㅋㅋㅋ 1,100만 달러 나옴ㅋㅋㅋ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와 커뮤니티 사이트의 반응 덕분에 WH배움 미술관 뉴튜브 채널은 터져나갈 듯했다.
너무나 많은 시청자가 급속히 쏠린 탓에 중계 영상이 끊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기록적인 순간을 찾기 위해 TV 채널을 NBC로 돌렸고.
그렇게 시청률은 순식간에 8퍼센트까지 올라갔다.
황혼기를 맞이한 TV 방송국으로서는 이례적인 수치였다.
‘이유가 뭐지?’
대한일보 이인호 기자는 기사를 적을 생각도 못 하고 상황을 지켜봤다.
고훈을 취재하면서부터 미술에 관심을 두고 재미를 붙여갔지만, 한 작품을 사기 위해 100억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갖고 싶어서?’
이인호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그의 상식으로는 앙리 마르소와 크리스틴 노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자로서의 감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 * *
“그게 사실입니까?”
한편.
미셸 플라티니와 통화하던 에릭 다우어 휘트니 미술관 관장이 크게 기뻐했다.
이른 새벽녘의 피로도 떨칠 만큼 반가운 소식 때문이었다.
-네. 마르소 작가의 새 작품 한 점과 소장품 세 점을 전시하고 싶어요.
세계적인 화가 앙리 마르소의 신작과 그 소장품이라니.
앙리가 불과 몇 달 전에 개인전을 열었던 터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에릭 다우어 관장으로서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좋은 자리 부탁드릴게요.
“일이 이뤄진다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죠.”
에릭 다우어 관장이 반색했다.
“어떤 작품인지 너무나 궁금하네요. 아시다시피 미리 준비할 것도 있으니까요.”
-신작은 40P 캔버스 유화고. 소장품은 고훈의 유화입니다. 양쪽 벽에 마주 보도록 걸어주셨으면 해요.
“오우. 고훈이라니. 초대하고 싶었던 작가입니다. 한데 세 점이라면.”
에릭 다우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알려진 사실로는 앙리 마르소는 고훈의 작품을 한 점 소장했다.
앙리 마르소가 직접 구입한 고훈의 첫 발표작 <해바라기>.
한데 고훈의 작품을 세 점이나 걸어달라는 미셸의 요청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네. 서리 밀밭을 포함해서요.
에릭 다우어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알기로 <서리 밀밭>은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벌써 끝났나?’
에릭 다우어는 급히 기사를 검색하며 물었다.
그러나 <서리 밀밭>의 적정가가 얼마인지, 누구 손에 들어갈지에 관한 추측성 기사뿐.
앙리 마르소가 낙찰받았단 소식은 없었다.
어디로 가는 것마저 기사화되는 인물이 <서리 밀밭>을 샀다면 크게 보도되었을 터.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라 소식이 늦나?’
에릭 다우어 관장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일어나서 확인하려고 했는데 제가 소식이 늦었네요. 벌써 낙찰받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아니요. 경매는 지금쯤 시작했을 거예요. 아직 낙찰받은 건 아니죠.
아직 낙찰받지도 않은 그림을 전시하겠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에릭 다우어가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
“그럼 어떻게…….”
-작가님이 반드시 산다고 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하하. 이거 여전히 당황스러운 분이시네요.”
-함께 일하기 정말 까다롭죠.
에릭 다우어의 말에 미셸이 동의하며 작게 웃음을 나눴다.
고훈의 <서리 밀밭>에 관심을 둔 사람이 많다지만, 억만장자 앙리 마르소가 반드시 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무래도 이미 많은 사람이 다녀갔기에 일정을 최대한 빨리 잡고자 해요. 경매가 끝나면 작가님이 직접 뉴욕으로 가실 겁니다. 물론 신작도 함께요.
“서둘러야겠습니다. 다음 주말까지는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통화를 마친 에릭 다우어 관장이 손을 모은 채 양손의 손가락 끝을 붙였다가 떼길 반복했다.
현재 가장 화제를 끌고 있는 앙리 마르소와 고훈의 작품을 나란히 전시할 수 있단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두 사람 모두 최근에 개인전을 열었기에 힘들다고 생각했거늘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격이었다.
항상 마르소 갤러리에서 먼저 발표되었던 앙리 마르소의 신작.
캐롤라인 스트릭이 극찬하며 금세 이목을 끈 고훈의 <서리 밀밭>.
어느 쪽도 휘트니 비엔날레를 더욱 풍성하게 할 기대작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러는 한편 앙리 마르소가 굳이 왜 <서리 밀밭>을 사면서까지 이런 일을 벌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리 밀밭>이 계약 문제로 WH배움 미술관에 전시되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을 테고.
혹은 어떤 이유로든 휘트니 비엔날레에 전시하고 싶을 수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 일이기에 자세히 알 순 없지만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높이 평가하고 아낀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하긴 한가 보네.’
에릭 다우어가 어깨를 으쓱이며 어젯밤 미리 내려둔 콜드브루를 잔에 따랐다.
천천히 음미하며 WH 서울 옥션에 관한 보도 자료를 찾는데 갑자기 기사가 빗발치듯 올라왔다.
[서리 밀밭, 1,400만 달러 낙찰!]
[앙리 마르소 크게 쏘다!]
[경악의 결과]
[서리 밀밭, 올해 최대 경매가로 예상]
“…….”
에릭 다우어의 입에서 커피가 주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