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63화 (31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63화

17. 첫 의뢰(2)

WH 서울 옥션 현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최근 가장 큰 이슈를 끌고 있는 고훈의 작품이 얼마에 낙찰될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참가자는 200명 내외였으나 그 면면이 심상치 않았다.

‘달콤한 행복’ 전시실을 찾아서 화제를 모았던 WH그룹 유장혁 회장이 기대와 달리 참석하지 않았지만.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자 억만장자 앙리 마르소.

21세기 최고의 영화감독이자 제작자 크리스틴 노먼, 파인애플사 수석 제품 디자이너 리처드 필립스 등 유명 인사가 다수 참전했다.

대한민국의 방송사 NBC는 이례적으로 WH 서울 옥션을 생중계하고 나섰고.

WH배움 미술관 뉴튜브 채널을 통해 경매를 지켜보는 사람은 30만 명에 육박해 있었다.

└고훈 오늘 돈벼락 맞는 날임?

└그럴 듯. 최소 첫 번째 작품보다는 비싸게 팔리지 않을까?

└유장혁은 안 갔나 보네.

└애초에 그냥 구경 간 건데 기레기들이 또 설레발 친 듯.

└근데 저기서 돈 제일 많은 사람이 누구야?

└앙리 마르소 아니면 크리스틴 노먼일 듯.

└노먼일걸? 다들 영화감독으로만 알고 있는데 제작도 함. 영화 수익이랑 제작자로 얻은 투자 수익까지 하면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싶은데.

└맞아. 월드 와이드 박스 오피스 10억 불 영화만 몇 갠데. 앙리 마르소가 그렇게 부자야?

└쟤네 가문이 프랑스 금융업 꽉 쥐고 있었음. 파리바도 원래 마르소 가문 소유였음.

└파리바가 뭔데?

└지금은 BNP랑 합병해서 BNP 파리바라고 하는데 유럽에서 제일 크고 돈 많은 은행임. 앙리 마르소가 거기 최대주주이기도 함.

└거기에 개인 수입도 엄청나지. 저번에 기자들한테 돈 자랑한 게 괜한 소리가 아님. 작년 기준 세계 부자 top 50 안에 들었음.

└어떤 미친놈이 신인 작가 첫 발표작을 200만 유로에 사나 싶었는데 진짜 껌값이었나 보네;;

└암만 그래도 28억 원이 껌값은 아니지. 치킨값 정도?

└전화기 들고 있는 사람들은 뭐지?

└전화 응찰하는 사람들임. 직접 참가 못 하는 사람도 있어서 전화로 상황 설명해 주면서 경매 참가할 수 있게 해주는 거야.

└어, 시작한다.

WH 옥션 서울점의 모든 직원이 총동원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경매사가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진행을 맡은 경매사 정시준입니다.”

참가자들은 어떤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여러 경매를 맡았던 정시준도 오늘만큼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만만치 않겠어.’

경매로 나온 물건을 최대한 높은 가격으로 파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WH배움 미술관과 작가 고훈에게 돌아가는 수익이 그의 진행에 달렸기에 책임이 막중했다.

“오늘 경매는 작가 고훈의 첫 개인전에 소개된 작품 다섯 점을 다룹니다.”

정면 스크린에 고훈의 약력이 소개되었다.

“고훈 작가는 작년 11월, 해바라기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강렬한 색채감과 숭고한 심상이 인상적인 작가로 올해 2월, 첫 번째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경매사의 말이 영어로 동시 통역되고 있었지만 앙리 마르소의 귀에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서리 밀밭>이었다.

또 다른 재력가 크리스틴 노먼과 리처드 필립스가 경쟁자로 예상되었지만 누가, 어떤 금액을 부르더라도 반드시 살 생각이었다.

그는 고훈의 작품을 소개한 팸플릿을 덮고 눈을 감았다.

“그럼 첫 번째 작품을 만나보시죠. 라부 여관입니다.”

진행 보조자가 고훈이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스케치하고 한국에서 완성한 <라부 여관>을 가지고 나왔다.

이미 공개된 작품이라 참가자들은 점잖게 감탄했다.

“30F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죽기 직전까지 머물렀던 라부 여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죠. 한국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과감한 생략과 담백한 필치에서 전해지는 질감이 인상적입니다.”

그림을 설명한 경매사 정시준이 참가자들을 둘러본 뒤 입을 뗐다.

“그러면 작품 라부 여관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가는 5,000만 원입니다. 5,000만 원 계십니까?”

몇몇이 번호표를 들었다.

경매사 정시준은 차분히 가격을 높여나갔고 <라부 여관>을 사려는 사람들은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정면 스크린에 원화, 미국 달러, 엔화, 위안화, 홍콩 달러, 유로화가 실시간으로 갱신되었다.

“서면 2번 손님 5억 원. 최고가. 현장, 전화, 서면 최고가 5억 원입니다.”

직접 참가자들을 보던 정시준이 망설이는 듯 번호표를 든 사람에게 손을 뻗었다.

“입찰하시겠습니까? 118번 손님께서 5억 5,000만 원. 47번 손님께서 6억 원 응하셨습니다.”

가격이 오를수록 손을 드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서로의 눈치를 보며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훈의 작품을 갖고 싶은 욕심과 재력도 충분했으나 각자 생각해 둔 상한선이 있었다.

경매사 정시준은 눈빛과 제스처, 언변으로 그들이 정한 상한선을 넘겨야 했다.

<라부 여관>을 사려는 사람이 두 사람으로 좁혀졌다.

“8억 원. 60번 손님께서 8억 원에 입찰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한 노년의 여성이 6억 원이었던 가격을 한 번에 8억 원까지 올렸다.

“끄응.”

줄곧 경쟁해 온 중년 남성이 얼굴을 구기며 불편한 듯 신음했다.

정시준 경매사는 고개를 옆으로 틀고 턱을 당긴 채 망설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포기하는 거냐고 도발하고 있었다.

중년 남성이 입을 굳게 다문 채 망설이다가 번호표를 들었다.

“47번 손님께서 8억 5,000만 원 입찰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재 최고가 8억 5,000만 원.”

금액을 올린 정시준은 서두르지 않았다.

경매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가격을 높였던 할머니가 여기서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노년의 여성이 곧장 번호표를 들었다.

“9억 원. 8번 손님께서 9억 원 최고가 입찰하셨습니다. 10억 원 계십니까?”

경매 과정을 지켜보던 고훈이 내심 감탄했다.

예의와 품격을 갖추면서도 경매 참가자들을 도발하는 듯한 언행이 퍽 인상적이었다.

구매 희망자의 욕구를 자극하되 그들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 탁월했다.

“10억. 최종 입찰하겠습니다. 현장, 전화, 서면 최고가 10억 원. 10억 원. 10억 원.”

탕-

정시준이 경매대를 내려쳤다.

“고훈 작가의 라부 여관 10억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본래라면 8억 원에 그쳤을 가격을 한 번 더 올린 건 순전히 정시준 경매사의 능력이었다.

‘경매사도 필요해.’

현장을 찾은 200명과 전화 참가자, 서면 참가자 등이 앞을 다투어 참가하는 와중에도 정시준 경매사는 누가 먼저 손을 들었는지.

참가자가 작품을 얼마나 사고 싶어 하는지를 순식간에 판단해냈다.

경매사의 역량에 따라 그림 가격에 차이가 발생했다.

‘큐레이터, 매니저, 경매사. 또 누가 필요하지?’

매일, 매번 새로운 지식이 쏟아지는 통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고훈은 서두르지 않았다.

완전히 독립된 갤러리를 운영하기 위한 지식을 쌓을 뿐이었다.

“8억 원. 8억 원. 8억 원. 낙찰되었습니다.”

탕-

고훈이 고민을 이어가던 중.

정시준의 연호와 함께 두 번째로 올라온 작품이 낙찰되었다.

└와 무슨 그림 한 점에 10억, 8억씩 하냐.

└예상보다 적지 않음? 해바라기랑 손님이 28억, 54억이었는데.

└얘들이 억억 대니까 정신 못 차리네. 저것도 개비싼 거야.

└엌ㅋㅋㅋ

└우리나라 작가 중에 회화 작품 한 점에 10억 전후로 파는 사람 몇 없음.

└고수열, 김현기, 유진희, 장미래 정도?

└그 사람들은 훨씬 비쌈.

└해바라기는 고훈하고 앙리 마르소가 직접 합의한 가격이고 손님은 파리에서 했잖아. 우리나라 옥션에서 수십억 나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님.

└근데 그게 이유가 될 수 있나? 작년 마르소 경매에 참가한 사람들보다 돈 많은 사람은 더 많이 왔는데?

└경매가격이 돈 많은 몇 명 때문에 오르는 게 아니야. 암만 돈 많아도 싸게 사고 싶지. 경쟁 붙는 사람이 가격 올리는 데 소극적이면 거기서 끝임.

└메인 작품 때문에 그럼.

└그러네. 앙리 마르소 네 번째 작품까지 손 한 번 안 들었네.

└앙리 마르소뿐만 아니라 크리스틴 노먼, 리처드 필립스처럼 돈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임.

└다들 <서리 밀밭> 노리고 있구나.

경매장 중계를 지켜보던 시청자들의 예상대로였다.

마지막 한 작품.

액자 장인 피에르 말로가 반하고.

미술사학자 캐롤라인 스트릭이 새로운 경향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한 <서리 밀밭>.

30F 캔버스에 담긴 희망과 용기가 경매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마르소도 참전하겠지.’

‘어떻게든 사야 해.’

뜨겁게 달아올랐던 장내가 경직되었다.

<서리 밀밭>을 노리는 사람 모두 감정을 숨기려 했으나 치열한 경쟁은 예견되어 있었다.

수없이 많은 경매를 성공적으로 치른 경매사 정시준조차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작품은 서리 밀밭입니다. 고훈 작가가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겨울 밀밭을 표현한 작품이죠. 캐롤라인 스트릭 박사는 서리 밀밭을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과 비교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시준이 작품을 공들여 설명해 나갔다.

“수확을 기다리는 풍요로운 밀밭에서 죽음을 느꼈던 반 고흐의 작품과 혹독한 한파를 맞이한 밀밭에서 생명의 거룩함을 표현한 고훈의 서리 밀밭.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고,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것이 연작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시준은 설명을 이어가면서도 경매사 참가자들을 살폈다.

시간을 끌면서 그들의 인내심을 시험했고 한계점에 이르렀다고 판단했을 때.

곧장 경매를 시작했다.

“시작가는 1억 원입니다.”

정시준은 말을 마친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매사 경력 16년 만에 이러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모든 번호표가 번호를 드러내고 있었다.

‘세상에.’

경매를 지켜보던 김지우 기자도 놀라서 입을 벌렸다.

현장 200명, 전화 13명, 서면 5명까지 모든 경매 참가자가 손을 든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래. 이거야.’

김지우의 가슴이 뛰었다.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이 즐기며 명맥만 이어가던 회화계가 단 한 명의 천재로 꿈틀대는 순간이었다.

김지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고훈이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홀린 화가답지 않게 너무나 기뻐하고 있었다.

아이답다면 아이다운 순수함일까.

언젠가 저 아이가 이러한 상황을 당연하게 여길 날이 기다려졌다.

한편.

‘어쩌지.’

정시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명씩 응대해서 가격을 올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직접 가격을 제시해서 참가자들을 줄이는 게 우선이었다.

“감사합니다. 2억 원 찾습니다. 2억 원 계십니까?”

또 한 번 전원 번호표를 들었다.

신속하고 냉철한 판단으로 경매를 이끌던 정시준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참가자들로부터 강렬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4억 원 찾습니다. 4억 원 계십니까?”

다시 한번.

모든 사람이 번호표를 들었다.

취재를 나온 기자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채팅창은 무슨 글이 올라오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요동쳤다.

정시준이 다시 한번 가격을 높였다.

“8억 원 계십니까?”

└뭔 가격이 두 배씩 올랔ㅋㅋㅋㅋ 제정신인갘ㅋㅋㅋㅋ

└미친ㅋㅋㅋㅋㅋㅋ

└또 들었엌ㅋㅋㅋㅋ 어디까지 올리려곸ㅋㅋ

└그래도 사람이 조금 줄긴 했네.

└와 이게 본 게임이네. 미쳤다 진짜.

지금까지와 달리 포기하는 사람이 발생했지만 여전히 대다수가 입찰 의지를 표명한 상황.

WH배움 미술관과 WH 서울 옥션이 예상한 <서리 밀밭>의 적정가격은 40억에서 50억 원.

정시준은 망설이지 않았다.

적정가격까지는 두 배씩 늘려 부를 요량이었다.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차.

“500만 유로.”

앙리 마르소의 선언에 경매장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