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62화
17. 첫 의뢰(1)
택배사 직원들이 다녀간 뒤.
정원에 금색 마르소, 은색 마르소, 실사 마르소가 나란히 서 있다.
턱을 치켜든 자세가 참으로 거만한데, 그 짧은 시간에 똑같은 걸 두 개나 더 만들 줄은 몰랐다.
자세히 보니 채색과 소재만 다른 게 아니라 표정도 조금 다르긴 하다.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멋진데…….”
<마르소의 보석>을 처음 본 방태호가 감탄했다.
확실히 그럴 수밖에 없는 걸작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주고 싶었던 걸까.
할아버지의 고즈넉한 정원이 자아도취적 파리지앵의 야외 살롱이 되어 버렸다.
“이게 마르소의 보석이지? 작년 파리에서 공개한.”
“네.”
“한국까지 보내기 번거로웠을 텐데, 의외로 친했나 봐. 어제 너 걱정한 것도 그렇고.”
“전혀요.”
처음에는 외로운 사람으로 여겨서 마음이 갔고.
어제 잠시 호의를 느낀 건 사실이나 지금에 와선 할아버지가 그를 왜 그토록 싫어하는지 알 것 같다.
남의 말은 죽어도 안 듣는다.
“내, 내 정원이.”
할아버지가 입술을 꿈틀거린다.
화가 단단히 나신 듯하다.
마당에 있던 망치를 쥐었다.
“서, 선생님. 잠시.”
“말리지 말게. 부숴야 버릴 거 아냐?”
“부수면 안 되는 작품입니다. 고정하시고.”
“고정은 무슨! 저 흉측한 게 내 집에 들어와 있는데 진정할 수 있겠나!”
“훈아, 할아버지 좀 말려 봐. 응?”
방태호가 간절히 애원했다.
다가가서 망치를 쥔 할아버지를 말렸다.
“할아버지, 다쳐요.”
“……후우.”
다행히 한숨을 푹 내쉬고 이성을 되찾으셨다.
“보호 안경이랑 장갑 가져올게요.”
대리석을 부수다가 그 파편에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특히 눈처럼 약한 부위면 더더욱.
망치질 한두 번으로는 어림도 없으니 손도 다치실 터.
작업실로 가려고 하니 방태호가 손목을 붙잡았다.
“훈아, 잠깐. 너도 진정하자.”
* * *
2028년 3월 11일 토요일.
고훈의 ‘달콤한 행복’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2주간 13만 명이 방문한 첫 번째 전시회는 지상파 3사 및 종합편성채널 뉴스 메인에 수차례 오르내렸다.
각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유지하였으며.
커뮤니티 사이트, 포럼 게시판, SNS, 뉴튜브 등에서도 고훈과 관련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국내외 유명 인사들의 반응을 편집한 영상과 사진들이 인기를 끌어 실제 방문객 수 이상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전시회가 끝난 뒤에도 여론의 관심은 식을 줄 모르고 더더욱 불타올랐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WH그룹 유장혁 회장, 영화계의 거장 크리스틴 노먼, 천재 화가이자 억만장자로 알려진 앙리 마르소, 세계적 제품 디자이너 리처드 필립스 등.
여러 유명 인사가 관심을 보인 고훈의 <서리 밀밭>이 경매에 오르기 때문.
저명한 미술사학자 캐롤라인 스트릭이 또 하나의 사조가 시작된 작품이라고 극찬한 <서리 밀밭>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
사람들 사이의 의견이 분분했다.
└진짜 대박인데. 경매 중계는 안 하나?
└WH배움 미술관 뉴튜브 채널에서 함. 오늘 7시임.
└헐. 1시간밖에 안 남았네.
└경매 방송이 기다려지는 건 처음이야.
└솔직히 궁금하잖아ㅋㅋ
└근데 답 정해져 있지 않음? 돈 제일 많은 유장혁이 사겠지.
└가격 경쟁으로 들어가면 그렇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서리 밀밭>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님?
└재벌들이 돈 막 쓰고 다니지 않음. 졸부들이나 그러지.
└맞음.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야 사는 거지.
└그럼 또 앙리 마르소가 사겠네?
└왜?
└고훈 그림 엄청 좋아하잖아. 개인적으로도 친한 것 같던데?
└친하다고? [링크]
[앙리 마르소, 자각상 고수열 자택으로 배송]
[고훈, “가지고 돌아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안 받으니까 집까지 직접 배달해 줬네?
└왜 세 개얔ㅋㅋㅋㅋ
└늘었어ㅋㅋㅋㅋㅋ
└하나는 안 받으니까 두 개 더 만들어서 줬나 봨ㅋㅋㅋㅋ
└이 금 앙리가 네 것이냐.
└아닙니다.
└정직한 자로다. 은 앙리와 무지개색 앙리도 주마.
└저 그냥 돌아갈래요.
└안 돼. 못 가.
└ㅋㅋㅋㅋㅋ댓글 단합력 봨ㅋㅋㅋ
└무지개색 앙리 무엇ㅋㅋㅋㅋ
└고훈 인터뷰 가지고 돌아가랰ㅋㅋ 둘이 왤케 귀여워? ㅠㅠ
└그 와중에 스펀지빵 우산은 뭔뎈ㅋㅋㅋ
└비에 부식될까 봐 씌워줬나?
└전부터 인터뷰로 노는 거 보니 둘이 친하긴 한가 봄.
경매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언론은 유력한 낙찰 후보들에게 인터뷰를 시도했다.
특히 고훈과 앙리 마르소의 관계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대다수 기자가 앙리 마르소와 인터뷰하길 바랐다.
앙리 마르소가 호텔 밖으로 나서자 기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앙리 마르소 씨! 오늘 고훈 작가 경매에 참석하는 게 사실입니까?”
“고훈의 서리 밀밭, 얼마까지 고려하셨습니까!”
“천만장자 앙리 마르소의 원픽은 무엇입니까! 행복? 서리 밀밭?”
“치열한 경쟁이 예상됩니다! 어떤 마음으로 임하고 계십니까?”
기자들을 하찮게 내려다보던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그에게 지목당한 기자가 당황한 나머지 눈만 껌뻑거렸다.
“네?”
“뭐라 했냐고.”
그가 대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한 기자가 시선을 피하자 앙리 마르소가 으르렁거렸다.
“누굴 거지로 알아?”
“예?”
“천만장자가 아니라 억만장자다. 기사 똑바로 써.”
기자들이 멍하니 바라보다가 앙리 마르소가 그의 비서와 함께 움직이자 다시금 질문하기 시작했다.
“1억 달러도 못 가진 사람은 거지라는 말씀이십니까?”
기자들이 반발심에 도발하고 나섰지만 앙리 마르소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의 비서가 모는 차에 올라탈 뿐이었다.
“고훈이 마르소의 보석을 가져가라고 말했습니다! 굳이 왜 보내셨는지 답변 부탁드립니다!”
그러다 한 기자의 질문에 창문을 내렸다.
“생각 좀 해.”
앙리 마르소를 상대한 경험이 적은 대한민국 기자들은 그의 무례함에 화가 나기에 앞서 어이가 없었다.
“나한테 그 녀석 그림이 있는데, 그 빌어먹을 꼬맹이한테 내 작품이 없다는 게 말이 돼?”
* * *
곧 경매가 시작된다.
그림들이 어떤 주인을 만나게 될지 가슴이 설렌다.
특히 <서리 밀밭>.
모든 작품이 마찬가지지만 유독 애착이 가는 그림이다.
첫 발표작은 <해바라기>로 알려졌지만 내가 나로서, 고훈으로서 처음 내놓은 작품이니까.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걷기 시작한 작품이니만큼 좋은 사람에게 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
방태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소 들뜬 표정으로 경매장 소식을 풀었다.
“분위기가 좋아. 벌써 꽉 찼어.”
가격을 정해둔 그림은 이미 구매자가 정해져 있지만, 경매까지 나올 정도로 내 그림을 사고 싶은 사람이 많다고 하니 가슴이 요동친다.
“마르소 갤러리 가본 적 있으세요?”
“응. 2~3년 전에?”
“그런 갤러리 지으려면 얼마나 필요해요?”
방태호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민했다.
“글쎄. 건물은 땅값이 중요해서. 어디에 짓는지가 중요하지?”
“건물 짓는 데는 많이 안 들어요?”
“그 정도 규모면 시공비도 많이 들긴 하지. 왜? 갤러리 짓고 싶어?”
“네.”
“하핳. 좋아 보였나 보네.”
무척 인상적이었다.
개인 작업실도 있는데다 전시실도 넓어서 어떤 주제도 소화할 수 있으며, 그림을 직접 팔 수 있는 덕에 수수료 걱정도 없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 마르소 갤러리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화가의 꿈이리라.
“그런 걸 운영하려면 돈도 많이 들겠죠?”
“그렇지.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할 거야. 직원도 많을 테고.”
역시 갤러리를 짓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그걸 유지할 수 있는 수익원을 마련해 둬야 한다.
나뿐만 아니라 갤러리 직원들의 생계도 책임져야 하니까.
앙리 마르소처럼 어마어마한 부자라면 고민이 덜하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전시회 열고 싶으면 공간 빌려서 하면 돼. 굳이 무리해서 만들 필요는 없어.”
방태호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번 전시회처럼 장소를 빌리는 것이 경제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정치적인 힘이든 재화로 인한 힘이든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서 벗어나, 오직 화가와 대중 사이에서 존재할 수 있는 장소.
화가가 독립적인 존재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럴 수 있을까.’
나를 지키며, 사랑받을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것만으로 대중의 환호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축복받은 천재.
그런 점에서 앙리 마르소는 진정한 천재다.
본인의 고집을 대중에게 강요시킴으로써 성공한 화가라니.
개떡 같은 인성과는 별개로 그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란 말인가.
그가 부럽다.
‘그럼 나는.’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리 없으니 앞으로의 전시회는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이리라.
“아, 깜빡했네. 휘트니 미술관에 연락해 봤어.”
방태호가 상념을 깼다.
무슨 말인가 싶어 설명을 기다리니 기쁜 소식을 전했다.
“에릭 다우어라는 사람이 널 초대하고 싶다고 했거든. 전시할 그림이 없는데 조금 늦어져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문제없대. 5월 전까지 올 수 있냐고 묻더라.”
“그럼요.”
“고민 안 해봐도 돼?”
“구경만이라도 하고 싶었어요. 어차피 갈 거 그림 들고 가면 좋잖아요.”
“하하. 그러네. 5월 첫 주에 자리 마련해 주겠대. 나머지 준비는 아저씨가 해둘 테니까.”
“그림만 그리면 되겠네요.”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화가들이 모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미술제라니.
그런 곳에 빠질 수야 없다.
“일어나자. 경매 시작하겠다.”
방태호가 괜한 말을 꺼냈다.
“어쩌면 네 꿈이 금방 이뤄질지도 모르겠어.”
“어떻게요?”
“오늘 온 사람들이 다 어마어마하거든. 크리스틴 노먼 알지?”
“유명한 영화감독이잖아요?”
그녀가 감독한 영화는 전 세계 수익 10억 달러를 가뿐히 넘긴다고 김지우가 알려주었다.
“맞아. 최근에도 개봉 예정작이 하나 있는데 그 바쁜 와중에도 온 거야. 기대해 볼 만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