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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61화 (31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61화

16. 금도끼 은도끼(5)

“후우.”

앙리 마르소가 고훈과 방태호를 도발한 그날 저녁.

방태호는 퇴근 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고훈의 매니저를 자처했지만, 그러기 위해선 WH배움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란 안정적인 직업을 포기해야 했다.

41살.

새로운 도전을 하기엔 그간 직장에서 쌓아온 경력이 너무나 많았고 책임져야 할 아이도 있었다.

술잔을 앞에 두고 고민을 이어가던 그의 곁에 아내가 다가갔다.

“왜 혼자 청승이야.”

이한나가 잔을 꺼내와 맞은편에 앉았다.

남편은 말없이 잔을 채웠다.

갈등하는 방태호를 빤히 보던 이한나가 술을 홀짝이곤 물었다.

“플레이박스 사고 싶어? 새로 나온다던데.”

“큽.”

아내의 질문에 방태호가 헛웃음 지었다.

2020년 겨울, 신혼이었던 그는 플레이박스5를 사고 싶어서 연기하다가 걸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아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게임기를 결제해 주곤, 앞으로 모든 고민을 함께하자고 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는데 정말 그래도 되나 고민하고 있었어.”

이한나가 무릎을 끌어안고 남편의 말에 귀 기울였다.

“훈이 말이야. 정말 재능 있거든. 재능만 있는 게 아니라 그림을 좋아해. 많이.”

이한나가 술을 따랐다.

“전시회 준비하는 동안 마흔 점을 그렸어. 다 걸진 못했지만 어른도 못 할 일이야. 누가 강제로 시켜도 못 할걸. 정말 좋아하는 거야.”

“그러게.”

“잘만 도와주면 정말 멋진 화가가 될 텐데.”

방태호가 말을 한 번 삼켰다.

생각을 정리하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걸 내가 해주고 싶어.”

“그러면 되잖아.”

아내의 담백한 반응에 남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애만 보고 일하기엔 위험부담도 있고. 또 내가 훈이를 담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흐응.”

이한나가 술을 쭉 들이켜고 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보기엔 그 애는 당신 없어도 잘될 것 같은데?”

“……그럴지도. 아니. 그럴 거야.”

“그럼 도와줄 필요 없잖아.”

방태호가 눈을 감았다.

아내의 지적이 옳았다.

고훈은 세상 어디에 두어도 빛날 아이였다.

이미 <해바라기>부터 남다른 시작을 알렸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겨우 두 달 정도의 유럽 여행을 통해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그 아이를 높은 곳으로 이끌 터였다.

굳이 자신이 돕지 않아도 말이다.

“그러게.”

방태호가 잔을 들며 아쉬움을 삼켰다.

“그럼 뭐야?”

이한나의 질문에 방태호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

“그 아이 돕고 싶다며. 도와줘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그러고 싶은데?”

아내의 질문에 방태호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솔직하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도 솔직해지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이번에도 자신을 일깨워 준 아내에게 고마웠다.

“독차지하고 싶은 거지.”

고훈이 펼친 세상을 다루고 싶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열망을 담아낸 듯한 그림을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지금껏 쌓아온 경험과 지식이라면, 자신이라면 최고의 환경을 조성해 줄 자신이 있었다.

최고 화가의 그림을 다루는 싶은 큐레이터로서의 욕심이었다.

“그럼 놓치기 전에 도전해 봐야 하지 않겠어?”

“그러네.”

방태호가 자신과 아내의 잔을 채웠다.

“고마워.”

“뭘. 그 애한테 쫓겨나도 굶기진 않을 테니 열심히 해봐.”

아내의 믿음직한 응원에 남편이 웃었다.

유리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 * *

아침 새벽부터 초인종이 울렸다.

“흐으으아암.”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다.

할아버지 골프채로 인터폰을 누르자 방태호가 얼굴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누구냐.”

할아버지도 잠에서 깼는지 기지개를 켜며 거실로 나오셨다.

“방태호 아저씨요.”

“이 시간에?”

할아버지와 동시에 벽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아침 6시밖에 안 되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문을 열어주니 이내 현관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에요?”

“아, 자고 있었구나. 미안.”

방태호가 할아버지를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선생님과 훈이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았습니다.”

“부탁?”

얼굴을 보니 중요한 일이 있긴 한 모양이다.

할아버지도 방태호를 빤히 보시더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차와 우유를 내오셨다.

따뜻한 우유를 마시니까 졸음이 다시 찾아온다.

“말해보게. 무슨 일인가.”

방태호가 숨을 내쉬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곧은 시선으로 나와 할아버지를 마주했다.

“훈이 매니저. 제가 하고 싶습니다.”

어제 했던 이야기다.

생각을 정리하고 할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하러 온 모양.

할아버지는 차분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배움 미술관 전속 작가로 활동하길 권하는 건 아닐 테지.”

“네. 물론 그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국내에 두기엔 훈이가 너무 아깝습니다.”

“아깝다.”

방태호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선생님께서 아시다시피 훈이는 이미 인기 작가입니다. 앞으로 더 멋진 작품을 내놓겠죠.”

“우리 훈이가 잘나긴 했지.”

할아버지가 찻잔을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무게를 잡으면서 내 자랑을 하시는 거 보니 장미래에게 팔불출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다.

“그 곁에 있고 싶습니다. 제 인생 최고의 화가와 함께 가슴을 울리는 전시회를 꾸리고 싶습니다. 훈이 그림을 다루고 싶습니다.”

방태호처럼 유능한 큐레이터가 내 그림을 다루고 싶다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말인가.

당장에라도 두 손 들고 환영하고 싶은 마음이나 할아버지는 차분하게 차를 마실 뿐이다.

할 말을 충분히 했는지 방태호도 할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할아버지가 마침내 잔을 내려놓았다.

“솔직하게 말해주니 알아듣기 훨씬 쉽구만.”

“예?”

“실은 전부터 제안은 많이 받았었네. 이곳저곳에서 훈이 컨설팅을 돕고 싶다고.”

방태호가 눈을 깜빡거렸다.

“훈이를 최고로 만들어준다든지, 자기들이 무엇을 잘하는지 잔뜩 자랑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

“그런 사람들에 비해서 방 팀장 말이 이해하기 쉽다는 뜻이었네.”

할아버지가 씩 하고 웃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큐레이터가 욕심을 낼 정도란 말이지. 흐흫흐.”

방태호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긍정했다.

“네. 훈이 그림에 어울리는 장소, 꼭 만들고 싶습니다.”

“껄껄껄. 그래. 아침이나 먹으며 천천히 이야기해 보세. 당장 뭘 할 수 있는 건 아닐 테고. 계획은 있으니 오지 않았겠나.”

기쁜 마음에 벌떡 일어난 순간 초인종이 또 한 번 울렸다.

오늘은 아침 손님이 많다.

인터폰 누르는 용도로 쓰는 골프채를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먼저 움직이셨다.

“누구세요?”

-택배입니다.

“택배? 시킨 게 없는데.”

할아버지가 주문한 물건보다 지인들이 보내오는 선물이 많다.

하루걸러 한 번씩 누군가가 무엇을 보내오니까.

-죄송한데 차량이 들어가야 해서요.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할아버지가 눈썹을 잔뜩 모으곤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얼마나 무거운 물건이길래 차가 안쪽까지 들어와야 하나 싶다.

“뭐가 온 거지?”

할아버지를 따라 신발을 신고 정원으로 나섰다.

어마어마하게 큰 트럭으로도 모자라 지게차도 함께 왔다.

나도 방태호도 놀라서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물건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트럭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한두 명이 아니다.

우르르 나와서 분주히 움직인다.

“이게 무슨. 누가 보냈어요?”

“어……. 헨리 말서우? 외국에 사시는 분이 보냈습니다.”

택배 회사 직원이 할아버지에게 송장을 넘겼다.

헨리 말서우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다. 할아버지의 지인인가 싶다.

“훈아, 저거.”

방태호가 불러서 고개를 들었다.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시야에 거대한 조각상이 들어왔다.

앙리 마르소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마르소의 보석>이다.

“이 미친놈이 저걸 왜 보내?”

할아버지의 말씀대로다.

“이봐요. 잠깐. 내리지 말아봐요. 거, 내리지 마시라니까!”

“일단 받으시고 나중에 돌려보내시든 하셔야 합니다. 어이, 거기 조심해. 비싼 거라고.”

가지고 다니기 힘들다고 거절한 조각상을 이렇게 보내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

마르소의 보석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또 하나를 내려놓으려 한다.

“저건 또 뭐야!”

“같이 보내셨어요. 저것도 조각상 같은데.”

“아니, 잠깐! 내리지 말라니까?”

“아이참. 어르신, 저희도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어떻게 그럽니까. 일단은 받으시고 나중에 보내신 분에게 돌려드리세요.”

“팀장님! 세 개 다 내렸습니다!”

“오케이! 어르신, 여기 서명 좀.”

할아버지가 택배 회사 직원과 옥신각신하시는 중에 대체 뭘 또 보냈는지 궁금하여 천을 걷었다.

“…….”

은색 <마르소의 보석>이다.

‘작품마다 어울리는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네 작품을 걸어두고 싶은 자리가 있으면 무슨 짓을 해서든 차지해.’

앙리 마르소의 말이 불현듯 머릿속에 스쳤다.

설마.

설마 하면서 세 번째 조각상을 가린 천을 걷으니, 전신을 채색한 <마르소의 보석>이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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