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59화
16. 금도끼 은도끼(3)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요.”
“이 녀석이 또.”
“그렇잖아요. 1억 원이라고요. 포테이토 피자를 3,570판이나 먹을 수 있는 돈이잖아요.”
“돈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고 했잖아!”
“열심히 공부하는 거랑 돈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한국 초등학교로 가는 도중에도 할아버지와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생각해 보세요. 그 돈이면 물감은 얼마나 살 수 있고, 짜장면은 또 얼마나 먹을 수 있는데 왜 꼭 거길 가야 해요?”
“안전하고 시설 좋고 교사들 인성도 바르니까!”
“그럼 국립 학교는 위험해요? 국립 학교 교사는 성격에 문제 있어요?”
“상대적으로 그렇단 말이지. 아, 이 녀석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학비 이야긴 또 어디서 들었어?”
“어디서 들은 것보다 1억이나 드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래. 큰돈이긴 한데 너 공부하는 데 들어가는 돈은 하나도 안 아깝다고.”
“있을 때 아껴 써야 해요. 부자라고 돈 막 쓰면 큰일 나요.”
“그런 거 걱정 안 해도 돼! 할아버지 돈 많다니까 자꾸 그러네?”
“언젠가 갚아야 하는 건 저라고요!”
“그걸 왜 갚아!”
“좋아요. 그럼 제 돈 내고 다닐게요.”
“세상 어느 초등학생이 학교를 자기 돈 내고 다녀?”
“그러니까 국립 다니면 되잖아요.”
요즘 들어 할아버지와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잦아졌다.
나도 나지만 할아버지 고집은 좀처럼 꺾을 수 없다.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미술관에 안 데려가 준다는 협박 때문에 대부분 내가 양보하게 된다.
분하다.
“……다녀오겠습니다.”
패배를 시인하자 할아버지가 한없이 인자한 미소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네.”
차에서 내렸다.
어차피 다니기로 했으니 돈이 아까워서라도 악착같이 배워야지 싶다.
첫 수업에서는 무엇을 배울지 기대된다.
“쟤 고훈 아니야?”
“맞아. 뉴튜브에서 봤어.”
묘하게 주목받는 듯하다.
“작아.”
“몇 학년일까?”
“귀엽다.”
“나 그저께 우리 엄마랑 전시회 갔었는데. 사람 엄청 많았어.”
주변 아이들의 대화가 여과 없이 들린다.
8살부터 13살까지 다니는 기초 교육 시설이라고 알고 있는데, 확실히 내가 듣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점이 아이들답다.
“그럼 주가도 좀 올랐어?”
“아니. WH배움 미술관은 비상장 기업이야.”
“왜?”
“재단 기금으로 운용할걸? 수익 일부도 기부한다고 들었어.”
“아, 비영리야?”
“으응. 사회적 기업. WH그룹이 사회 환원 목적으로 만든 곳이야.”
“아, 우리 할아버지 회사에도 비슷한 거 있어.”
“나두.”
당황스럽다.
이 시대의 아이들은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지 아는 것도 많은 듯.
고작해야 내 또래로 보이는데 대화를 따라갈 수 없다.
학우들과 친분도 나눠야 할 텐데 비상장이니, 비영리 기업이 어떻고 저쩌고 하는 이야기를 내가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교무실에 먼저 들르라고 했지.’
복도를 지나 교무실 문을 두드렸다.
“아, 훈이구나.”
어제 학교를 안내해 준 담임 교사 최지호 선생님이 반겼다.
30대 초반으로 젊은 교사지만 오늘부터는 내 스승이니 깍듯이 대해야 한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자, 가자.”
최지호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교실로 향했다.
“친구들도 다 착해서 금방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네.”
아이들의 대화 수준을 보면 그러긴 힘들 것 같지만 사랑으로 대하면 분명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거다.
“여기야.”
3학년 3반 교실에 이르렀다.
원래라면 4학년에 다녀야 할 나이지만, 작년에 학교를 다니지 않은 탓에 3학년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은 내게는 한 학년이라도 아래부터 시작하게 되어 다행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공간에 아이는 네 명뿐이다.
‘학비가 그렇게 비싸니 다니는 아이가 없지.’
예상대로 아이가 없다.
내가 다녔던 빌럼 2세 국립중학교는 한 학급이 못해도 백 명은 되었는데, 나를 포함해도 고작 다섯 명뿐이다.
아마도 연간 1억 원이나 하는 학비 탓이리라.
그건 그렇고 아이들이 다들 똘망똘망하니 귀엽다.
단정한 차림과 밝은 얼굴을 통해 가정에서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도 잘 받았는지 이 나이 아이들답지 않게 차분히 앉아서 수업을 기다린다.
“오늘은 전학 온 친구가 있어. 훈아, 친구들한테 인사하자.”
“안녕. 고훈이야.”
“안녕!”
어색하게 인사하자 학우들이 낭랑한 목소리로 반겨주었다.
한 아이는 아까부터 무엇을 끄적이고 있지만 굳이 무리해서 눈을 마주할 필요는 없으리라.
“훈이는 외국에서 오래 생활해서 우리나라에 대해 잘 모른대. 친절하게 알려주자?”
“네!”
참으로 밝고 기운 넘치는 아이들이다.
보고 있으면 흐뭇하다.
“저기 빈 책상이 훈이 자리야.”
고개를 숙이고 펜을 움직이는 아이 옆자리다.
자리에 앉아 태블릿을 꺼냈다.
“자, 그럼 수업 시작하자.”
첫 시간은 국어.
어제 다운로드 받은 PDF 파일이라는 것을 열었다.
<금도끼 은도끼>라는 문학 작품을 공부할 차례다.
‘도끼’라는 단어는 처음이라 톡톡 누르니 ‘hache’라고 한다.
금과 은으로 만든 도끼라니.
부잣집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라 그런지 첫 수업부터 심상치 않다.
“자, 천천히 읽어보고 이야기 나누도록 하자.”
아직 한글을 능숙하게 읽을 순 없는데 다행히 읽을 시간을 충분히 주셨다.
이야기는 한 나무꾼이 낡은 도끼를 연못에 빠뜨리면서 시작되었다.
망연자실한 나무꾼 앞에 ‘산신령’이라는 초월적 존재가 나타나 금도끼를 보여주며 묻는다.
‘이 도끼가 네 것이냐.’
정직한 나무꾼은 아니라고 답했고 산신령은 은도끼를 꺼내 같은 질문을 했다.
그마저도 아니라고 답하자, 나무꾼의 솔직함을 높이 산 산신령이 금도끼와 은도끼를 함께 주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배우는구나.’
단어가 조금씩 달라서 몰랐지만 아이소포스가 지은 이야기를 각색한 모양.
도끼를 주는 신은 본래 헤르메스인데 여기서는 ‘산신령’으로 바꾸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구나.’
그리스 시대 사람이 지은 이야기가 지금도 지구 반대편에서 다뤄지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처음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천국에 온 듯했는데,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은 여전하다.
10살 정도의 어린아이들을 상대로도 유익한 이야기다.
“다 읽은 것 같으니까 무엇을 느꼈는지 한 사람씩 이야기해 보자. 현우부터 해볼까?”
최지호 선생님이 손을 번쩍 든 아이에게 호응했다.
“정직하게 살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무리한 상황을 조성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해?”
“아무도 정직한 것만으로 금을 주지 않으니까요. 자루를 제외한 도끼 무게가 약 3㎏이라고 가정하면 2억 원 정도 하는데 이 돈은 뛰어난 사람을 2년 정도 고용할 수 있는 돈입니다.”
“……?”
귀가 잘못됐나.
“멋진 생각이네. 현우는 그럼 어떤 상황이 좋을지 한 번 더 생각해 보도록 하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최지호 선생님도 이상하다.
“다음은 훈이가 말해볼까?”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초롱초롱 빛나는 저 눈빛들이 이제는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한국말로 하기 어려우면 영어로 해도 괜찮아.”
최지호 선생님의 배려가 잘못되었다.
정직하라는 교훈 외에 생각나는 게 없어서 당황했을 뿐이다.
고민하다가 영어를 꺼냈다.
“아이소포스 이야기를 잘 각색했다고 생각합니다. 산신령은 잘 모르지만 헤르메스랑 비슷한 신이겠죠?”
“맞아. 훈이가 좋은 이야기를 짚었는데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전래동화가 아니라 이솝 우화를 각색한 거야.”
“아~”
아이들이 천진난만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어? 아이소포스가 이솝이야?”
한 아이가 제법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물었다.
“난 우리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나두.”
“너 영어 잘한다. 어디서 배웠어?”
“영국 영어 같은데? 맞지! 영국 어디서 살았어? 난 빌리어네어 로우에서 살았는데!”
요새 아이들은 무섭다.
* * *
오후 1시.
학우들에게 시달리다가 겨우 귀가할 수 있었다.
시간 맞춰 데리러 오신 할아버지도 깜짝 놀랐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힘들어요.”
“누가 괴롭히든?”
괴롭힐 의도는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시달리긴 했다.
“요새 애들은 애들답지 않네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하자 할아버지가 크게 웃었다.
“흐학핳하! 너보다 애 같지 않은 애가 또 있어?”
“말도 마세요. 쉬는 시간에 뭐 하는지 보니까 자산 배분인지 뭔지 하고 있더라고요.”
“음?”
할아버지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산 투자? 그런 걸 해야 한대요. 주식이랑 달러, 금, 부동산?”
기억나는 단어를 열거했지만 이해하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 똑똑한 친구구나. 훈이 너도 언젠가는 다 알아야 하는 지식이야.”
“그림만 그리고 싶어요.”
“흠.”
할아버지가 고민하시더니 뜻밖의 말씀을 꺼내셨다.
“그러지 않아도 방태호 팀장이 말하더라. 훈이 네가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고 싶어요.”
“자산운용이야 할아버지 아는 사람에게 맡기면 되고. 문제는 매니저인데, 매니저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
“비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앙리 마르소 곁에 있는 사람이 떠올랐다.
항상 함께하며 그가 할 일을 대신 처리해 주는 것 같은데, 아마 그런 사람을 말씀하시는 게 아닐까.
“좀 다르긴 하지만 그래, 비슷하게 생각하면 되겠지. 네가 방송에 나가고, 누군가에게 일을 의뢰받고, 전시회를 할 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구나. 할아버지가 다 해주고 싶지만 그런 걸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에 비할 순 없으니까.”
하긴.
전시회가 시작된 뒤로 할아버지의 스마트폰이 잠잠했던 걸 본 적 없다.
작업 시간까지 빼앗기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던 차.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도 할아버지에게도 편하겠다.
“구해요.”
“그래.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보자꾸나.”
“방태호 아저씨한테 맡기면 안 돼요?”
“방 팀장?”
고개를 끄덕이니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