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54화
15. 쇼콜라티즘(1)
WH배움 미술관 특별 전시실에 입장한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술에 익숙한 사람도.
단지 흥미로 찾은 사람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 전시실은 입구부터 갖은 소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지팡이 모양의 큰 사탕과 비스킷으로 만들어진 오두막, 초콜릿 폭포까지 마치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녀의 집 같았다.
보기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시실 곳곳에 관람객이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음료가 놓여 있었다.
전시회를 수없이 다닌 김지우도 당황했다.
“이거 먹어도 돼요?”
“네.”
한 관람객이 문의했다.
간식 앞에 서 있던 직원은 웃으며 사탕과 초콜릿이 든 작은 포장지를 챙겨 주었다.
손에 묻히지 않고 한입에 먹을 수 있는 간식을 고른 듯했다.
“전시회가 원래 이래?”
“몰라.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인데.”
“귀엽다. 그림은 안쪽에 있나?”
김지우가 주변을 살피는 와중에도 관람객은 속속들이 입장했다.
생각지도 못한 콘셉트라 망설이던 김지우도 서둘러 발을 옮겼다.
‘아.’
두 번째 방에 들어선 김지우가 속으로 감탄했다.
앞선 방처럼 화려하게 치장되진 않았지만 고훈의 그림으로 더욱 화려하게 느껴졌다.
‘어떡해.’
김지우가 <행복> 앞에 섰다.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초콜릿 파이가 살짝 녹아 있었다.
큰 붓으로 한 번에 그려낸 듯한 초콜릿 질감에서는 당장에라도 흘러내릴 듯한 율동감마저 느껴졌다.
‘언제 먹었더라.’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달콤함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어느 순간 먹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의 즐거움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먹고 싶다.’
김지우가 아쉬운 대로 앞서 받은 간식 주머니의 리본을 풀었다.
초콜릿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지만 <행복>이 그리고 있는 기억 속의 맛을 느낄 순 없었다.
“이것 좀 봐. 너무 귀엽다.”
“진짜.”
뒤쪽에서 들린 대화에 고개를 돌린 김지우가 웃고 말았다.
두 개의 초콜릿 파이가 서로를 끌어안은 듯 얽혀 하트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해바라기>와 <손님> 같은 그림을 기대해서 당황했지만, 이 전시회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준비한 인사말을 연습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가슴이 쿵쿵거리는 탓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다.
마침 할아버지가 대기실로 들어오셨다.
“사람 많이 왔어요?”
“어휴. 말해 뭐 해. 난리다. 난리.”
할아버지를 따라 웃을 수 없다.
아무도 안 오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하지만, 너무 많이 오는 것도 긴장된다.
어찌 되었든 첫 번째 전시회니까.
지난 한 달 동안 TV를 봐도 인터넷에 접속해도 전시회 홍보 영상이 뒤따랐다.
그만큼 큰 기대를 받는 것이다.
사 주는 사람도 있을까.
할아버지, 방태호 큐레이터와 함께 경매에 올릴 작품 외에는 가격을 정해두었다.
너무 비싸서 사고 싶어도 못 사는 경우를 가격을 너무 떨어뜨리지 않는 선에서 줄이고 싶었다.
‘……아니야.’
사랑받고 있지 않은가.
다시 눈을 뜬 지금도 앙리 마르소와 리처드 필립스, 가면 쓴 남자까지 내 그림을 사고 싶어 한 사람이 있지 않았나.
좀 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설사 몇 달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보다 잘할 수 없을 만큼 노력했다.
똑똑-
“작가님, 슬슬 준비해 주세요.”
문밖에서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숨을 크게 내쉬고 일어나자 할아버지가 내 양 볼을 감쌌다.
하실 말이라도 있는가 싶어 기다리는데 말씀은 없고 사정없이 주물렀다.
“왜 이래요!”
“흫흐흐. 이뻐서 그래. 이뻐서.”
“아파요!”
할아버지를 뿌리치고 도망치려 해도 워낙 힘이 세 그럴 수 없다. 발광하니 그제야 톡톡 두드리고 웃으신다.
“할아버지가 보기엔 최고야.”
“……정말요?”
“그럼. 누구 그림인데. 고수열 손자 고훈 그림 아니냐. 당연히 최고지.”
할아버지가 잘 그린다고 손자가 인기 있고 잘 그릴 리 없다.
아무 근거 없는 말씀이다.
그러나 저 확고한 눈과 목소리에 안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응원해 주시는 걸 보니 긴장하지 않으려 해도 티가 났던 모양이다.
“최고.”
“그래.”
씩 하고 웃으니 할아버지도 호방하게 미소 지었다.
문을 열고 나섰다.
내빈석으로 향하는 할아버지와 헤어져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방태호 큐레이터가 기다리고 있다.
“긴장할 줄 알았는데. 씩씩한데?”
지금이라면 전쟁터에도 뛰어들 수 있다.
주먹을 쥐어 결의를 보이자 방태호가 고개를 젖혀 웃는다.
“정말 많이 왔어. 반응도 좋고. 대성공이야.”
첫 번째 방을 실제 과자와 소품으로 챙기고, 두 번째 방과 세 번째 방을 내 작품으로 꾸민 것은 순전히 방태호 큐레이터의 발상이었다.
전혀 다른 화풍의 네 번째 방과 분리하기 위해, 그 사이에 내가 인사하는 자리를 마련해 둔 것도 좋은 생각이었다.
두 번째 방과 세 번째 방에서의 여운을 충분히 느낌으로써 주변을 환기할 수 있으니.
<서리 밀밭>이 전시된 네 번째 방은 또 달리 느껴질 거다.
“덕분에요.”
“덕분은. 모두 네 그림 덕이지. 사실 나도 놀랐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많이 왔더라. 유럽이랑 일본에서도 오고. 참, 앙리 마르소도 왔던데?”
“…….”
눈치도 없지.
오지 말라고 추신까지 적어놨는데 굳이 왜 왔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의지를 다지며 쥔 주먹을 곧장 써먹어야 할 수도 있겠다.
내 첫 전시회에서도 난동을 부리면 이번에는 쌍코피를 터뜨려 주리라.
“그러면,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 고훈 작가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박수로 환영 부탁드립니다.”
문밖에서 사회자가 입장을 알렸다.
“가자.”
방태호와 함께 밖으로 나서자 생전 처음 받아 보는 박수 소리가 가슴을 때렸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카메라 불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다.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
카메라 소리가 잦아들고 나서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장미래, 피에르 말로, 리처드 필립스, 마틴 얀센, 미셸 플라티니, 케빈 맥컬리, 김지우, 이인호, 돈 많은 양아치까지 초대장을 보낸 사람 모두 와 주었다.
객석이 모자라 서 있는 사람이 바글대고 그들 너머 3전시실과 2전시실을 구경하는 사람도 볼 수 있다.
단상이 높아서 다행이다.
침을 삼키고 마이크 앞에 섰다.
다행히 사전에 연습한 덕분에 마이크를 조절하느라 웃음거리가 되지 않아도 되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점잖게 그러나 미소를 띠며 다시 한번 손뼉을 쳐 주었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준비했던 말을 까먹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되는대로 이야기를 풀었다.
“간식은 하루에 하나만 먹기로 할아버지와 약속했어요.”
“흡.”
누군가 웃어서 고개를 돌리자 김지우가 정색하며 시치미를 뗐다.
재밌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고 아주 중요한 말을 꺼냈는데, 김지우뿐만 아니라 다들 실실거린다.
이유를 알 수 없다.
“매대 앞에서 저는 매일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떤 게 가장 맛있을까. 무엇을 먹어야 오늘 하루가 행복할까. 과자 종류는 너무나 많고 기회는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끄으읍.”
다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장미래다. 입을 틀어막고 인상을 쓰는데 꼭 우는 것 같다.
아직 이 시대 사람들과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서 그런가.
대체 무슨 말에 감동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무엇을 선택하든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또 그렇게 고민하는 시간조차 행복했어요. 겨우 천 원으로 행복을 즐기고 살 수 있는 게 믿기지 않더라고요.”
“흐응.”
이번에는 다들 턱을 당기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는다.
“그것은 마치 미술관과 같았어요. 모르는 작가의 그림을 만났을 때, 그에게 다가갈 약간의 용기만 있다면 행복해지는 경험이요. 제 그림들이 여러분께도 즐거운 기억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워요!”
고개를 숙이니 김지우가 큰 소리로 호응했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지만 손뼉 치는 사람들의 표정도 즐거워 보인다.
다행이다.
“고훈 작가의 귀여운 인사말이었습니다.”
사회자가 진솔한 인사를 귀엽다고 치부해 버렸다.
“질의응답 전에 한 가지 당부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고훈 작가는 그림이 자신의 의도대로만 이해받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작가의 의도와 달리 감상했더라도 존중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이해해 주시고 질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회자가 방태호에게 반복해서 부탁한 이야기를 언급해 주었다.
“네, 안경 쓰신 기자님.”
이인호다.
“대한일보 이인호 기자입니다. 약도를 보면 이 옆에 4전시실이 있는데 커튼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곳에 피에르 말로가 액자를 만들어 준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까?”
가볍게 깍지를 끼고 도도하게 앉아 있는 피에르 말로와 눈을 마주쳤다.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한 그가 어깨를 으쓱인다.
“네. 이 자리를 빌려, 액자를 선물해 준 피에르 말로에게 다시금 감사 인사 드립니다. 고마워요, 말로.”
인사 끝에 프랑스어로 직접 인사를 건네자 그가 기품 있게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별나지만 참 멋진 사람이다.
“참고로 4전시실은 고훈 작가와의 대담 이후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사회자가 식순을 공지하고 다음 사람을 지목했다.
“네, 뒤쪽에 활기찬 기자님.”
아까부터 폴짝폴짝 뛰며 손을 든 김지우다.
“예화 김지우입니다! 그림 아래 가격을 명시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방태호가 마이크를 들었다.
“고훈 작가와 논의하여 정한 일입니다. WH배움 미술관은 투명한 작품 거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경매에 올린다면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겠지만, 고훈 작가는 돈을 더 받는 것보다 자신이 정한 가격을 인정받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경매가 진행되지 않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4전시실에 전시된 작품은 모두 경매에 부칠 예정입니다. 우리 WH배움 미술관이 판단하기에 그 가치가 특출하고 경쟁이 심해질 것으로 우려해 부득이 경매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김지우가 또 손을 흔들었지만, 사회자가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
“네. 앞쪽에 계신 신사분.”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남자가 일어섰다.
“다나카 히로부미. 미술평론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