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53화
14. 첫 전시회(5)
전시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할아버지와 방태호 큐레이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오직 그림만 그렸다.
모든 전시회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으나 첫 개인전이니만큼 지금의 나를 모두 담아내고 싶었다.
고민도 많았다.
지금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형상은 무엇일까.
새 삶을 얻은 기쁨과 당혹.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화한 세상의 경이로움.
할아버지를 만난 행복을 표현할 형상을 찾고 또 찾았다.
처음에는 이 집이었다.
내 감정을 상징하는 물체로선 이 집보다 확실한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이곳이야말로 내 행복의 원천이니까.
그러나 이내 그만두었다.
전경을 그리기도, 창문과 현관문을 따로 그리기도 했지만, 그것들이 내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진 않을 것 같았다.
나와 전시회에 올 사람들 사이에 고리가 필요했고.
그렇게 음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포테이토 피자부터.
할아버지가 소개하고 사 주신 여러 음식은 그분의 사랑과 이 시대를 함축한다.
동시에 그림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나와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부모가 귀가하며 사 온 피자, 치킨을 먹는 자식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적어도 난 그렇다.
아무리 맛이 없어도 부모가 직접 차린 저녁상을 가족이 함께 먹는 자리는 또 얼마나 기쁜가.
하루에 한 번. 신중하게 고른 과자를 입에 넣었을 때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포테이토 피자, 짜장면, 양념치킨, 몽 셰르 통통을 그대로 그려서는 조금도 의미 없다.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끌어낼 수 없다.
전처럼 사물에 내 감정을 담되.
이제는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을 벗어나야 한다.
이들에게 나는 아이다.
전과 같이 그렸다간 그저 과거의 명장을 잘 따라 하는 어린애로 남을 뿐이다.
변화가 필요하다.
<해바라기>와 <손님>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내가 수묵화와 색연필화를 연습하면서 기존의 내 화풍과 융화를 이뤘기 때문.
빈센트 반 고흐가 지금 얼마나 사랑받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태양의 화가.
영혼의 화가라는 수식어에 가슴이 벅차오르나 그것은 모두 과거의 나를 향한 말이다.
그 명성에 취해.
안주할 생각 따위 조금도 없다.
다시 주어진 삶의 기적이 단지 나를 위로하기 위함은 아니리라.
풍족한 환경과 다정한 가족, 건강한 몸을 얻었음에도 빈센트 반 고흐를 향한 찬사에 취해 있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그릴 것이다.
27살, 화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을 때와 같은 마음으로.
위대한 화가들이 남긴 수많은 편지를 필사함으로써 그들을 이해하고 마침내 내 글을 쓸 것이다.
붓과 물감으로 적은 영혼의 편지를 전시회란 이름의 우체통에 넣을 것이다.
* * *
2028년 2월 26일 토요일.
서울시 한남동 WH배움 미술관 일대가 마비되었다.
작년부터 천재 화가로 화제를 모은 고훈이 첫 전시회를 열기 때문이었다.
미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단순히 어린 천재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으로 미술관 앞이 북적였다.
“히이~”
월간지 예화의 김지우 기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줄에 기가 질렸다.
WH배움 미술관의 넓은 부지가 무색했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미술관 앞부터 부지 입구를 넘어서 거리까지 차지했다.
‘대체 몇 명이야?’
너무나 낯설었다.
적어도 그녀의 기자 생활 중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줄을 이룬 전시회는 없었다.
“입장 9시부터 아니야?”
“응. 아, 움직이네.”
“입장비는 얼마야?”
“공짜.”
“진짜? 그럼 돈은 어떻게 벌어?”
“그림 사는 사람도 있고 스폰도 붙을걸? 광고 같은 거. 나도 잘 몰라.”
“너 미대 다니잖아.”
“전시회 해봤어야 알지.”
김지우 기자는 자기 앞을 지나가는 대학생들의 대화에 눈을 빛냈다.
그들 말고도 대부분 전시회를 찾는 게 낯설어 보였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왔다는 것은 사장되다시피 했던 미술계에 고무적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고훈이라는 뛰어난 천재가 미술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반드시 그래야 해.’
그녀에게 그림은 밥줄이었다.
동시에 유일한 취미였다.
미술계가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본 김지우는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다해 고훈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영세한 잡지사의 일개 기자일 뿐이지만, 그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다.
“어?”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의 시야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짙고 선명한 눈과 둥글게 말린 콧수염.
사진과 영상으로만 봤던 인물이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피에르 말로잖아!’
프랑스 파리 샤똥의 6대째 주인 피에르 말로.
액자 장인으로 널리 알려진 선대를 뛰어넘었다고 평가받고, 모든 화가가 선망하는 명인 중의 명인이었다.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그녀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주변을 서성이던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피에르 말로 씨! 고훈에게 액자를 만들어 주셨단 소문이 사실입니까?”
“고훈과는 어떤 관계신가요?”
피에르 말로의 수행원들이 접근을 막았지만 기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피에르 말로가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매만지며 답했다.
“저는 고훈 작가를 열렬히 지지해요. 그에게 액자를 선물한 것도 사실이고요. 너무나 즐거운 경험이었죠.”
피에르 말로의 발언에 기자들이 더욱 흥분했다.
세계적인 장인이 대한민국의 천재 소년을 인정했으니 기사 조회 수를 올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어떤 그림이었습니까?”
“어떤 점을 높이 평가하셨는지 자세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피에르 말로가 기자들을 진정시켰다.
“그의 작품을 보지 않은 분들께 선입관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럼.”
피에르 말로가 자리를 피하려 할 때 한 기자가 소리쳤다.
“고수열 화백의 청탁이 있었습니까?”
순간 피에르 말로가 걸음을 멈추었다. 만면에 띤 여유로운 미소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고훈에게 액자를 만들어 준 이유가 무엇인지 답변 부탁드립니다!”
피에르 말로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기울인 채 질문한 기자를 빤히 노려보았다.
“뭐야? 왜 저래?”
“뭐라고 했는데?”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이 싸늘해진 분위기에 수군거렸다.
김지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몹시 불쾌하네요. 나를 청탁에 움직이는 사람으로 여기는 건가요?”
“아니라면 이유를!”
“덕분에 유쾌했던 기분을 망쳤어요. ……가죠.”
피에르 말로가 수행원들과 함께 발을 옮겼다.
피에르 말로의 차가운 태도에 아무도 나서지 못했을 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김지우가 틈을 비집고 나서서 외쳤다.
“피에르 말로 씨!”
피에르 말로는 돌아보지 않았다.
김지우가 포기하지 않고 소리쳐 물었다.
“당신도 고훈에게서 희망을 보셨나요? 용기를 얻었나요!”
프랑스인들이 영어를 쓰지 않는다곤 해도 피에르 말로가 알아듣길 바라며 간절히 물었다.
“고훈이 당신의 액자를 소화할 수 있었나요?”
그녀에게 고훈은 특별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다시금 일어날 힘과 내일을 기다릴 용기였다.
나날이 무너지는 미술계를 다시금 대중 앞에 선보일 희망이었다.
피에르 말로가 아무리 대단한 장인이라고 해도 고훈을 돋보이게 하지 못한다면.
되레 그 명성에 고훈이 가려진다면 아무 소용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그를 담을 수 있었나요!”
피에르 말로가 고개를 돌렸다.
냉담하게 짝이 없는 표정으로 콧수염을 잡아당겼다.
“그걸 확인하러 왔어요.”
답변 뒤에 작은 미소.
피에르 말로가 대답해 주었다는 생각에 벅차오른 그녀가 상기된 채 녹음기를 뻗었다.
* * *
작은 잡지사 기자에게 피에르 말로 인터뷰를 빼앗긴 언론인들은 잔뜩 성이 나 있었다.
고작 11살 먹은 소년의 전시회를 찾고자 세계 제일의 장인이 찾아왔는데, 그 기사를 날려 먹고 만 것이었다.
“눈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뭘 어쩌자고 시비를 터?”
“아무리 그래도 상도덕은 지켜야지. 대체 뭐 하는 새끼야?”
기자들은 눈치 없이 피에르 말로의 심기를 건드린 인간을 탓했다.
입장이 시작되었으니 내부 취재를 해야 하나 싶던 순간.
“리처드 필립스다!”
그들 앞에 리처드 필립스가 나타났다.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19.1%를 점유한 파인애플사의 수석 제품 디자이너가 마르소 갤러리에 이어 WH배움 미술관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에게 질문을 쏟아내던 중, 뒤로 밀린 기자들은 아쉬워할 새도 없이 움직여야 했다.
“장미래 교수님! NBC에서 나왔습니다! 고훈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요?”
장미래를 발견한 기자들이 치열하게 인터뷰 경쟁을 했다.
“오늘 전시회에 어떤 도움을 주셨습니까?”
“고훈은 지금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까?”
장미래가 웃으며 답했다.
“스승이라니. 전혀 아니고요. 훈이랑은 서로 배우는 사이에요.”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작가이자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믿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고훈의 천재성은 알고 있으나 장미래는 앙리 마르소와 함께 작년과 재작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손꼽힌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11살 아이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입장이라고 하니, 기자들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
“늦어서 실례할게요.”
기자들이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더 물어보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WH배움 미술관에서 마중 나온 직원들이 장미래를 수행하는 바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러던 차.
뒤에서 여러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란 기자들이 뒤돌았다.
은회색 정장에 고동색 넥타이.
짙은 갈색 머리를 뒤로 넘기고 잿빛 코트를 걸친 외국인 남자가 선글라스를 고쳐 끼고 있었다.
“아, 앙리 마르소!”
미술계 최고의 아이콘이자 문제아 앙리 마르소가 또 한 번 고훈을 찾은 것이었다.
서울 미술관, 마르소 갤러리에 이어 세 번째.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인 그가 이토록 관심을 보인 화가는 없었다.
“대체 뭐야?”
“아니. 정말 첫 전시회 맞아? 무슨 방문객이…….”
“마틴 얀센 아니야? 그 재벌.”
“얀센 이사장님!”
WH배움 미술관 앞은 유명 인사들과 그들을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 그리고 기자로 잔뜩 소란스러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앙리 마르소가 잔뜩 인상을 쓰고 불평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죄송합니다. 차량 진입이 제한되어서 부득이했습니다.”
“칫.”
앙리 마르소가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앙리! 완전 팬이에요! 사인 좀 해주세요!”
그중 한 미대생이 그에게 스케치북과 연필을 보였다.
앙리 마르소가 그녀와 스케치북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죽거렸다.
“내 사인이 얼만 줄 알아?”
“아…….”
“핸드폰 내놔.”
“네, 네?”
“내놓으라고.”
학생이 당황해서 스마트폰을 꺼내자 그것을 받아든 앙리 마르소가 머리를 옆으로 쓸어넘기며 셀프 카메라를 작동했다.
그에게 반쯤 안긴 학생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떡해. 어떡해!”
“우리 말은 어떻게 해. 미술 해?”
“네! 대학 다녀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 앙리가 스마트폰을 내던지듯 넘겼다.
“가보로 여겨.”
학생이 앙리에게 인사를 하기도 전에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앙리 마르소 씨! 고훈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이번에도 고훈 작품을 사기 위해 오셨습니까?”
“고훈과의 불화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들이 순식간에 그의 앞을 막았다.
그들이 질문을 쏟아내며 눈앞에 마이크를 들이밀자, 앙리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비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