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52화 (305/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52화

14. 첫 전시회(4)

엽서 도안은 정했지만 정작 초대할 만한 사람이 몇 없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드리고.

장미래도 와 줬으면 한다.

반 고흐 미술관의 케빈 맥컬리에게 안 보낼 순 없고.

초대하기로 약속한 마르소 갤러리의 미셸 플라티니도 잊어선 안 된다.

물론 할아버지의 친구 리처드 필립스와 마틴 얀센에게도 보내고 <서리 밀밭> 액자를 만들어 준 피에르 말로를 빼놓을 순 없다.

명단을 적으니 더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이 사람들한테도 보낼까.’

보내지 않아도 올 것 같지만 또 그리 야박할 수 있나.

내 기사를 써 준 김지우와 이인호의 연락처도 적었다.

열 명도 안 되는 명단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먼저 오고 싶다고 말한 미셸 플라티니는 그렇다 쳐도 케빈, 필립스, 마틴, 말로는 너무 멀어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아도 바쁜 사람들인데 내 전시회를 보러 지구 반대편까지 올지 의문이다.

“훈아!”

고민하던 차 장미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만나자마자 부둥켜안는다.

“보고 싶었어~”

부담스럽다.

억지로 밀어내니 서운해한다.

“이모 안 보고 싶었어? 이모는 훈이 어엄청 보고 싶었는데?”

너무 즐거워서 보고 싶단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상처받겠지.

“보고 싶었어요.”

“그렇지? 우우우웅. 귀여워.”

또 끌어안아 볼을 문댄다.

“뭐 하고 있었어?”

“초대할 사람 적고 있었어요.”

명단을 보여주자 장미래가 웃었다.

“선생님도 초대하는 거야?”

할아버지에게 초대장을 드리지 않으면 분명 실망하실 거다.

“나도 있네?”

장미래처럼 훌륭한 화가가 내 그림을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또 조금씩 바꿔나가고 있는 화풍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기대된다.

“꼭 와주세요.”

“그럼. 누구 전시회인데. 아, 리처드 필립스 선생님도 있네?”

“알아요?”

“아는 것뿐이겠어? 예전에 수업도 들었는데.”

“필립스가 교수였어요?”

어떤 물건을 만드는지는 몰라도 제품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한 학기만 하셨어. 대학에서 초청해서.”

“유명해요?”

“엄청. 네가 쓰는 파인애플 태블릿도 필립스 선생님이 디자인한 거야.”

인류가 낳은 기적을 디자인했다고 하니, 리처드 필립스가 왜 돈이 많은지 알 것 같다.

“마틴 얀센? 반 고흐 재단 이사장?”

“네. 오베르에서 신세를 져서요.”

장미래가 입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셸 플라티니……. 이 사람도 익숙한데. 마르소 갤러리 큐레이터였나?”

“맞아요.”

“그래. 수완이 좋다고 하더라. 친해졌나 봐.”

“손님을 잘 전시해 줬거든요.”

장미래가 흐응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다가 말로의 이름을 보더니 호들갑 떨었다.

“세상에. 피에르 말로?”

“액자 만들어 줬어요. 꼭 초대할 사람이에요.”

“하긴 그렇지.”

장미래가 <서리 밀밭>을 보여달라고 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눈썹을 좁혔다.

“왜? 무슨 일 있어? 누가 훈이 시무룩하게 했어?”

“초대할 사람이 적어서요. 이 중에 올 수 있는 사람도 몇 없고. 보낼 사람이 더 없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앙리 마르소 전시회처럼 터져나가길 바라진 않지만 되도록 많이 왔으면 좋겠다.

내가 깨어난 병원 사람들에게도 초대장을 보내야 하나 싶다.

“그래? 난 다 와 줄 것 같은데?”

장미래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부럽다.

방태호 큐레이터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닌 만큼 고민이 많아진다.

‘앙리 마르소에게도 보낼까.’

미친놈이긴 해도 어찌 되었든 첫 발표작을 사 준 사람이다.

보내는 것이 도리이리라.

어차피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은 놈이니 정말 올 리도 없다.

명단에 앙리 마르소라고 적자 장미래가 웃는다.

“왜요?”

“이름이 안 보여서 초대 안 하나 싶었는데 결국 적는구나?”

“어차피 안 올 사람이니까요. 그림도 사 줬고. 초대장을 안 보내면 다음에 누가 제 그림을 사려고 하겠어요.”

그림을 사 준 사람을 박하게 대하면 소문이 안 좋게 날 수 있다.

평판으로 먹고사는 화가에게는 치명적이다.

“흐응. 그 사람 어땠어?”

“뭐가요?”

“인상이라든가.”

“미.”

미친놈이라고 하려다가 예쁜 말을 쓰라고 하셨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정신 나간 인간이요.”

이 정도면 충분히 순화한 듯한데 장미래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이모가 몰라서 그래요. 제정신이 아니에요.”

실력은 확실하지만 도대체 뭐가 그리 예민한지 툭 하면 성질을 부리는데, 만날 때마다 자기 분을 못 이겨 발광한다.

“아, 진짜 오랜만에 웃는다.”

끅끅대며 겨우 웃음을 멈춘 장미래가 눈물을 닦았다.

“전시회 콘셉트는?”

“콘셉트?”

“응. 주제라든가 분위기. 큐레이터가 요청하지 않았어?”

“마음대로 그리래요. 전시는 알아서 하겠다고.”

장미래가 눈을 깜빡였다.

“왜요?”

“엄청 소중히 여기는구나 싶어서.”

좋은 조건을 제시해 주고 이런저런 편의도 봐주고 있어 그런가 싶다.

“작품을 만드는 건 당연히 작가 몫이지만, 전시회는 어디까지나 팀플레이이거든.”

협력하는 일이라는 뜻이리라.

“보통 전시회는 시간을 길게 두고 이야기해. 작가가 원하는 방향이 있을 테고 큐레이터는 여러 조건과 상황을 따지면서 다듬으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근데 WH배움 미술관처럼 대형 미술관은 좀 더 적극적이거든.”

“적극적이요?”

“응. 보통은 자기 미술관 수준에 맞는? 어울리는? 전시회를 하고 싶어 해. 워낙 큰 곳이니까 작가도 마냥 거절할 수 없고.”

알 것 같다.

미술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음에는 안 부르지 않을까 하는 고민.

“그런데 네게 전적으로 맡긴다는 건 네 화풍이라든가 관점을 바꾸고 싶지 않다는 뜻이야. 소중하게 여기는 거지.”

종종.

아니, 항상 생각한다.

건강한 몸을 얻은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할아버지를 비롯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게 현실일까.

너무나 기쁘고 벅차서 어쩔 줄 모르겠다.

“다들 훈이 그림에 푹 빠진 거야. 너무너무 멋지니까.”

그림.

“아직이에요.”

“응?”

현대 화가들의 기술은 과거 그 어떤 대가를 데려와도 비할 수 없다.

할아버지와 장미래도 그렇고.

앙리 마르소도 그렇다.

기교뿐인가.

색을 활용하는 방식과 상상 밖으로 놀라운 발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쥐고 마구 흔든다.

또 툴루즈 로트렉과 피카소처럼 경계를 허물고 회화의 지평을 넓히려는 인물도 많다.

배워야 할 것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지금 내게 만족할 수 없다.

더 멋진 그림.

가슴을 움직이는 그림.

그로 인해 잠시나마 위안과 힘을 얻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전 훨씬 더 멋진 그림을 그릴 거예요.”

* * *

장미래는 열한 살 소년의 다짐에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해바라기>가 200만 유로.

<손님>이 400만 유로.

첫 전시회는 대한민국 최고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가 직접 초대했다.

어린아이가 아니고 성인이라도 우쭐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훈은 달랐다.

이미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아갈 정도로 유명해졌음에도, 깐깐하기로 정평이 난 유럽 평단이 칭송하고 있음에도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다른 화가의 작품을 보고 분석하며 따라 그림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채워나갔다.

“지금도 엄청 잘 그리잖아. 그런데도 더 잘 그리고 싶어?”

“네.”

고훈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단호히 답했다.

“좋아하니까요.”

처음에는.

고훈이 그저 어려서,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새집>도 <해바라기>도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걸작이었으니까.

혹시 자기보다 ‘잘 그리는’ 사람과의 경쟁심리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유명 화가의 그림을 반복해서 따라 그리는 모습에 혹시나 고훈이 자신만의 화풍을 잃진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그 모든 우려가 기우일 뿐이었다.

단지 좋아하기에.

더 잘 알고 싶고, 더 많이 이해하고 싶고, 더 잘 그리고 싶은 것뿐이었다.

어쩌면 이리도 순수할 수 있을까.

어떠한 욕심도 없이 그저 그림을 대하고 싶은 그 마음이 너무나 깨끗했다.

“멋진데?”

장미래가 고훈의 머리를 헝클었다.

평소에는 순해 보이면서도 인상을 팍 쓰는 것조차 귀여웠다.

* * *

우편물을 넘기던 미셸 플라티니는 대한민국이란 단어를 반겼다.

고훈이 보내온 전시회 초대장이었다.

‘글씨 잘 쓴다. 다른 사람이 받아 써 줬나?’

그림을 잘 그리니 글자도 잘 쓰는 건가 싶었지만, 글씨가 너무 못생긴 앙리 마르소를 생각하면 그렇지만은 않았다.

‘2월 26일…….’

2028년 2월 26일부터 3월 4일까지 일주일간 이어지는 첫 전시회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안 남았네.”

곁에서 차를 마시던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안 남아?”

“고훈 전시회.”

미셸이 스케줄러를 열어 일정을 확인했다.

봄을 맞이해 마르소 갤러리의 분위기를 대대적으로 교체하는 중이라 시간이 빠듯했다.

‘비행기 안에서 처리하면 되겠지.’

그러나 <해바라기>와 <손님>에서 받은 감동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면, 어느 정도의 무리는 감수할 수 있었다.

일정을 확인하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찻잔을 든 채 초대장을 곁눈질하는 그를 보곤 속으로 웃었다.

“2월 26일부터 일주일이라는데. 어쩔 거야?”

미셸의 질문에 앙리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어쩌긴 뭘. 바쁜 거 몰라?”

“그래? 그럼 혼자 가야겠네.”

미셸이 어깨를 으쓱이곤 다른 우편물을 확인했다.

마르소 갤러리 대표 취임을 축하한다는 인사, 앙리 마르소와의 공동 전시회 제안 등 여러 소식을 확인하던 중 대한민국에서 보내온 또 하나의 우편을 발견했다.

‘두 장이나 보냈네.’

미셸이 의아해하며 보니 앙리 마르소에게 온 초대장이었다.

“큽.”

초대장을 확인한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자신이 받은 초대장과 달리 앙리의 초대장에는 추신이 붙어 있었는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미셸이 초조해하는 앙리를 보곤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같이 가지?”

“어딜?”

“고훈 전시회.”

“내가 거길 왜 가?”

<마르소의 보석>을 받지 않은 일에 아직도 삐진 듯했다.

“초대장도 보냈는데?”

앙리가 고개를 돌렸다.

미셸이 고훈이 그에게 보낸 초대장을 들고 흔들었다.

그가 언제까지 속내를 감출 수 있을지 놀리는 게 즐거웠다.

“관심 없어.”

“정말?”

“없다니까.”

“그래.”

미셸이 우편물을 정리하여 테이블 위에 두었다.

“나 세미나 있어. 바로 퇴근할 건데 당신은 어쩔래?”

앙리 마르소가 목 근육을 풀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할 일 남았어.”

일부러 우편물 쪽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씩 하고 웃은 미셸이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방을 나섰다.

“…….”

앙리 마르소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망설였다.

자신을 그토록 뒤흔든 <해바라기>와 <손님>을 그렸던 고훈이 어떤 작품을 전시할지 좀처럼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화해의 의미를 담았던 <마르소의 보석>을 거절한 괘씸한 꼬맹이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 초대한다고 해서 수락하기엔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초대장 보는 건 괜찮잖아.’

앙리가 시선을 옮겼다.

미셸이 쌓아둔 우편물 맨 위에 고훈이 보냈다는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

톡- 톡-

테이블을 두드리던 그가 손을 뻗었다.

아이답지 않은 필체로 직접 쓴 초대장이었다.

앙리 마르소에게.

고훈입니다.

귀하의 관심과 도움으로 첫 전시회를 준비하였습니다.

“흥.”

앙리 마르소가 콧방귀를 뀌었다.

‘건방진 놈. 내 덕이라는 건 알고 있구만.’

흡족해진 그가 시선을 내렸다.

평범한 문구가 이어졌다.

일상의 작은 행복도 나눔으로써 큰 행복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느꼈던 경이로운 세상을 귀하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어른으로서 한 번 정도는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애는 애구만.”

초대장을 대충 훑은 그가 마지막 문장을 확인했다.

추신. 바쁘실 테니 꼭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앙리 마르소의 얼굴이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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