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51화
14. 첫 전시회(3)
“흠.”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작품이 고가에 거래되는 화가에게는 무엇보다 미술관과의 수익 배분율이 중요하다.
특히나 그림 가격이 한 작품당 10억 원 이상으로 형성된 고훈의 경우에는 1퍼센트가 조정되는 것만으로도 수천만 원 이상 수익이 추가되었다.
표준 계약에서 20퍼센트를 더 챙겨올 수 있으니, 작품 거래액을 10억 원으로 기준 잡았을 때 최소 2억 원.
고수열이 보기에도 방태호는 WH배움 미술관이 양보할 수 있는 한계치를 제시했다.
“임대 금액도 상정하셨는가.”
“네. 작품당 50만 원을 희망합니다. 대상은 이번 전시회에 게시될 모든 작품으로요.”
이 역시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작품 10점을 임대한다고 가정하면 한 달에 500만 원, 1년이면 6,000만 원에 달하는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신인 대우가 아니야.’
고수열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30호 캔버스 작품이 한 달 동안 대여되는 가격은 보통 5만 원에서 10만 원 사이로 형성되었다.
사실 최근 고훈의 인기와 그림 가격을 고려하면 50만 원이 아쉽기도 하나, 그렇게 되면 수익 비율을 조정해 준 WH배움 미술관이 가져가는 이득이 전혀 없을 것.
고수열은 방태호 큐레이터가 고훈을 초대하기 위해 상당히 공들였음을 인정했다.
작품 거래가 활발하고, 높은 가격이 예상되니 판매와 관련된 사항은 양보하고.
대신 고훈의 그림을 지속적으로 전시할 권리를 찾겠단 의도였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고수열이 납득한 대로 방태호 큐레이터는 고훈을 잡기 위해 그가 꺼낼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꺼냈다.
작품은 하나뿐이니 고훈의 그림을 직접 보기 위해서는 WH배움 미술관을 찾아야 하고.
자연스럽게 독점 계약이 이루어진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화가의 작품을 독점 전시할 수 있으니 미술관으로서도 어느 정도의 지출을 감수해야 했다.
그렇게 조율한 파격적인 조건.
고훈도 전시회 이후 남은 작품을 놀리지 않고 대한민국 최고의 미술관에 전시할 수 있으니, 방태호는 고수열이 거절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고수열이 씩 하고 웃었다.
“많이 생각하셨겠어요.”
방태호 큐레이터가 고개를 숙였다.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애썼습니다.”
“핳하하!”
두 사람이 웃음을 나눴다.
방태호가 입맛을 다셨다.
“처음에는 힘들었습니다. 저야 훈이에게 확신이 있지만 회사 입장에선 조심할 수밖에 없었죠.”
“이해해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지원을 받았습니다.”
“지원?”
“네. 훈이가 손님을 발표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그것도 마르소 갤러리에서.”
앙리 마르소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고수열도 그 일이 고훈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갤러리에 자신 외 누구의 작품도 걸지 않았던 앙리 마르소.
사실과는 다르나 언론은 그가 고훈의 그림을 받기 위해 직접 찾아갔다고 보도했다.
더군다나 전시실 하나를 통째로 내주었으니 고훈의 인지도가 치솟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마르소의 코피를 터뜨린 게 더 주요한 것 같지만요. 다음 날 바로 승인해 주더군요.”
“흐핳하하!”
고수열이 호탕하게 웃었다.
방태호와 고수열을 번갈아 보던 고훈이 입을 열었다.
“그림을 빌려주기도 해요?”
두 사람의 대화를 대략 파악했지만 작품을 임대하는 방식이 그에게는 낯설었다.
“아.”
계약 당사자인 고훈에게 설명이 부족했음을 깨달은 방태호가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해바라기가 28억 원에 팔렸잖아.”
“네.”
“그 돈이 쉽게 쓸 수 있는 수준은 아니야. 엄청 큰돈이지. 그래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개인뿐만 아니라 미술관도.”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자 하나에 얼마인지 파악하면서 현재 화폐 가치를 이해했고, <해바라기>와 <손님>이 얼마나 비싸게 팔렸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첫 발표작 <해바라기>는 앙리 마르소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난 몰랐다고 쳐도.’
고훈은 현대 화폐 개념이 옅었던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금액을 요구했는지, 또 그것을 받아들인 앙리 마르소가 <해바라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새삼 놀라웠다.
‘정말 좋아했나 보네.’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액수가 워낙 컸다.
“그래서 일정액을 주고 대여하는 거야. 그럼 화가도 팔리지 않는 작품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고, 또 안 팔린다고 가격을 낮출 필요도 없지. 갤러리 측에선 위험부담을 줄이면서 전시할 작품을 얻을 수 있고.”
방태호의 설명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말하다가 느낀 건데 너무 어렵게 설명했나? 혹시 이해 안 되는 게 있으면.”
“아니에요. 이해했어요. 서로 나쁘지 않네요.”
고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가 쓰지 않는 어려운 말로 설명한 것 같아서, 쉽게 설명할 방법을 생각하던 방태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열한 살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닌데, 무리 없이 대화가 이어가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천재는 다 이런가?’
고훈이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얼마나요?”
“이제 정해야지. 난 1년 생각하고 있어. 임대 기간에 그림이 팔리면 중도에 해지하는 조건으로.”
고훈이 할아버지를 보았다.
나쁘지 않은 조건 같았으나, 임대 방식의 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그로서는 고수열에게 확인받는 쪽이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우리 훈이가 좋은 분을 만났구나.”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 미술계의 거목이 판단하기에도 방태호 큐레이터가 내건 조건은 훌륭했다.
WH배움 미술관은 고훈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대신 고훈의 작품을 장기 임대하는 것으로 미술관 방문을 유도할 수 있고.
고훈은 작가가 챙길 수 있는 모든 사항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으니 양쪽 모두 만족스러운 조건이었다.
“좋아요.”
고훈이 방태호에게 계약 의사를 밝혔다.
“그럼.”
방태호가 반복해 설명하며 계약서의 빈 곳을 채워나갔다.
거기에 고훈이 서명하고, 고수열이 보호자 자격으로 확인했음을 증명했다.
첫 초대전 계약을 마친 고훈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작가님.”
거기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름을 부르던 방태호가 격식을 차렸다.
고훈은 그가 내민 손을 기쁘게 맞잡았다.
“잘 부탁드려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고수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신 김에 훈이 그림도 한번 보셔야죠.”
“실은 가장 먼저 보고 싶었습니다.”
방태호가 솔직하게 답했다.
장인 피에르 말로가 흔쾌히 액자를 만들어 준 그림이 어떨지 기대되어 안달이 나 있었다.
“하하. 훈아, 안내해 드려야지.”
“이쪽으로 오세요.”
고훈이 방태호를 작업실로 안내했다.
설렌 마음으로 발을 옮긴 방태호는 작업실 벽에 걸린 <서리 밀밭>을 본 순간 표정을 잃었다.
황량한 밀밭에서 전해져 오는 경건함이 그를 숙연하게 했다.
‘이거야.’
<해바라기>에서 느꼈던 울림이었다. 감성적인 색채에 동한 마음이 과감한 붓 터치에 엄숙해졌다.
고훈의 그림은 밝지 않았다.
도리어 너무나 초라하고 피폐하여 이것을 그린 열한 살 아이의 내면이 걱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의지가 느껴지기도 했다.
상처 입은 해바라기가 눈부시게 빛나듯, 혹독한 바람과 서리에도 그저 씨앗을 품고 견디는 대지의 숭고한 희생이 용기와 희망을 말해주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밀밭이 그 증거였다.
‘이걸 찾고 있었어.’
방태호는 그가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작가를 만난 듯했다.
고훈의 그림은 난해한 철학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무엇을 그렸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승화하고자 하는 의지일 테고.
그것은 그림을 보는 사람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서로 다른 이유로 삶에 지친 이들에게 오늘을 버텨낼 용기와 내일을 기다릴 희망을 주었다.
방태호는 고훈의 그림이야말로 이 시대가 바라는 바를 녹여낸 그림이라고 확신했다.
“이건.”
큐레이터를 떠나, 미술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방태호가 입을 열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겠는데요.”
* * *
방태호 큐레이터는 WH배움 미술관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고훈 초대전을 준비했다.
별도 CF 제작에 들어갔으며, 공연‧전시‧미술 크리에이터 마흔 명을 추려 고훈 초대전 홍보를 의뢰했다.
고훈의 <해바라기>를 꽃이 개화하는 영상을 만들어, 지하철 터널 동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해송 고수열 화백의 손자이자 현재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었기에 기업들의 후원도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방태호 큐레이터가 사전에 준비해 두었던 일을 차근차근 밟아나가자, 대한민국은 금세 고훈 초대전에 대한 기대로 휩싸였다.
기자들은 WH배움 미술관과 고수열 자택 근처를 서성였다.
고훈이 현재 어떤 작업을 하는지, 피에르 말로가 액자를 만들어 준 작품은 어떤 그림인지 어떻게든 확인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무슨 작업을 하는지 고훈은 집 밖으로 나서는 법이 없었으며, 기자들은 방태호 큐레이터와 고수열 화백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방태호 씨! 고훈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지 일주일째입니다! 안에서 대체 무슨 작업을 하고 있습니까?”
“공개할 때가 되면 보도자료 보내드리겠습니다. 조금 더 기다려주십시오.”
방태호가 질문을 피하고 고수열의 자택으로 들어섰다.
질문을 쏟아내던 기자 중 한 사람이 바닥을 차며 불평했다.
“적당히 해야 할 거 아냐. 적당히. 이렇게 숨기기만 해서 어쩌자는 거야?”
호기심을 유도하는 방식이라곤 해도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WH배움 미술관의 대대적인 홍보와 고훈의 이름값에 비해 <고훈 초대전>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시피 했다.
전시회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문예부 기자들은 이 신경전이 대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한편.
고수열의 자택에 들어선 방태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러 작가와 함께했지만 이처럼 큰 관심은 처음이었다.
어린 천재라는 점과 단기간 안에 쌓인 흥미로운 일화 그리고 마음을 흔드는 그림까지.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요소를 갖추었어도 예상을 한참 웃도는 반응이었다.
고훈이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오늘은 어땠어?”
“똑같아요.”
평소와 다름없다는 말에 방태호가 안심했다.
평소처럼 그림을 그린다면 걱정할 일이 조금도 없었다.
“들어오세요.”
“아니야. 오늘은 이거 주려고 왔어.”
방태호가 엽서 뭉치를 꺼냈다.
“이게 뭐예요?”
“전시회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초대장 보내거든. 시안 만들어 왔는데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보라고.”
“아.”
고훈이 엽서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마음에 드는 거 알려주면 되고. 초대장 보낼 사람들도 정리해 줘. 모레까지 할 수 있을까?”
“네. 문제없어요.”
고훈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직한데? 촬영이랑 인터뷰 있는 거 기억하지?”
“뭐 하면 되는데요?”
“그냥 물어보는 거 대답만 해주면 돼. 편하게.”
방태호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인 고훈을 기특하게 여겼다.
“그럼 가볼게.”
“아, 잠깐만요.”
방태호는 자신을 불러세우고 거실로 향한 고훈을 의아하게 봤다가 웃고 말았다.
고훈이 좋아하는 초콜릿 파이를 두 개 가져온 것이었다.
“아저씬 괜찮아. 훈이 많이 먹어.”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돌려보내요. 이거 맛있어요. 안 받으면 후회해요.”
“핳하하.”
도대체 아이인지 어른인지 모를 말이었다.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면서 과자를 주는 게, 어른스럽긴 해도 아이는 아이구나 싶었다.
“그럼 하나만 가져갈게. 고마워.”
“후회할 텐데.”
방태호가 다시 한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무슨 대화 나누셨습니까?”
“전시회 테마는 어떻게 되죠?”
고수열 저택을 벗어나자 기자들이 다시 질문을 쏟아냈다.
혼쭐이 난 방태호는 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어휴. 이거 매번 이러면 좀 벅찬데?”
고개를 저은 그가 생각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초콜릿 파이를 한 입 먹었다.
부드러운 향과 식감 다디단 초콜릿이 지친 그를 위로했다.
“……하나 더 받을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