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50화
14. 첫 전시회(2)
두 달간의 유럽 여행을 통해 고훈의 인지도가 솟구쳤다.
세계적인 대가 앙리 마르소와 합동전을 가진 일부터 빈센트 반 고흐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장인 피에르 말로가 고훈에게 액자를 제작해 준 사실까지 알려지니 유럽과 대한민국에서는 고훈을 더 이상 주목할 만한 신인 정도로 취급할 수 없었다.
언론사들은 앞다투어 고훈을 다루고자 했다.
고훈의 스타성을 잡아낸 대한일보 김준용 편집장은 이인호 기자를 독촉했고.
그 역시 고훈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던 중, 고훈이 귀국했음을 파악하자마자 고수열 학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빨리해야 하는데.’
이인호 기자는 언제 연락해도 되는지 묻는 취재 문의 메시지를 보내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대한일보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언론사는 모두 고훈을 예의주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한 번 안면을 텄기에 남들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놓고 있을 순 없었다.
부우웅-
때마침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황급히 메시지를 확인한 이인호 기자가 굳어버렸다.
{훈이가 전시회 작업으로 바쁘니 다음에 뵙도록 하지요.}
{미안합니다.}10:33
전시회를 홍보해야 하지 않겠냐며 설득할 수도 있겠으나 상대는 다름 아닌 거물 중의 거물 고수열이었다.
억지로 만남을 요청했다가 사이가 틀어지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손해였다.
‘전시회가 기대되네요. 하루빨리 보고 싶어집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답장을 보낸 이인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편집장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잠깐. 미술관 쪽에 연락하면 되지 않을까.’
고훈과 직접 인터뷰하는 건 무리더라도 큐레이터와 이야기 나누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들도 전시회 홍보에 신경 쓸 테니, 큐레이터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인호가 WH배움 미술관을 검색했다.
세계적 그룹사 WH그룹 재단이 설립한 미술관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을 제외하고 대한민국 최대 규모였다.
국보와 보물을 제외한 소장품은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수석 큐레이터 방태호는 TV, 라디오, 뉴튜브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유명인사였다.
단순 추측 기사만 하루에 백여 개가 올라오는 상황.
이미 많은 사람이 커뮤니티 사이트와 댓글을 통해 고훈과 방태호 큐레이터의 만남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하. 쉽지 않겠는데.”
편집장의 강요로 인해 시작한 일이나, 고훈을 만난 뒤로는 그의 성공을 확신했던 이인호도 고작 두 달 만에 상황이 이렇게까지 뒤바뀔 거라곤 예상치 못했었다.
‘지금은 뭐 하고 있으려나.’
이인호 기자가 우선 고훈이 유럽에서 한 행동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신중해야 한다.
기회를 허투루 낭비하기엔 그에 따르는 위험이 너무나도 크다.
“훈아, 골랐어?”
“아직이요.”
침착하자.
할아버지가 재촉하지만, 하루에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간식을 함부로 고를 순 없는 법이다.
스낵류는 바삭한 식감 덕에 가장 즐거운 간식이다.
그 폭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감자 칩만 하더라도 수십 종으로 아직 먹어보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사탕 또한 포기하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청포도 향이 나는 사탕은 집에 있으니 몰래 꺼내 먹으면 될 터.
하지만 이 네 가지 색상의 사탕은 대체 어떤 맛일지 너무나 궁금하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렇게 색이 구분된 제품은 색마다 맛과 향이 다르다.
이걸 사면 네 가지 맛을 한 번에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초콜릿을 두고 떠날 수 있으랴.
그래. 초콜릿이 없이는 오늘 하루가 힘겨울 것이다.
‘되도록 양이 많은 게 좋지.’
고개를 돌리니 내 몸통만 한 상자에 든 과자들이 눈에 띈다.
초콜릿이 든 물건도 상당히 많다.
‘이건 당류가 14g.’
당류가 높은 것일수록 달다는 걸 깨달은 나를 고혹적인 초콜릿 사진으로 속일 순 없다.
‘몽 셰르 통통?’
과자 이름이 사랑하는 아저씨(Mon Cher Tonton)라니.
대체 무슨 의도지?
초콜릿으로 감싼 아름다운 파이에 왜 사랑하는 아저씨란 이름을 붙였을까.
“으으음.”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어 고민하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이 녀석아, 해 떨어져.”
“이거 맛있어요?”
할아버지가 고민하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게다. 어서 사서 집에 가자.”
“하루에 한 번밖에 못 먹는 간식이에요. 신중하게 골라야죠.”
“저걸 설마 하루에 다 먹으려고?”
“그렇게 정했잖아요.”
“배 터지겠다. 두 개만 먹어.”
하나만 먹으라고 하셨으면 포기했겠지만 두 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부디 내 혀를 만족시켜 주길 바란다.’
이 초콜릿 파이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부디 유능한 셰프이길 바란다.
계산을 치르고 나서서 상자를 열었다.
하나를 꺼내 할아버지에게 권했다.
“괜찮아. 할아버지는 단 거 안 좋아해.”
“뭐든 나눠 먹어야 해요.”
“아이. 괜찮대두.”
“빨리요.”
할아버지가 마지못해 사랑하는 아저씨를 받았다.
나도 하나 들어 포장지를 뜯었다.
‘아, 이건 성공이다.’
밀봉에서 벗어나자마자 잠들어 있던 초콜릿이 기지개를 켰다.
코를 통해 깊숙이 들어온 달콤한 향이 오늘 하루를 축복한다.
“합.”
크게 한입 물었다.
“…….”
이것은 악마다.
대체 이 농염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풍족한 식감과 짙고 부드러운 향이 내 영혼을 타락시킨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물건이 있을 수 있지.
위험한 걸 알면서도 먹을 수밖에 없다.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줄어드는 것이 안타깝다.
‘하나만 더 먹을까.’
하지만 허용된 두 개를 모두 먹어버리면 오늘 밤이 너무나 길게 느껴질 것이다.
‘아.’
나는 어찌 이다지도 나약하단 말인가. 어쩔 수 없이 하나를 더 꺼내려는데 할아버지가 날 불렀다.
“훈아.”
“네?”
“큼. 하나 더 줄래?”
“……단 거 안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많이 걸었잖아. 할아버지 나이엔 당 떨어지면 큰일 나. 빨리 하나 줘 봐.”
남은 건 여섯 개.
할아버지와 하나씩 더 먹어도 네 개나 남는다. 아니, 네 개뿐이다.
“…….”
고심 끝에 두 개를 드렸다.
“아니야. 하나만 줘.”
“두 개 드세요.”
“하나면 돼.”
“나중에 다른 말 하시면 안 돼요?”
“아무렴. 할아버지 못 믿어?”
믿는다.
고작 이 파이 하나로 내가 할아버지를 의심하다니.
이 얼마나 불경한 간식이란 말인가.
“…….”
딱 하나만 더 먹도록 하자.
* * *
WH배움 미술관 방태호 수석 큐레이터는 지난 두 달간 고심했다.
전시회 콘셉트를 정해야 하는데 혹시나 본인의 제안이 고훈의 개성에 영향을 주진 않을까 우려되었다.
한참 성장하는 천재가 주변 영향 없이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고 싶었다.
방태호는 일정이 다소 연기되더라도 고훈의 생각을 충분히 듣고 나서 정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몇 점 정도 그렸으려나.’
작품 수도 기대되나 여행 도중 그린 작품이 장인 피에르 말로의 눈에 들었단 사실이 가장 흥미로웠다.
방태호가 초인종을 울렸다.
-누구세요?
앳된 목소리가 울렸다.
고훈의 목소리를 들은 방태호가 반갑게 인사했다.
“아저씨야. 방태호.”
-잠시만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계단을 오르고 정원을 가로지르자 고훈이 현관문을 힘차게 열었다.
“안녕하세요.”
“씩씩한데? 잘 지냈어?”
두 달 만에 만난 고훈이 전과 달리 무척 밝아 보여, 방태호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네.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선 방태호가 고수열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실례합니다, 학장님.”
“어서 와요.”
고수열도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저녁 전이면 식사하며 이야기하죠.”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가 저녁 식사를 제안하자 방태호가 부담스러워하며 웃었다.
“괜히 이 시간에 찾아뵈었습니다. 수고스럽게.”
“아니야. 오늘 훈이랑 화방도 들르고 해서 시간이 없었어요.”
고수열 옆에서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럼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준비해 두었으니 손 씻고 와요.”
“네.”
저녁을 먹으며 유럽에서 있던 일을 말하던 중 방태호가 깜짝 놀랐다.
“50점이나?”
약 두 달 동안 그림을 50점이나 그렸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에 한 장 꼴로 그렸단 말이었다.
“전시할 만한 그림은 많이 없어요.”
고훈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루에 한 점 완성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고훈은 그것을 일상처럼 여겼다.
“그림 그리는 거 말곤 아무것도 안 해요. 껄껄.”
고수열의 말에 방태호가 헛웃음 지었다.
‘천재는 다르긴 다르네.’
확실히 그렇게 많이 그리니, 저 어린 나이에 <해바라기>와 <손님>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터였다.
“그보다 루브르 가보셨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구경도 못 하겠더라고요.”
“하하. 정말 정신없지. 뭐 봤어?”
“드농이랑 리슐리 위주로 봤어요. 쉴리는 나중에 꼭 다시 가보려고요.”1)
“쉴리는 정말 괜찮아. 이집트 문화권 유물을 그렇게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도 드물 거야.”
방태호는 입을 앙다물고 아쉬워하는 고훈이 그저 귀여웠다.
“그건 그렇고. 음. 이미 이야기는 됐지만 확실히 해야 해서.”
방태호의 말에 쉴리관을 구경하지 못한 걸 애석하게 여기던 고훈이 고개를 들었다.
“계약 말이야. 선생님도 같이 봐주시겠습니까?”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서로 합의된 일이라 하더라도 서면계약 없이 진행할 순 없는 법이었다.
방태호가 계약서를 꺼냈다.
“이건.”
표준 계약서가 아니었다.
일정과 계약 비율, 콘셉트, 세부 내역이 공백으로 처리된 서류에 고수열이 의문을 제시했다.
“네. 평소처럼 처리한다면 어느 정도 요구할 이야기가 있지만 전 훈이의 첫 전시회는 최대한 자유로운 환경을 조성해 주고 싶습니다. 훈이를 좋아하는 분들도 그걸 바랄 테고요.”
“음.”
“다만 비율과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수입이 있어야 하기에 세부 조항을 따로 만들 예정입니다.”
“계속 말씀하시게.”
“일반적으로 50 대 50으로 가기에는 지금까지 훈이 그림이 거래된 금액이 너무 크기도 하여, 1억 원 이하 거래에는 60 대 40. 초과액 거래 시에는 4,000만 원으로 고정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흐음.”
사실 말이 안 되는 조건이었다.
전시회를 하고 싶은 사람이 줄을 이룬 WH배움 미술관에서 제시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기엔 파격적이었다.
고훈의 공시가격을 고려하면 거래액 1억 원은 아무런 제한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이지.’
고수열은 방태호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고민했다.
그가 아무리 고훈을 높이 평가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미술관 큐레이터와 작가의 관계.
이런 계약을 미술관 측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결재해 줄 리 없었다.
더더욱 부대비용을 전적으로 WH배움 미술관이 부담하는 초대전.
“훈이 작품을 해설할 도슨트와 프로모션 모두 최고 수준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이런 조건을 제시했으니 원하는 것도 있지 않겠나.”
방태호는 순간적으로 변한 고수열의 눈빛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습니다.”
서투른 수작 따위 부릴 생각 없었다.
처음부터 방태호는 고훈에게 최대한 좋은 조건을 주기 위해 지난 두 달간 운영진과 조건을 조율해 왔었다.
그렇게 찾은 최선을 전할 뿐이었다.
“개인전이 끝나면 훈이 그림을 임대 형식으로 상설 전시하고 싶습니다.”
* * *
1)드농(Denon):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전시된 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복도로 알려진 ‘대회랑(Grande Galerie)’이 있다.
리슐리(Richelieu): 나폴레옹 아파트, 함무라비 법전, 마를리 궁내 등으로 유명한 관.
쉴리(Sully): 이집트, 그리스 유물이 전시된 관. 루브르 박물관의 옛 모습도 일부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