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7화 (300/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47화

13. 툴루즈 로트렉(2)

오베르를 좀 더 그리고 싶지만 <서리 밀밭>처럼 운반이 힘든 경우도 있고, 날이 쌀쌀한 탓에 풍경화를 그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아쉬운 대로 액자가 완성되길 기다리며 할아버지와 파리를 관광했다.

식사 시간을 오래 가지는 프랑스 문화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파리의 유명 식당을 다녔는데, 끼니마다 두 시간씩 아주 소량의 음식을 다양하게 즐기니 마치 고대 로마의 귀족이 된 듯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미루고 미뤘던 오르세 미술관을 구경한다.

아침 일찍 나서서 낮은 건물이 길게 이어진 좁은 도로를 따라 걸었다.

“다 왔다.”

할아버지의 말씀에 고개를 돌리니 오른쪽 위로 뒤돌아 앉은 청동상이 여럿 있다.

“여기가 오르세 미술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작품은 모두 구경할 수 있다는 오르세 미술관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있고 저 멀리 코끼리 청동상도 보인다.

좋은 느낌이다.

놀란 것은 미술관의 규모.

한쪽 벽을 끼고 꽤 오래 걸었는데, 그것이 전부 오르세 미술관의 외벽이었다.

여기도 제대로 구경하려면 며칠이나 걸릴지 모르겠다.

그만큼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작품이 많이 전시되었단 뜻이니 퍽 설렌다.

할아버지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말로구나.”

할아버지가 반갑게 전화를 받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고맙단 인사를 전했다.

“벌써 다 만들었대요?”

“그래. 내일 찾으러 오라는구나.”

약속한 2주가 아직 안 되었는데 피에르 말로가 서둘러 준 모양이다.

방태호 큐레이터와 한 약속도 있어서 액자를 받으면 곧장 서울로 돌아갈 계획이었거늘.

오르세 미술관은 오늘 하루로 만족해야 할 듯싶다.

“어쩌냐. 천천히 구경하면 좋을 것을.”

“다음에 또 오면 되죠.”

천천히 돌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아쉽긴 하지만 오늘은 관심 있는 작가를 정해서 구경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할아버지도 그에 동의했다.

“그럼 누가 좋겠냐. 반 고흐?”

“아뇨.”

하루 있는 기회를 내 그림을 보는 데 쓰고 싶진 않다.

팸플릿을 넘기며 소개된 화가를 훑어보니 아는 이름이 많다.

위대한 스승 장 프랑수아 밀레.

마네, 귀스타브 쿠르베, 폴 고갱, 로댕까지.

그러나 이보다 반가운 사람이 있을까.

툴루즈 로트렉.

작은 키에 바다 같은 마음을 가졌던 오랜 벗도 소개되어 있다.

“로트렉이요.”

“음. 멋진 화가지. 가자.”

할아버지가 계단을 오르며 로트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툴루즈 로트렉은 대단한 화가였단다. 그 파블로 피카소마저 반했던 남자지.”

로트렉 그 친구 출세했다.

그 뛰어난 파블로 피카소가 존경했다면 분명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을 터다.

“정말요?”

“그럼. 피카소가 어렸을 때 자기 방에다가 로트렉의 포스터를 걸어두었다고 하더구나.”

로트렉의 충실한 친구이자 피카소의 열렬한 팬으로서 참으로 기쁘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몽마르트에서 가장 재기발랄한 화가였으니 분명 내가 죽은 뒤에는 멋진 삶을 살았을 거다.

이보다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어떻게 살았어요?”

“흠. 짧고 화려한 삶이었지. 로트렉이 귀족이었단 건 알고 있니?”

짧고 화려한 삶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돈 많았어요.”

“핳핳하! 그래. 돈이 많아서 반 고흐한테 술을 그렇게 사 줬다고 한단다.”

덕분에 파리에 있을 땐 술값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내 형편에는 꿈도 못 꿀 비싼 술도 마셔 보고 말이다.

“…….”

그러고 보니 그 친구도 술을 참 좋아했는데, 혹시 짧게 살았단 말씀이 그와 관련된 건 아닌지 걱정된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할아버지가 로트렉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귀족이란 틀에 갇혀 지낼 인물은 아니었어. 부모에게 절연 당하면서도 그림을 그리며 살았고 또 인정받았단다.”

부모와의 일은 너무나 안타깝지만.

귀족으로 살아가길 바랐던 그분들의 바람을 이뤄주기에 로트렉은 너무나 자유로운 남자였다.

“특히 포스터가 인기를 끌었지. 물랭루주 공연 포스터를 아주 멋지게 그렸거든. 그 덕에 지금은 그를 모던 그래픽 아트의 선구자로 인정받지.”

물랭루주(Moulin Rouge: 빨간 풍차)?1)

“빨간 풍차에서 공연을 해요?”

“흐흫. 카바레 이름이야.”

주점 홍보 그림을 그렸단 말씀 같다.

대체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궁금해하니 할아버지가 웃으며 검색해 보라고 하셨다.

“여기서 보면 되잖아요?”

“포스터 작품은 다른 곳에 많거든.”

어차피 오르세에서 로트렉을 찾기 힘들다면 다른 곳에 가는 게 낫지 않나 싶다.

“멀어요?”

“멀지. 아테네 헤라클레이돈 미술관이나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툴루즈 로트렉 미술관은 그나마 가깝고.”

다음에 오면 로트렉 미술관에 꼭 들르도록 일정을 짜야겠다.

아쉬운 마음에 할아버지가 입장권을 사는 동안 툴루즈 로트렉이라고 검색해 보니 그림이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에글랑틴 무용단>이란 제목의 포스터다.2)

“흫.”

세상에나.

1896년에 그렸다고 하는데, 그 장난기가 여전했던 모양이다.

다리를 높게 들고 춤추는 세 명의 무용수 뒤에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한 붉은 머리 여성이 눈에 띈다.

‘이 사람이 마음에 들었구나.’

절도 있게 같은 자세를 취한 무용수들과 달리 맨 뒤에 서 있는 여성만 어설프다.

그녀에게 집중하라는 뜻이리라.

툴루즈 로트렉만의 애정 방식이다.

“뭐가 그리 재밌어?”

표를 사고 오신 할아버지에게 <에글랑틴 무용단>을 보여드리니 씩 하고 웃으신다.

“알아보겠어?”

“네. 보통 강조하고 싶은 인물은 크게 그리잖아요. 앞에 두거나. 잘 보이도록.”

“그렇지.”

“그런데 로트렉은 이 사람이 가장 마음에 들었나 봐요.”

할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맞다. 잔 아브릴이란 사람이야. 네 추측대로 로트렉이 아주 좋아했던 무용수지.”

이 친구의 엉뚱함은 사람을 참 즐겁게 한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기준에서 벗어나, 원초적인 흥미를 이끌어낸다.

저 어설픈 자세 덕분에 그녀가 누구인지, 왜 저렇게 춤을 추는지 궁금하게 하니까.

관심이 생기면 매력을 찾는 거야 시간문제.

모르긴 해도 분명 이 포스터를 본 사람들은 잔 아브릴이 춤을 얼마나 못 추는지 구경하고자 찾았을 거다.

“실제로는 매우 실력 있는 무용수였다고 하더구나. 비웃으려고 찾아왔던 사람들이 모두 팬이 되어 돌아갔대.”

잘난 사람을 잘났다고 홍보해봤자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믿는다고 해도 가서 구경해야겠다는 생각까지 이르긴 힘들다.

그 마음을 잘 이용한 듯하다.

잠깐 벤치에 앉아서 로트렉의 포스터를 좀 더 살폈다.

<다방 자포네>란 그림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 역시 잔 아브릴이란 여성이 모델이다.3)

영락없는 귀부인이다.

같은 사람을 그렸는데도 인상이 상당히 다르다.

연도를 알아보니 <에글랑틴 무용단>보다 3년 일찍 그린 작품이다.

“아.”

착각했다.

“이것도 알아보겠어?”

“네. 잔 아브릴이 주인공이 아니네요.”

툴루즈 로트렉의 장난에 깜빡 속을 뻔했다.

이 포스터는 왼쪽 위의 인물이 주인공이다. 팔꿈치를 가릴 정도로 긴 검은 장갑을 낀 여성.

그 앞에 지휘자와 현악기가 있으니 아마 다방 자포네에서 노래하는 가수인 듯하다.

“이 사람이 주인공이에요.”

“그렇지. 얼굴을 그리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음.”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단순히 흥미를 유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러기엔 가운데의 잔 아브릴이 너무 눈에 띄니까요. 관심은커녕 발견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좋은 접근이구나.”

이 얼굴 없는 가수를 알아볼 수 있는 건 검은색 긴 장갑이다.

“상징을 주고 싶었나 봐요. 이 장갑을 끼고 있는 사람을 주목했으면 좋겠다 혹은 긴 검은 장갑을 낀 가수는 이 사람이라는 인식을 만들려고요.”

할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신이구나. 정확해.”

“…….”

귀신이긴 했었다.

“로트렉은 작은 발견에서 얻는 기쁨을 전하고 싶어 했어.”

할아버지의 말씀에 백번 공감한다.

덕분에 로트렉의 작품은 조금만 살펴보면 무엇을 숨겼는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적당히 머리를 쓰는 수수께끼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영리한 친구다.

“이 가수는 이베트 길베르란 사람인데, 늘 검은 장갑을 끼고 노래했대.”

“이 포스터가 다방 자포네 오픈 포스터잖아요?”

“그렇지?”

“그럼 로트렉의 이 포스터 때문에 매번 검은 장갑을 끼고 다녔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예술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미지다.

기억하기도 쉽고 다른 사람과 차별성을 둘 수 있으니 말이다.

이베트 길베르도 로트렉이 부여한 상징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이베트 길베르는 로트렉 덕을 많이 봤단다. 로트렉이 매번 포스터를 그려준 덕분에 순식간에 인기를 끌었다지. 다른 포스터도 한번 찾아봐.”

또 어떤 그림으로 날 즐겁게 할지 기대하며 화면을 쓸었다.

“세상에.”

백설공주에게 사과를 건네주던 마귀할멈도 이보단 착해 보일 거다.4)

사람 몇 명은 죽여 본 얼굴이다.

<노래하는 이베트 길베르>란 작품은 툴루즈 로트렉의 유작이 아닐까 싶다.

틀림없이 이베트 길베르에게 맞아 죽었을 테니.

“아.”

이제야 할아버지의 말씀이 이해된다.

“이거 그리고 맞아 죽은 거죠? 그래서 짧은 생이라고 하신 거 맞죠?”

“하! 하핳하!”

할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었다.

* * *

1)물랭루주(Moulin Rouge): 1889년, 파리 몽마르트에 지어진 카바레. 캉캉 춤이 시작된 장소.

물랭루주가 당시 파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나, <다시 태어난 반 고흐>에서는 1890년에 사망한 빈센트 반 고흐가 요양원 생활로 경황이 없고 작품 활동에 집중한 탓에 물랭루주에 대해 모르는 것으로 설정했다.

1889년.

1월에 병원에서 퇴원한 반 고흐는 2월부터 3월까지 병원에 감금되었고 5월부터는 정신병원에 자진해 입원했다가 그해 반복된 발작으로 한해를 요양원에서 지냈다.

다음 해 1890년 7월 27일 사망.

2)<에글랑틴 무용단>, 툴루즈 로트렉, 다색석판화, 1896

3)<다방 자포네>, 툴루즈 로트렉, 다색석판화, 1893

4), 툴루즈 로트렉, 캔버스에 유화,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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