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6화 (29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46화

13. 툴루즈 로트렉(1)

할아버지와 함께 파리의 액자상을 찾았다.

3층 건물 전부 매장으로 활용할 정도로 큰 곳인데 이름은 샤똥(Chaton: 새끼 고양이)이다.

겉모습과 유리 너머로 보이는 내부 모두 호화롭기 그지없다.

“크지?”

“이름이랑 안 어울려요.”

“하하. 처음 시작했을 땐 작았거든. 아마 액자 다루기로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됐을 거야.”

오랜 세월 번창했다면 확실히 안목이 좋은 사람일 거다.

할아버지도 몇 번 거래한 곳이라고 하니 믿음이 생긴다.

매장 안에 들어서자 중년 남성이 할아버지를 반갑게 맞이했다.

콧수염이 둥글게 말려 있다.

“세상에. 고수열 경 아니십니까.”

“말로 씨.”

할아버지와 말로라는 남자가 악수를 나누었다.

“잘 지냈죠?”

“그럼요. 최근에는 즐거운 일뿐이에요. 하지만 경께서 방문한 오늘보다 즐거울 수 있을까요?”

“하하.”

아부라고 하면 어감이 안 좋고 사람 기분 좋게 하는 말을 잘한다.

“오우. 작은 반 고흐도 오셨군요.”

가슴이 철렁했다.

‘이 사람이 어떻게?’

경계하며 올려다보니 그가 미소 지었다.

“해바라기와 손님을 아주 인상 깊게 봤어요. 마치 반 고흐가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그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싶었죠.”

그런 걸 알 수 있을 리 없는데 괜히 놀랐다.

“감사합니다. 더 멋진 그림 보여드릴게요.”

이 시대의 예술을 좀 더 폭넓게 접하다 보면 분명 더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다.

반드시.

“정말 기대됩니다. 당신은 제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빛나는 사람이에요. 그 용기 잃지 마시길 바랄게요.”

기쁜 마음으로 액자상 말로가 내민 손을 잡았다.

어리다 보니 내게 격식체를 쓰는 사람은 드문데, 이렇게 대해주는 걸 보면 교양도 있고 품위도 지키는 훌륭한 사람 같다.

“30F 캔버스 넣을 액자를 찾고 있는데 말로 씨가 추천해 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가 포장한 <서리 밀밭>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럼요. 물론이죠. 커피라도 마시며 이야기 나누실까요?”

말로가 손뼉을 쳐 직원을 불렀다.

멀끔하게 잘생긴 남자가 다가왔다.

“커피 부탁해요. 고훈 씨는 어떻게 준비할까요?”

“콜라로 부탁해도 될까요?”

말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노련한 상인답게 미소 지었다.

마르소 갤러리에서도 그렇고 프랑스 사람은 콜라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값을 떠나 그렇게 귀한 음료를 즐기지 않는 건 인생에 크나큰 손해인데 말이다.

“레오, 들으셨죠? 커피랑 콜라 부탁해요.”

“네, 대표님.”

말로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니 공개되어 있던 매장을 호화롭게 느꼈던 게 무색해졌다.

가본 적은 없지만,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이 이러지 않았을까.

층 두 개가 연결된 것처럼 천장이 높은데, 그 중앙에 샹들리에가 알알이 빛난다.

그 아래에는 고풍스러운 나무 원탁과 금으로 마감 처리한 의자를 놓아두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넓은 방의 바닥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대체 이 큰 대리석을 가공하려면 돈이 얼마나 들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양쪽 벽면에 전시된 빈 액자다.

단순히 액자를 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가 다루는 물건을 소중히 여기고 직업에 소명 의식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액자를 저리 귀하고 소중히 다룰 리 없다.

“편히 앉으시죠.”

말로가 자리를 권했다.

할아버지가 원탁 위에 <서리 밀밭>을 올려두었다.

“먼저 보셔야 하니.”

“그럼.”

말로가 천천히 심호흡하고 끈을 풀었다. 종이를 벗겨내는 손짓이 무척 조심스럽다.

예술품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진다.

“Oh mon Dieu.”

<서리 밀밭>을 본 말로의 눈이 흔들렸다. 그 시선이 무척 정중하여 보는 내가 다 감사할 정도다.

그는 작게 탄식하곤 한발 물러났다. 전체적인 인상을 느끼기 위한 행동이다.

눈을 감고 호흡을 길게 이어간 뒤 다시 그림을 보길 반복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샤똥의 직원 레오가 가져온 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 말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콜라에 넣어준 얼음이 거의 다 녹을 때가 되어서야 말로가 입을 뗐다.

“믿을 수 없습니다.”

입을 막고 목을 가다듬는다.

“이 처연한 이삭이 마치 전사한 병사처럼 느껴지네요. 황량하기 그지없는 밀밭이 전쟁터 같습니다.”

재밌는 감상이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련한 장면인지. 이런 희생 위에 평화가 찾아오겠죠.”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내 의도만은 전달된 듯하다.

주목받지 못한 희생이 잊히는 게 슬펐다. 얼어붙은 밀밭 아래 새로운 생명이 있음을 전하고 싶었다.

2028년 1월, 오베르 쉬르 우아즈 밀밭에서 얻은 희망과 용기를 말이다.

“흠.”

감상을 마친 말로가 고민에 빠졌다.

원탁 앞에 앉아 가볍게 깍지를 끼고는 입을 가렸다. 사교적이었던 인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눈빛이 마치 <서리 밀밭>을 꿰뚫듯 날카롭다.

‘어울리는 액자가 없는 건가.’

할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렇게 또 몇 분이 흐르고 말로가 마침내 깍지를 풀었다. 멋스러운 콧수염을 매만지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난감하네요.”

액자를 구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액자를 예술품으로 취급하는 그라면 분명 <서리 밀밭>과 가장 잘 어울리는 액자가 무엇인지 고민했을 터.

내가 보기에도 그는 신중히 <서리 밀밭>을 관찰했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매장 주인이 난감해하니 무슨 문제인지 걱정된다.

“2주 걸리겠습니다.”

“그보다 서두를 순 없겠군.”

“그렇습니다.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무렴. 누구에게 의뢰하는데 재촉하겠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이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니 말로가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액자를 만드는 데 2주가 필요하단 뜻이에요.”

“직접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럼요. 모든 그림에는 그와 짝을 이루는 단 하나의 액자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기성품에 넣을 순 없죠.”

내가 이 사람을 단단히 오해했다.

상인이 아니라 장인이다.

말로는 자신만의 미학을 통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예술인이다.

“값은 미리 치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말로가 태블릿처럼 보이는 물건을 가져와 계산하더니 할아버지와 내게 보여주었다.

3만 2,000유로.

포테이토 피자 1,570판을 먹을 수 있는 큰돈이다. 액자가 멋지면 좋겠지만 이렇게 비싼 물건이라면 분명 화려할 것.

그림으로 향해야 할 시선이 액자로 분산될 수 있을 듯해 망설여진다.

지갑을 꺼내려는 할아버지를 일단 말렸다.

그러더니 말로가 슬며시 웃는다.

“고훈 씨는 정말 화가네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할 일은 서리 밀밭이 가장 돋보일 수 있는 액자를 만드는 것. 저기 걸어둔 액자를 드리진 않으니까.”

확실히 벽에 전시된 액자들이 워낙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도 마음에 걸렸다.

“저 액자는 전시하기 위한 물건이에요?”

“흠. 어떨까요.”

말로가 콧수염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했다.

“만들지 않고는 어쩔 수 없었어요.”

역시. 이 사람도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무엇인가를 토해내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액자를 3만 2,000유로에 판다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그에겐 저 액자들은 ‘액자’가 아닌 ‘공예품’인데 말이다.

‘이게 살아가는 방식이구나.’

저렇게 아름다운 액자를 만들 수 있으면서, 의뢰하러 온 사람에겐 그 사람이 바라는 이상적인 물건을 만들어 주는 사람.

그렇게 번 돈으로 매장을 운영하는 틈틈이 자신을 알아봐 줄 사람을 기다리며 홀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그가 존경스럽다.

이 사람과는 계속 함께 일하고 싶다.

“할아버지, 제가 결제할게요.”

“돈 아껴야 한다고 했잖니.”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액자 부탁드릴 분하고 첫 거래니까 직접 하고 싶어요.”

신뢰 관계의 시작이니 당사자끼리 하는 것이 옳다.

할아버지도 내 뜻을 이해하셨는지 숨을 길게 내쉬곤 웃으셨다.

“그렇다고 하네요.”

“오우.”

말로가 자기 몸을 끌어안으며 몸을 비튼다.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콧수염이 좀 더 말렸다.

몸을 가볍게 떨더니 미소 짓는다.

“무쉬. 어쩜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할까요.”

“…….”

무쉬라고 부르진 않았으면 좋겠다.

말로가 콧수염을 돌리며 고민하더니 이내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흐음. 좋아요. 할인은 절대 하지 않지만 선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이번 일은 첫 만남의 선물로 해두겠습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죠.”

3만 2,000유로나 되는 물건을 선물로 받을 순 없다.

더군다나 자기 작품에 공을 들이는 장인에게서라면 더더욱 말이다.

말로가 둥글게 말린 콧수염을 길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건 장사꾼으로서의 직감이에요. 이 서리 밀밭의 액자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래도.”

“무쉬의 말을 돌려드리죠. 첫 거래의 선물이니 부담스러워하지 말아요.”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큰 선물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자 말로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조금 이상하지만 멋진 친구를 사귀었다.

* * *

액자 가공, 판매 업체 샤똥은 6대째 가업을 이어온 파리 제일의 매장이었다.

특히 현 주인 피에르 말로는 직접 액자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직접 확인한 작품을 다뤘고.

마음에 드는 작품만 의뢰받으며.

요구한 보수는 합의하지 않았다.

그렇게 깐깐한 조건을 지키며 일함에도 그가 사랑받는 이유는 단 하나.

피에르 말로가 제작한 액자가 작품을 감싼 순간 비로소 완성된 듯한 기분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작가들이 원할 뿐만 아니라.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피에르 말로가 액자를 제작해 주었단 사실만으로도 몇만 달러를 더 주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지니, 피에르 말로에게 액자 제작을 의뢰하는 사람은 연간 3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그중 액자를 받아 간 사람은 몇 없었다.

피에르 말로는 정중히 샤똥 안에 있는 기성품을 추천했고, 직접 나서지 않았다.

작년 2027년에는 한 해 동안 단 네 작품을 맡았을 뿐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앙리 마르소.

독일 베를린의 유진희.

한국 서울의 장미래.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의 크리스티나 알카이테.

모두 이름을 알린 화가이자 피에르 말로의 예술혼을 자극하는 사람들이었다.

올해는 작업량이 조금 많아졌다.

1월에 수락한 작품만 두 점이었고 모두 고훈의 작품이었다.

피에르 말로는 고수열과 고훈을 배웅한 뒤 직원들에게 매장을 맡기고 <서리 밀밭>을 감상했다.

볼수록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고수열 화백의 부탁이라도 정중히 사양할 생각이었지만.

<서리 밀밭>을 본 순간 이 그림을 담아낼 액자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싹처럼.

희망과 용기를 주는 그림을 보던 피에르 말로가 콧수염을 당기며 말했다.

“밤이 아무리 어두워도 태양은 떠오를 거라고 했던가요.”1)

피에르 말로가 줄자를 늘였다.

* * *

1)“가장 어두운 밤도 끝날 것이다. 그리고 태양은 떠오를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