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45화
12. 서리 밀밭(2)
‘이게 대체.’
고수열은 지금껏 수많은 대가의 작품을 접해왔다.
본인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거장이었으며 손자 고훈이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껏 그려온 그림이 증거였다.
<새집>, <해바라기>, <손님>은 정말 특출하여 그 자체로 마음이 움직이는 작품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할 거장의 태동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달랐다.
눈에 담은 순간 그림이 전하는 심상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었다.
한없이 자애로운 서리 밀밭은 많은 것을 담지 않았다.
여러 색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검은색, 파란색, 흰색, 갈색만을 활용했다.
형태보다는 색에 색을 더하고, 붓 터치로 대상의 질감을 표현했다.
파란색과 검은색, 흰색으로 그린 바람이 그렇게 비정할 수 없었다.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그린 하늘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아래 얼어붙은 대지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따뜻하단 말인가.
메마른 밀밭 위 서리가 빛나는 듯 눈부셨다.
“어때요?”
고훈이 다시 물었다.
“…….”
고수열은 대답할 수 없었다.
손자의 그림에서 전해진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저 <서리 밀밭>이 전하는 심상을 충분히 느끼고 싶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우헥휘!”
고훈이 재채기를 했다.
그제야 고수열이 정신을 차렸다.
“어서 들어가자.”
정신을 차린 고수열이 캔버스를 챙기곤 고훈의 손을 잡았다.
서두르는 발걸음처럼.
고수열의 가슴이 뛰었다.
* * *
아니나 다를까.
추운 날씨에 밖에 있었던 고훈이 감기에 걸렸다.
고수열은 급히 인근 병원으로 손자를 데려갔다.
의사의 권유대로 입원시키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흐.”
“이 녀석아, 웃음이 나와?”
열이 38도나 되면서 힘없이 웃는 손자를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밀밭이.”
고훈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빛나는 건 해 덕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고수열이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손자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렇게 밝으니까. 햇살을 머금은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어요.”
고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봄이랑 여름에는 햇살 덕분에 크지만, 가을과 겨울엔 어떻게 버텼을까. 이렇게 추운데.”
“어서 자.”
약 기운이 도는 듯했다.
고수열은 아픈 손자가 빨리 잠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게 다 밭이 품고 있는 덕분이더라고요.”
고훈은 얼어붙은 밀밭에서 자애와 희망을 보았다.
밀 씨앗이 자라날 수 있도록 매몰찬 바람과 차디찬 서리를 온몸으로 막아준 대지의 사랑.
그 사랑을 받아 광명의 순간에 싹을 틔울 밀 씨앗.
그 관계가 본인과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죽음을 기다리며 보았던 오베르의 밀밭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고수열은 손자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근데 아무도 겨울 밀밭은 보지 않아요. 황금으로 빛나는 여름 밀밭만 봐요. 그렇게 멋진데.”
고수열은 그 나름대로 고훈의 말을 이해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부단히 노력함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수많은 예술인이 떠올랐다.
서리 내린 밀밭과 연관되어 생각나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빈센트 반 고흐.
싹을 틔워 밀알을 맺기도 전에 쓰러진 남자는 이삭이 되고 나서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고수열은 고훈이 <서리 밀밭>을 빈센트 반 고흐에게 헌정하기 위해 그렸다고 추측했다.
“또…….”
잠에 취한 고훈이 웅얼거렸다.
고수열이 피식 웃곤 손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새액새액 고른 숨소리를 보니 깊이 잠든 듯했다.
전등을 끄고 보조 침대에 몸을 눕혔다.
‘……어쩌면 도시가 답이 아닐 수도 있겠어.’
고수열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 고훈이 지금의 시선을 키워나가길 바랐다.
잃어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재능이었다.
유럽을 여행한 지난 6주간.
고훈은 눈에 띄게 밝아졌고 결국 <손님>과 <서리 밀밭> 같은 작품을 그려냈다.
한곳에 정착해 있었다면 그럴 수 없었단 생각이 드니.
고수열은 어느 한 도시에 오래 머무는 게 아니라, 여러 지역을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해주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긴장이 풀린 탓에 금방 잠이 쏟아졌다.
다음 날 아침.
고훈이 아침으로 나온 삶은 닭과 연어 샐러드, 빵을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어제만 해도 끙끙 앓던 아이가 꼭 며칠 굶은 아이처럼 먹어대니 안도하면서도 기가 찼다.
“이제 안 아파? 맛있어?”
“네. 맛있어요. 할아버지도 빨리 드세요.”
고훈이 자기가 쓰던 포크를 건네며 말했다.
“할아버진 이따 먹으면 돼. 꼭꼭 씹어서 먹어. 물도 마시고.”
“합.”
디저트로 나온 치즈 케이크를 먹은 고훈이 눈을 크게 뜨고 호들갑을 떨었다.
“할아버지! 이거 드셔보세요!”
“흐흫. 맛있어?”
“이건, 이건 혁명이에요!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인이 한 일 중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고요!”
고훈의 과장에 고수열이 헛웃음 지었다.
“이 녀석아, 치즈 케이크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다고 그래?”
“진짜예요! 빨리 드셔 봐요!”
고수열이 어쩔 수 없이 고훈의 치즈 케이크를 조금 덜어 먹었다.
“음?”
“그렇죠! 살짝 언 치즈가 혀에 닿자마자 눅진하게 녹아내리면서 혀를 감싸는데 어떻게 이런 식감이 있을 수 있어요?”
프랑스 대혁명이라느니, 눅진하다느니 도저히 아이의 표현이 아니었다.
‘이 녀석들이 대체 애를 어떻게 키운 거야.’
워낙 책을 좋아하는 아이라 아는 게 많은 건가 싶지만 가끔 당황스러울 때가 있었다.
연구원들 앞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입장을 말할 때도 그렇고 참 별난 아이였다.
그러나 단 하나 남은 핏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였다.
“그렇게 말하면 알아듣겠어?”
고훈이 눈을 깜빡였다.
“쉽게 표현해야지. 미사여구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뜻이 잘 전달되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요?”
고수열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비유가 좋지. 그래. 꼭 고양이 같은 케이크구나. 차가운 척하지만 막상 품에 안으면 교태를 부리는 귀여운 고양이. 어떠냐?”
“…….”
고훈이 고수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대꾸하지 않고 먹던 치즈 케이크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 * *
어린 몸이 좋긴 하다.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쌩쌩하여 하루 만에 퇴원했다.
문제는 <서리 밀밭>.
그릴 땐 좋았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말려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바람이 불고 건조한 날씨 탓에 물감 겉은 말랐지만, 두텁게 바른 만큼 물감 안쪽까지 마르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일단 마틴 얀센의 연구소 2층 창가에 놓아두긴 했으나 여행 다니는 동안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민이다.
“마를 때까지 여기 있으면 되잖아. 안 그래?”
마틴 얀센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두껍게 바른 그림은 건조 촉진제를 발라도 물감 속까지 마르는 데 몇 달은 걸려.”
“그렇게나?”
마틴 얀센이 흠 하고 신음했다.
환경도 잘 조성해주고 마른 뒤에는 바니시도 발라줘야 한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최소 석 달은 기다려 봐야 한다.
2주 정도면 전시할 정도로는 마르지만, 내 그림처럼 두텁게 바른 경우엔 완전히 마를 때까지 반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으니 참 난감하다.
마음에 꼭 드는 그림이기도 하고 마감재를 바르기 전까진 되도록 안전하게 두고 싶다.
“그럼 두고 가지?”
“…….”
마틴은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지만 내 그림을 맡기기엔 그림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
“왜?”
“못 믿겠어요. 물감 말려야 하는 것도 모르셨잖아요.”
“나야 모르지. 연구원들은 잘 관리하고 있으니까.”
반 고흐 재단과 반 고흐 연구소가 보유한 내 그림을 그들이 관리하는 모양이다.
그럴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직접 관리하고 싶다.
남에게 맡길 수 없는 그림이다.
“할아버지, 한국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안 될 거 없지. 이곳저곳 다니는 건 무리기도 하고. 쓰읍. 이게 잘 고정되어야 할 텐데.”
할아버지가 <서리 밀밭>을 살피더니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 여기 액자 다루는 곳이 있나?”
“글쎄. 여기서 찾지 말고 파리로 나가 보지 그래?”
마틴의 제안에 따르는 게 좋겠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지라 액자도 단단하고 잘 고정되는 것으로 사고 싶다.
“그래야겠어. 운송업체도 알아볼 겸. 훈아, 내일 할아버지랑 파리 다녀오자.”
“오늘 안 가고요?”
“막 퇴원했으니까 무리하면 안 돼. 오늘은 푹 쉬어.”
고개를 끄덕이자 마틴이 크게 웃었다.
“하핳하! 그럼 오늘 하루는 네 할아버지 좀 빌리마.”
“빌려요?”
“그래. 네 할아버지가 연설 한 번 해야 후원자들이 모이거든. 그래야 또 라부 여관에 반 고흐 그림을 전시할 수 있고.”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내키지 않는 표정이다.
“네가 하도 노래를 불러서 해주는 거야. 두 번은 없어.”
라부 여관 다락방에 내 그림이 전시된다면 썩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멋질 것 같아요.”
“그렇지? 거봐. 훈이도 멋질 것 같다잖아. 기왕 해주기로 한 거 멋들어지게 해.”
“크흠.”
할아버지가 입술을 샐쭉거렸다.
유럽 어딜 가도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하는 고수열 화백의 연설이 기대된다.
“저도 갈래요.”
“안 돼. 누워 있어. 약은 먹었고?”
“안 먹어도 돼요. 하나도 안 아파요. 열도 없잖아요.”
“의사가 약을 괜히 줬겠어? 고집 쓰지 말고 쉬어. 저녁 먹기 전엔 들어올 테니.”
멀쩡한데 도무지 믿질 않으신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기자들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어 답답했던 마음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올 때 치즈 케이크 사 올게.”
“다녀오세요.”
하지만 치즈 케이크라면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