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3화 (29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43화

11. 반 고흐의 마지막 그림(3)

이번에는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알 것 같다고?”

언성을 높여 치열하게 토론하던 연구원들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네. 가봐요.”

하루 이틀이면 알아서 찾고 돌아가겠지 싶었는데 이대로라면 몇 날 며칠을 기다려도 소용없을 것 같다.

직접 안내하고 빨리 보낼 생각으로 외투와 털모자, 털장갑을 챙겼다.

마침 미팅실로 들어온 할아버지가 날 발견했다.

“훈이 어디 나가려고?”

“네. 이 아저씨들하고 도비늬가 좀 다녀올게요.”

“밖에 추워. 이리 와 봐.”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 할아버지가 굳이 이 건물 내 숙소로 쓰고 있는 방으로 데려가 옷을 입혀 주셨다.

바지와 외투를 한 겹 더 입히고 목도리까지 둘러서 움직이기 버겁다.

‘추운 것보단 낫지.’

모자를 써야 하는데 두꺼운 옷 때문에 팔이 올라가지 않아서 끙끙대니 할아버지가 꾹 씌워주었다.

“할아버지도 같이 가요.”

“이따가 인터뷰하기로 했는데. 마틴 할아버지랑 다녀올 수 있지?”

“네.”

장갑을 끼우고 뒤뚱거리며 미팅실 문을 열었다.

외투를 입은 마틴과 달리 연구원들이 또 눈치만 보고 있다.

“뭐 해요?”

재촉하니 머뭇거린다.

“빨리 와요. 어디서 쐈는지 궁금하다면서요.”

“아니. 그렇긴 한데. ……이사장님도 가시게요?”

“가야지. 알 것 같다잖아. 그치?”

“네.”

“봐라.”

“이상하잖아요. 알 것 같다니. 지난 몇 년이나 못 찾지 않았습니까. 그림 배경도 발견했고, 곧 나올 겁니다. 무작정 움직이는 것보단 지금은 음모론자들에게 반박할 이야기를 준비하는 게 우선입니다.”

“가기 싫으면 여기 있어.”

“그게 아니라.”

“연구를 책상 앞에서만 하니까 여태 이 지경으로 남은 거 아냐. 난 보고 올 테니 자네들은 하던 거나 마저 해.”

마틴 얀센이 호쾌하게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니 결국 연구원들이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왔다.

차르르르륵-

문을 열자마자 카메라 조명이 쏟아졌다.

“이사장님! 조사는 어디까지 진척되었습니까?”

“빈센트 반 고흐는 자살입니까, 타살입니까!”

기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틴에게 달려들었다.

“어디 가?”

“아저씨랑 인터뷰 좀 해줄래?”

내게도 달라붙는데 마틴이 기자들을 가로막으며 호탕하게 말했다.

“지금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작업했던 장소로 갑니다.”

마틴의 말에 기자들이 눈을 빛내며 질문을 쏟아냈다.

내가 가자고 하긴 했지만, 아홉 살 어린아이의 말을 믿고 나서는 마틴도 정상은 아니다.

“발견하신 겁니까?”

“반 고흐의 죽음에 관한 의문이 풀린 건가요?”

“자, 자. 그거 알아보려고 하는 거니까 길 막지 마시고.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같이 가죠.”

기자들이 서둘러 길을 터주었다.

기업을 운영하고 후원금을 모으는 사람답게 사람을 참 잘 다룬다.

드비늬가 37번지로 향했다.

옷이 두꺼운 탓에 다리가 앞으로 들리지 않고 옆으로 나간다.

“흐흫흫흐.”

뒤에서 웃음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마틴과 연구원들이 웃고 있다.

“왜요?”

“아니다. 귀여워서 그래.”

“…….”

생전 처음 듣는 말이다.

“걷는 게 꼭 펭귄 같잖아.”

“펭귄이 뭐예요?”1)

“펭귄 몰라? 남극에 사는 새. 뒤뚱뒤뚱.”

남극이라고 하면 얼음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알고 있는데, 거기에 뭔가 사는 모양이다.

“새가 뒤뚱뒤뚱 걸어요?”

“못 나는 새거든.”

“……새가 못 난다고요?”

“대신 수영을 하지. 선수야 선수.”

날지는 못하고 수영하는 동물을 어떻게 새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럼 생선이잖아요.”

“생선은 아니지. 날개도 있으니까.”

“생선도 지느러미 있잖아요.”

“에이. 지느러미랑 날개는 다르지.”

“생긴 건 비슷하잖아요. 수영하면서 살면 그게 생선이지 어떻게 새예요.”

“새 맞아. 알도 낳거든.”

“생선도 알 낳아요.”

“……음?”

마틴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펭귄은 털이 있잖아. 털 있는 생선 봤어?”

확실히 본 적 없다.

스마트폰을 꺼내 털 있는 생선이라고 검색해 보니 Lophiodes fimbriatus란 물고기가 나왔다.

전신에 털이 있는 게 특징이란다.

“얜 물고긴데 털 있잖아요.”

“털 있는 물고기가 있다고?”

스마트폰을 보여주자 한참을 뚫어지게 보던 마틴 얀센이 신음했다.

“씁. 자네, 펭귄이 왜 조류인지 알아?”

그러더니 곁에 있던 사람에게 답변을 미뤘다.

질문받은 연구원이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박사라면서 그거 하나 몰라?”

“생물학이랑은 관계없잖습니까.”

석박사들이라더니 미술 역사만 공부했던 모양이다.

마틴도 연구원도 믿을 수 없어 펭귄 사진을 검색해 보니 발에 물갈퀴가 있다.

어류가 확실하다.

제법 귀엽게 생긴 몇몇 사진을 보면서 걸으니 마틴이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었다.

마침 도착하기도 해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무뿌리>의 모델이 되어준 나무뿌리는 사람들이 다가가지 못하게 차단막을 설치해 두고 있다.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를 살해한 용의자가 곧 밝혀질 예정입니다!”

“저기, 반 고흐 재단 이사장이 보이네요! 이사장님, 대체 반 고흐가 어떻게 살해당한 거죠?”

카메라와 스마트폰으로 자신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다.

영상 통화라도 하는 건가 싶다.

“쯧.”

마틴 얀센이 혀를 찼다.

고개를 돌리니 마틴뿐만 아니라 연구원들도 내가 살해당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좋게 보지 않는다.

“타살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조사에 방해가 되니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한 연구원이 나섰다.

“지금 800명의 시청자가 보고 있습니다! 반 고흐 살해사건을 은폐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폐가 아니라 조사에 방해가 되니까 물러나 달라는 말이잖아요.”

“그렇다면 조사 과정을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했잖아요! 방해된다고!”

이들이 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꼭 내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길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한참을 실랑인 끝에 보안직원들에 의해 그들을 내몰 수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마틴 얀센이 끝까지 시청자의 알 권리를 주장하며 멀어지는 이들에게 욕했다.

“왜 저러는 거예요?”

“음모를 제시해서 유명해지려는 거야. 반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용하려는 거지.”

“왜요?”

“돈이 되니까. 저런 방송 하면 후원액이 들어오거든.”

내가 살해당했다고 말하면 돈을 벌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참으로 이해 못 할 일이다.

아무튼 <나무뿌리>를 그렸던 길 건너편에 섰다.

“여기였어요.”

확실한 기준이 없어 정확하진 않지만 이 부근에서 그린 것 같다.

“그림 그린 장소는 여긴데.”

한 연구원이 나섰다.

내가 선 곳보다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장소를 가리켰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림과 이 사진을 비교하면 시야각으로 반 고흐가 어디에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어.”

펭귄이 어류라는 것은 몰라도, 겨우 그림과 오래된 사진만으로 내 시야가 어떠했는지 추론해내다니.

괜히 석박사가 아니다.

오랜 시간 날 연구해 온 만큼 나보다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이 분명 있다.

기억은 불확실하니까.

마틴 얀센이 나섰다.

“문제는 자살을 어디서 시도했는지야. 권총이 왜 밀밭에 떨어져 있었겠니. 그림을 그리다가 자살한 게 아니라면 돌아오는 길에 시도했다고 생각해야지.”

권총이 발견된 장소가 밀밭이라, 지금껏 사람들은 줄곧 오베르의 밀밭 주변을 수색해 왔었다.

그 때문에 그림을 그린 장소보다 밀밭에서 혈흔 같은 증거를 찾았던 듯하다.

하지만 난 그림을 그리던 이곳에서 총을 쐈다.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 연구원이 나섰다.

“만약 훈이 말대로 여기서 시도했다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니까 주변은 어둡고 몸은 죽을 듯이 아파요. 자살하려고 마음먹었으니 다시 권총을 찾았겠죠?”

“그렇겠지?”

“그런데 왜 다시 안 쏘고 여관으로 돌아갔을까?”

“잃어버렸으니까. 반 고흐가 라부 여관에 돌아온 시간이 밤이었다고 하니 정신을 잃으며 놓친 권총을 찾을 수 없었던 거지.”

거듭 감탄하지만 이들이 괜히 날 연구하고 있던 게 아니다.

당시 정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애초에 권총도 백 년 뒤에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처음부터 거기에 있을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흠.”

연구원의 말대로 권총이 밀밭에서 발견되었기에, 자살을 시도한 장소도 밀밭으로 추정.

<밀밭>이 마지막 작품으로 오해받은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나도 왜 그 권총이 밀밭에서 발견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자살을 시도한 장소만 알려주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한 기자가 나섰다.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그림을 그리다가 돌아가는 길에 살해당한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정당한 의문이라 얼핏 들으면 정말 내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 같다.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지.”

“타살이었으면 이곳에서 반 고흐한테서 총을 빼앗아 쏘고, 도망가다가 밀밭에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연구원들은 어제와 오늘 내내 이런 식으로 의견을 나눴다.

당시 나를 모르는 사람들로선 여러 상황을 봤을 때 타살이 더 자연스러워 보일 거다.

권총이 왜 밀밭에 있는지도 설명되니까.

진실을 알고 싶은 연구원들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끊임없이 추론해 나갔다.

“그럼 애초에 권총은 왜 지녔던 건가요?”

한 기자의 질문에 다들 대답이 없다.

“언제 발작이 올지 몰랐기 때문이에요. 마비라든가.”

내가 대답하자 기자들이 한 번 더 질문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몸이 굳어가는 걸 느꼈으니까요. 언젠가는 움직일 수 없을 거란 불안 때문이었죠.”

“그림을 그릴 수도 없고, 테오에게 짐이 될 테니까.”

마틴 얀센이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맞아요. 사랑하는 동생의 짐이 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다시 마비가 오면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것도 추측이지 않습니까?”

한 기자가 의문을 제시했다.

“증거가 있습니까?”

연구원들도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애썼지만 증명해내지 못했다.

증거라는 게 남아 있을 리 없으니까.

정황을 말해줄 뿐이다.

“기자님한테 권총이 있고, 자살한다고 마음먹으면 어디를 쏠 것 같아요?”

질문한 기자에게 질문을 던지자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머리나 관자놀이 쪽을 쏘겠지?”

그게 평범하고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래야 고통이 덜할 테니까.

연구원 중 한 명이 나섰다.

“그래서 타살이라는 말에 힘이 실리는 거야. 굳이 왼쪽 옆구리를 쏠 이유가 없으니까.”

연구원과 기자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그래서 자살이에요.”

마틴 얀센이 눈썹을 좁힌 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자살하려고 나간 게 아니었구나.”

“맞아요.”

다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거나 주변 눈치를 본다.

“권총을 휴대하고 다닌 건 사실이지만 그날 자살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은 아니에요. 정말 그림을 그리러 나갔던 거예요. 실제로 나무뿌리를 그리고 있었잖아요.”

연구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러지 않길 바랐지만 발작이 찾아왔어요. 그전에는 느껴보지 못할 정도로 크게요. 빈센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어요. 몸이 말을 들었다면 애초에 자살하려고도 하지 않았겠죠. 그리던 그림을 마저 완성했겠죠.”

“아.”

드디어 이해한 모양이다.

“그렇지. 죽는 날까지도 그림을 그렸던 반 고흐가 그림을 완성하지 않은 채 자살을 시도할 리 없지. 항상 준비는 했지만 그날이 될 줄은 본인도 몰랐던 거야.”

맞다.

“그런데 몸을 가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몸은 점점 비틀리고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죠. 왼쪽 옆구리를 일부러 쏜 게 아니라, 쓰러진 채 몸을 가눌 수 없었던 빈센트에겐 그게 최선이었던 거예요.”

다들 말이 없어졌다.

“……그렇지. 그러지 않고선 굳이 오른손잡이가 왼쪽 옆구리를 쏠 이유가 없지.”

마틴 얀센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심장을 빗겨 갔어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죠.”

“잠깐.”

마틴 얀센이 나섰다.

“정신을 잃었다가 직접 라부 여관까지 걸어가지 않았느냐. 마비가 왔으면 그게 가능했을까?”

얌전한 방청객이 된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이어지는 건 아니었어요. 발작도 빈도가 점점 잦아졌지 항상 그랬던 건 아니니까요.”

그 이후에는 이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다.

확실히 죽기 위해 총을 찾았지만 어두운 탓에 발견할 수 없었고 라부 여관으로 돌아왔다.

한 연구원이 넌지시 입을 뗐다.

“어쩌면 라부 여관이 돌아올 때, 아직은 괜찮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

정답이다.

“맞아요.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어쩌면 그림을 좀 더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미련 때문이죠.”

그 미련은 지금까지 이어져 나를 이곳에 다시 오게 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이름으로 살 적에 그리려던 마지막 그림.

<황금 밀밭>.

<나무뿌리> 다음에 그리려던 <황금 밀밭>을 그리기 위해 찾았다.

옆구리에 총을 쏘고도.

어쩌면 한 작품 정도는 더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그 몸을 이끌고 라부 여관으로 돌아온 것이다.

마틴 얀센이 입을 열었다.

“……죽고 싶지 않았던 거야.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상황으로 생각하면서도 끝까지 그림을 놓지 못했던 거야.”

그가 당시 내 마음을 정확히 짚어주었다.

* * *

1)펭귄은 1852년 멸종한 큰바다오리(Pinguinus impennis)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1840년 프랑스 탐험가 쥘 뒤몽 뒤르빌이 처음 발견한 현재 펭귄이 큰바다오리와 닮았기에 붙여진 이름.

빈센트 반 고흐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남극을 탐험하기에 여의치 않았고,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펭귄이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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