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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40화 (29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40화

10. 반 고흐가 죽은 곳(3)

식당 앞에 놓인 식탁과 와인이 든 유리잔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저건 뭐예요?”

“와인이야. 마시면 반 고흐처럼 아프니까 절대 마시면 안 된다?”

술 때문에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는데 다시 마실 리 없다.

“술인 건 아는데 왜 여기 두고 있어요?”

“빈센트 반 고흐와 테오도르 반 고흐를 기리기 위해서지.”

“와인 때문에 그 지경이 되었는데요?”

“……흠.”

할아버지가 턱수염을 쓸며 고민에 빠졌다.

내 생각엔 포테이토 피자가 좋을 것 같지만, 그렇게 비싼 음식을 매일 두는 건 지금 라부 여관 주인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

짜장면 정도면 적당한 타협점이 될 거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구나.”

“짜장면이 적당할 거예요.”

“하핳. 짜장면은 아니지. 반 고흐가 먹어봤을 리도 없고. 여기선 구할 수도 없을걸?”

이곳에서는 짜장면을 팔지 않는 모양이다.

아쉽게 되었다.

“올라가 볼래?”

고개를 끄덕였다.

1층 문은 식당과 연결되어 있고 2층으로는 따로 마련된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기에 건물 옆으로 도는데, 표를 팔고 있다.

“입장권을 사야 해요?”

“아무렴. 여기 주 수입원인데.”

“…….”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다.

“아.”

철제 울타리에 아델린에게 그려준 그림과 내가 머물렀던 방 사진이 걸려 있다.

“아델린 라부구나.”

할아버지는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당시 라부 여관 주인은 아델린 라부라는 딸이 있었다.

“자기가 머물던 여관 주인 딸에게 그림을 그려주었단다.”

싹싹하고 귀여운 아이라 간식거리를 나눠주기도 했다.

“빈센트를 잘 따랐어요.”

“그래. 아델린 라부가 죽기 전에 반 고흐에 대해 남긴 인터뷰를 보면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 같더구나. 담배 냄새가 지독해서 싫었다는 말도 했지만.”

“…….”

담배 냄새를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다.

“그러니 담배도 피우면 안 돼. 아무도 안 좋아하고 몸에도 안 좋아. 죽기 딱 좋지.”

“담배가 몸에 안 좋아요?”

“그럼. 나중엔 숨도 잘 못 쉬게 돼. 아주 큰일 나니까 절대 피우면 안 된다.”

“네.”

와인은 콜라라는 훌륭한 대체재가 있는데 담배는 무엇으로 대신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입장권을 사고 계단을 올랐다.

낡았을 뿐, 내가 살던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퀴퀴한 곰팡내도 여전하다.

2층에서 다시 한번 계단을 오르자 바로 눈앞에 다락방이 있다.

다른 물건은 모두 치워두었는지 내가 쓰던 의자 하나가 외롭게 놓여 있다.

“…….”

그때는 몰랐는데 참 좁다.

할아버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두 평도 안 되는 이 좁은 방에서 반 고흐는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단다.”

문 앞에 책상을 두고 그 위에 거울과 세숫대야를 놓았었다.

천장에 난 창으로 아침 햇살을 받고자 침대는 입구 왼쪽에 두었다.

이 좁은 공간에 어떻게든 그림을 걸어두고 싶어서 고민도 참 많이 했다.

죽기 직전에는 귀스타브 도레의 <재소자의 원 그리기>를 걸어두었고.

침대 옆 작은 서랍에는 차마 테오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넣어두었다.

그 물건들이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옆 방에 머물던 안톤 허쉬그의 코 고는 소리가 마치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고훈’이 된 지 고작 반년 정도 흘렀을 뿐인데, 돌아온 이곳이 너무나 낯설다.

“La tristesse durera toujours.”

할아버지가 프랑스어로 말했다.

“빈센트 반 고흐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야. 고통은 영원하다는 뜻이지.”

“…….”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고 그림도 그릴 수 없게 되었지. 경제적으로 힘들어하는 동생 테오도르에게 더는 손을 빌릴 수도 없었던 거야.”

할아버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뒷이야기는 좀 더 큰 뒤에 하자꾸나. 지금은 그가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단 것만 알면 돼.”

아마 어린 손자에게 자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으신 듯하다.

말을 몇 번 삼키다가.

할아버지에게만은 진실을 알리고 싶어 입을 열었다.

“죽고 싶지 않았어요.”

“응?”

“그리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좀 더 잘 그리고 싶어서. 죽고 싶지 않았어요. ……그랬을 것 같아요.”

“흠.”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 수도 있지. 하지만 훈아, 반 고흐는 너무나 괴로웠단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괴로워서 여동생이나 친구들에게 죽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대.”

“……그래야 했어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살고 싶다고 말하면 테오는 반드시 빈센트를 살리려고 했을 테니까요. 그림은커녕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형을 평생 돌봤을 테니까요.”

착한 내 동생 테오는 분명 그랬을 거다.

나는 죽고 싶어야 했다.

가셰 박사에게 치료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다른 이들에게 죽고 싶다고 말했던 것도 모두 이미 자살하기로 마음먹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날 위해 희생할 테오가 날 떠나보낼 수 있도록.

나 때문에 더는 고생하지 않도록.

더는 못난 형 때문에 힘들지 않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그냥. 그랬을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너무 슬프구나.”

할아버지가 무엇인가 말하려던 차 누군가가 뒤에서 할아버지를 불렀다. 호쾌한 목소리다.

“수열!”

고개를 돌리니 할아버지 못지않게 건장한 남자가 다가왔다.

“마틴!”

“하하하! 이게 얼마 만인가! 와줘서 고맙네.”

“고맙긴. 잘 지내지?”

할아버지가 격 없이 사람을 대하는 건 드문 일인데, 상당히 가까운 사람인 듯하다.

“훈아, 인사드려라. 할아버지 친구야.”

“안녕하세요. 고훈입니다.”

“만나서 정말 반갑다. 마틴 얀센이다.”

악수하려고 잡은 손을 얼마나 세게 흔드는지 정신이 없다.

“일찍 왔으면 얘기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손자랑 구경 좀 했지. 반 고흐를 워낙 좋아해서 말이야.”

“그래?”

마틴 얀센이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춰주었다.

“어떠냐. 볼 만한 건 없지?”

“아뇨. 충분해요. 그때 그 모습 그대로라 더 좋아요.”

마틴 얀센이 씩 웃으며 머리를 헝클었다.

“이 일대가 예전 모습 그대로 지키고 있는 건 여기 이 할아버지 덕분이란다.”

할아버지가 뜻밖에 이야기를 알려주셨다.

“어떻게요?”

“보자……. 87년이었나?”

“정확히 87년이었지. 그때 여길 인수해서 수리했어. 사는 김에 주변을 전부 사들여서 반 고흐가 살았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단다.”1)

“…….”

대체 돈이 얼마나 많으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요?”

“어떻게라니?”

“엄청 비싸지 않아요?”

건물 하나가 아니라 일대 부동산을 전부 사들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하핳! 그치. 돈 엄청 들었지. 이 건물 수리하는 데에만 700만 유로가 들었으니까.”

1987년도에 700만 유로라니.

지금 화폐 가치로 따지면 대체 얼마나 할지 감도 안 잡힌다.

게다가 주변 건물을 살 때는 훨씬 더 큰돈을 들였을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했어요?”

“왜?”

마틴 얀센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여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글쎄. 좋아하니까? 핳핳하하!”

“하하핳! 이 친구 싱거운 건 여전하구만!”

일단 난 이해할 수 없지만.

할아버지도 마틴 얀센도 즐거워하는 것 같으니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싶다.

“자, 자. 일단 자리를 옮기자고. 훈이 너 뭐 좋아하니. 밥 안 먹었지?”

“포테이토 피자요.”

뭔가 잘못되었는지 마틴 얀센이 할아버지를 노려본다.

“애한테 뭘 먹이길래 피자를 먹겠다고 해?”

“손자 없는 티 내긴. 이 나이 때는 다 햄버거, 피자 좋아해.”

“그래?”

평소에 대체 뭘 먹고 사는지 포테이토 피자 같은 고급 요리를 무시한다.

고기와 감자, 각종 야채에 빵과 치즈까지 곁들인 완벽한 요리 포테이토 피자.

콜라를 함께 마시면 조금 느끼하다는 유일한 단점도 사라지는데 말이다.

“여기 1층에 반 고흐 스페셜 메뉴가 있는데 어떠냐.”

“반 고흐 스페셜 메뉴?”

“빈센트 반 고흐가 먹었던 식단 그대로 주는 거란다. 반 고흐와 같은 경험을 하는 거야. 먹고 싶지?”

“싫어요.”

포테이토 피자를 무시하길래 무슨 귀한 음식을 소개해 주나 싶었는데 그 맛없는 걸 왜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운 것과 실제로 먹고 싶은 건 다른 문제다.

1층 식당에 사람이 별로 없는 게 이제야 납득된다.

“엥? 싫어?”

“하하하. 훈아, 한 번 먹어주자. 이 할아버지가 이 여관 자랑하고 싶은 것 같으니.”

“……네.”

할아버지 말씀이니 거절하진 않겠다만 마틴 얀센이 투자한 돈을 회수할 생각이 있다면 그런 메뉴는 당장 고쳐야 할 거다.

“그렇게 나와야지. 일단 먹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게다.”

계단에서 내려와 정문을 통해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아.”

의자와 식탁이 모두 그때 그대로다.

내가 머물 적에는 새 물건이었던 가구들이 백 년도 넘는 세월에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 고흐와 관련한 물건은 없구만.”

“당시엔 반 고흐의 그림을 걸어두지 않았을 테니 말이야. 어디까지나 재현이라고.”

만약 마틴 얀센이 이곳에 내 그림을 걸어두었다면 이런 감정을 못 느꼈을 거다.

정말. 그때로 돌아온 듯한 착각이 든다.

“대표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마틴 얀센을 반겼다.

“반 고흐 스페셜 셋. 평소대로 잘 부탁하네.”

“네. 준비하겠습니다.”

특별히란 말 대신 평소대로 부탁한다고 하니 마틴 얀센이 이곳을 얼마나 자부하는지 알 수 있다.

‘맛있을 것 같진 않지만.’

나를 좋아한단 이유만으로 이 일대를 보존해준 그에게 최소한의 예의로 감사히 먹도록 하자.

“그거 아니? 미치광이로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반 고흐는 무척 규칙적인 사람이었단다.”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아들린 라부의 기억에 따르면 빈센트 반 고흐는 아침을 먹고 9시가 되면 밖으로 나갔대. 정오가 되면 어김없이 돌아와 점심을 먹고 저녁 먹을 때까지 아까 봤던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렸고. 식사 시간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대.”

“이상하군. 말년에는 식사도 제대로 못 했을 텐데.”

“빵 한 쪽이라도 먹었던 거겠지. 전혀 안 먹을 순 없으니까. 딱딱한 빵을 물에 한참 불려서 조금씩 뜯어 먹었다더라.”

당시 이곳 집세에는 식사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하루에 3프랑 10수나 했다.2)

테오가 보내준 소중한 돈을 조금이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라도 조금씩 먹었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제대로 못 해서 거를 때도 있었는데 아들린이 죽기 전 며칠 간은 잘 기억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일은 좀 어떻게 되가?”

“후원금이 늘곤 있는데 아직 한참 멀었지. 워낙 비싸다 보니 엄두가 안 나.”

무슨 말인가 싶어 물어보려던 차 음식이 나왔다.

양고기 훈제구이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던 감자와 베이컨을 곁들인 양고기 요리를 내올 줄이야.

당시 음식을 준비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이건 먹을 만하지.’

7시간 이상 조리해야 하는 요리다 보니 미리 어느 정도 만들어 놓았겠지만 그 정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바삭바삭하게 익은 겉면을 썰어내자 육즙이 주륵 흘렀다.

* * *

1)도미니크 샤를 얀센: 벨기에 사업가. 반 고흐 재단 이사장.

실존 인물 도미니크 샤를 얀센은 1987년, 약 36만 달러에 라부 여관을 인수하고 700만 유로를 들여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이후 인근 건물을 모두 사들여(1,100만 유로) 당시 개발이 들어가던 오베르를 옛 모습 그대로 지켜내 현재 많은 사람이 빈센트 반 고흐가 머물렀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즐길 수 있게 했다.

2)1프랑이 100상팀, 1수는 5상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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