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9화
10. 반 고흐가 죽은 곳(2)
새해가 밝았다.
이제는 시들해졌는지 극성을 부리던 기자들도 호텔 앞에서 진을 치고 있진 않았다.
가끔 무턱대고 마이크를 들이미는 사람도 있지만 파리를 구경하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카페에서 느긋하게 차도 마실 수 있고 말이다.
“맛있었지?”
“네. 또 먹어요.”
할아버지와 루브르 박물관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뵈프 부르기뇽(와인을 넣고 졸인 소고기찜)을 먹었다.
예전에 먹던 부르기뇽과는 차원이 다른다.
같은 요리라도 조미료와 재료의 질만으로 달리 느껴지니, 문명의 발달에 감탄하며 먹게 된다. 하루에 세 끼만 먹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내일은 오르세 미술관에 가자. 네가 좋아하는 시대는 오르세에 많아.”
“좋아하는 시대?”
“1848년부터 1914년까지. 황금기라 할 수 있지.”
1848년부터 1914년까지라면 나보다 조금 앞서 활동한 사람과 내가 죽고 난 뒤에 얼마간 활동한 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때 작품은 오르세에서 볼 수 있어. 그전은 루브르. 그 이후 작품은 퐁피두 센터에서 볼 수 있고.”
생각해 보니 루브르에는 19세기 이전 작품들만 있었다.
할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시대별로 나누어 관리하는 것인데, 규격화하길 좋아하는 프랑스인답다.
그나저나 벌써 한 달 넘게 과거 거장들의 걸작을 마주하며, 호화로운 호텔에서 묵고 화려한 요리를 즐기고 있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다.
‘돈이 많은 건 알겠는데.’
아직 이 시대의 화폐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지 않다.
당분간은 이렇게 한량처럼 지내도 되는지, 아니면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지 알아야 한다.
‘언젠가는 갤러리도 짓고 싶으니까.’
스마트폰을 꺼내 더듬더듬 은행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했다.
<해바라기> 판매액은 서울 미술관에게 준 10퍼센트를 제외하고 한화로 25억 원 정도다.
해외 계좌로 옮겨 가니 마르소 갤러리가 <손님>의 판매금 400만 유로를 그대로 보내두었다.
‘그러니까…….’
또 더듬더듬 인터넷에 접속해 환율 계산기를 찾았다.
금액을 입력하자 한국 돈으로 56억 원이 조금 넘게 표시되었다.
합치면 대충 82억 원.
할아버지가 법인세라는 이름의 세금으로 20퍼센트를 내야 한다고 했으니 내가 가진 돈은 65억 원이 조금 넘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평생 끼니마다 포테이토 피자를 먹어도 남을 돈이긴 한데.’
정확히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
마르소 갤러리 같은 건물을 지으려면 얼마나 들까.
“어.”
한참 망상을 하던 중 이상한 걸 눈치챘다.
“할아버지.”
“응?”
“마르소 갤러리는 왜 수수료 안 가져갔어요?”
그림이 팔리면 보통 작가와 갤러리가 50 대 50 비율로 나눈다고 들었다.
도둑놈도 그런 도둑놈이 없지만 어찌 되었든 업계의 평균적인 비율이라고 했는데, 한 푼도 안 떼간 것이 의아하다.
“그럴 리가 있나.”
할아버지에게 스마트폰을 보여드리니 눈매를 좁히며 가까이 왔다가 목을 빼며 초점을 맞추셨다.
“그러게. 잘못된 것 같은데.”
할아버지가 잠시 고민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음. 그래요. 훈이 판매대금 때문에 연락했어요.”
마르소 갤러리에 연락한 모양이다.
“대표? 마르소가?”
할아버지가 떨떠름하게 전화를 끊었다.
“마르소가 그렇게 처리하라고 했다더구나.”
“왜요?”
“글쎄. 그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진 않을 것 같구나.”
그건 그렇다.
혹시나 수수료를 떼지 않는 방식으로 사과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설마.’
자기 조각상을 받지 않았단 이유로 버럭 화내던 모습을 떠올리면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뭘요?”
“그림 말이다. 한 달이면 그릴 수 있겠냐고.”
WH배움 미술관 방태호 큐레이터와의 약속을 말씀하시는 거다.
개인전을 열려면 적어도 열 점 정도는 있어야 할 텐데, 한 달이면 충분하다.
“네. 충분해요.”
그리고 싶은 건 차고 넘친다.
암스테르담과 파리에 머물며 시야도 넓히니 새롭게 시도해 보고 싶은 일로 가득하다.
전처럼 배가 고플 일도 없고 환청 때문에 잠을 못 자서 피로하지도 않다.
마비나 발작도 없으니 종일 그림만 그릴 수 있다.
그토록 바라던 이상적 환경이다.
지금이라면 그때.
그리지 못했던 오베르의 밀밭을 만족스럽게 그릴 것 같다.
“오베르까지 얼마나 걸려요?”
파리와 오베르는 가까우니 지금 교통이면 금방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오베르? 글쎄.”
할아버지가 스마트폰을 꺼내서 오베르까지 가는 교통편을 검색하셨다.
뭐든 알아볼 수 있으니 참으로 기특한 물건이다.
“파리 북역에서 퐁투아즈행 기차를 타면 되겠네. 40~50분 정도 걸리고. 가볼래?”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네.”
“흠. 괜찮지. 할아버지도 예전에 가본 적 있어. 볼 건 많이 없지만.”
워낙 작은 마을이니 그럴 만하다.
볼 게 없어도 상관없다.
추억을 회상하며 돌아다녀도 나쁘지 않겠지만 마지막에 그리려던 그림을 완성하는 게 목적이니까.
“물감이랑 캔버스 사서 가져가도 돼요?”
“아무렴. 허허. 전시회에 걸 그림 그리게?”
“네.”
내 첫 개인전에 그보다 의미 있는 그림도 없으리라.
“그럼 내일 바로 가자. 마침 할아버지도 일이 있었으니.”
“일이요?”
“친구가 거기서 반 고흐 기념 사업을 하는데 와달라고 하지 뭐냐.”
“왜 말씀 안 하셨어요.”
“할아버진 훈이랑 노는 게 좋아. 근데 오르세는 안 가도 되겠어?”
“언제든 볼 수 있죠?”
“그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시 올 수 있으니, 아쉽긴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다.
* * *
다음 날.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도착했다.
역을 벗어나자 안내판에 붙은 지도를 볼 수 있었다.
관광지라더니, 정말 내가 잠시 살았단 이유만으로 이렇게 꾸며놓은 모양이다.
“약속 시간까지 좀 남았으니 둘러보자꾸나.”
할아버지를 따라 걷기 시작하는데, 파리와 달리 이곳은 변한 게 그리 없다.
상점도 있고 도로도 정비되었으며 벽마다 귀여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등 달라진 게 없진 않으나 골목마다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130년 넘도록 마을이 크게 변하지 않은 건 그만큼 이곳이 낙후되었기 때문이리라.
“반 고흐 공원이다.”
나를 기념하는 공원이라니.
쑥스러우면서도 뿌듯해진다.
반 고흐 미술관에서 만난 관람객 중 한 명이 이곳에 내 동상이 있다고 했는데, 정말인지 확인하고 싶다.
“공원이라곤 해도 작지?”
할아버지 말씀대로 작은 정원이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니 주변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렇게 신경 써서 관리하는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관람객이 알려준 동상만은 확실히 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
보통 기념한다면 좀 멋진 모습으로 만들지 않나?
이곳을 만든 사람은 아마 나를 아주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비정상적으로 마른 몸.
팔과 다리는 앙상하기 그지없고 눈은 그림자가 짙다.
두드러진 광대와 더벅머리, 손질하지 않은 수염.
잔뜩 해져 남루한 옷.
해골이 따로 없다.
“빈센트 반 고흐란다.”
“……아닌데.”
몸이 안 좋긴 했어도 이렇게나 흉측하진 않았다.
“하하. 자화상이랑은 많이 다르지? 하지만 죽기 전에는 이런 모습이었단다.”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이 동상을 만든 사람은 얼마나 잘생겼길래 남을 이렇게 못나게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핳. 그래. 그래. 반 고흐를 좋아하면 기분 나쁠 수도 있지.”
잔뜩 약이 올라 주먹을 떨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에 반 고흐가 납중독 때문에 죽었다고 말했지?”
“네.”
“납중독의 초기 증상에 잇몸질환이 있거든. 복통도 있고. 말년에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 저렇게 삐쩍 마른 거고.”
확실히 예전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정말 괴로웠을 테지. 70일 동안 제대로 밥을 먹은 적이 예닐곱 번뿐이었대.”
“…….”
당시엔 딱딱한 빵으로 연명했는데, 잇몸이 너무 아파서 그마저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물에 불리진 않고는 조금도 먹지 못했고 그마저도 금방 배탈이 났다.
덕분에 죽기 전 한 달은 먹은 것이 별로 없다.
그때는 괴로워서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 보니 이 동상은 내가 죽기 전 모습을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도 좀 멋있게 만들면 어디 덧나나.’
자세히 살펴보니 오른손 중지 끝과 붓이 유독 닳아 있다.
“만져봐. 반 고흐의 재능이 깃든다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영혼이 깃들긴 했다.
“가요.”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할아버지와 공원을 벗어나 조금 걸으니 시청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기 보이는 하얀 건물이 오베르 시청이란다.”1)
시청 건물도 그대로다.
맞은편에 있는 라부 여관을 두고 시청사 앞으로 다가갔다.
[La Mairien d’Auvers]
시청 건물 앞에 내 그림이 프린트되어 안내 문구와 함께 걸려 있다.
새하얀 외벽에 푸른 지붕.
저 건물을 처음 봤을 땐 그 청아한 외관에 놀라 그림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미완성이기도 하고.
지금 보니 아쉬운 곳이 없지 않으나 적어도 그때의 감정은 다시 느낄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나무는 솔직히 지금 봐도 잘 그렸다.
“대단하지 않니?”
“뭐가요?”
“저 평범한 건물이 한 사람의 화가에 의해 달리 보이잖느냐. 여기가 관광지가 된 것도 모두 반 고흐 덕분이고.”
반 고흐 미술관의 케빈도 그렇고.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있으면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평범한 마을이 반 고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렇게나 아름답게 느껴지지. 거기에 공감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것이고.”
“…….”
다시 생각해 보니 대단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했다는 말이니까.
“반 고흐는 이곳 오베르에서 70일 정도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내 옷깃을 여미며 말씀하셨다.
춥긴 춥다.
“이 시청이나 시냇가, 밀밭, 농가 등 보이는 대로 그린 게 72점이나 된단다. 죽기 전 며칠을 제외하면 하루에 한 점 이상 그린 거야.”
할아버지 말씀대로다.
이 시기에는 언제 그림을 못 그리게 될지 몰랐기에 눈에 들어오는 모든 걸 닥치는 대로 그렸다.
“곧 꺼질 것을 아는 불꽃처럼 모든 걸 불사르고 간 거지.”
절박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고.
“가요.”
시청사를 뒤로하니 곧장 내가 머물렀던 라부 여관이 눈에 들어왔다.
[auberge ravoux]
반갑게도 내가 머물렀던 그때 그 모습이다.
외벽도 멀쩡하고 도색은 새로 한 듯하다.
분홍색 바탕에 문과 창틀을 고동색으로 칠한 1층.
옅은 베이지색과 하얀색으로 칠한 2층이 묘하게 어울린다.
건물 앞 작은 나무는 반듯하게 정리해 두었고 건물 앞뒤로 꽃을 가꾸고 있다.
‘맙소사.’
건물 안에 사람이 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많진 않지만, 두 테이블이 차 있다.
설마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을 줄이야.
라부 부인의 맛없는 음식이 문득 그리워진다.
* * *
1)오베르 시청, 빈센트 반 고흐, 캔버스에 유채, 1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