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8화 (29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8화

10. 반 고흐가 죽은 곳(1)

[앙리 마르소 건재함 과시]

[고훈 또다시 기록을 갱신하다]

[인상주의의 거장이 천재 소년에 의해 부활하다]

[마르소의 보석을 거절한 고훈은 누구?]

[리처드 필립스, “마르소의 보석은 인류의 보석.”]

[마르소 갤러리 일일 방문자 1만 명에 행복한 비명]

지난 토요일.

마르소 갤러리 옥션을 방문한 세계적인 제품 디자이너 리처드 필립스는 <마르소의 보석>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젊은 거장이 만든 육신에 어린 천재가 생명을 불어넣자 인간 앙리 마르소가 완성되었다. 길 잃은 거장이 자신의 손을 바치니, 비로소 앙리 마르소가 예술로 거듭났다.”

한편 한이슬 문화 평론가는 관념에 과몰입된 동시대 미술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으로 평하기도 했다.

유명인사들이 극찬을 내놓는 가운데 <마르소의 보석>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하루 1만 명에 이르렀다.

고훈과의 불화로 부정적 이미지를 쌓던 앙리 마르소에 대한 평가가 뒤집힌 것이다.

앙리 마르소는 이번 경매에서 두 작품을 각각 320만 유로, 400만 유로에 판매, 여전한 인기를 과시했다.

대한민국의 천재 고훈의 <손님> 역시 400만 유로에 낙찰. 앙리 마르소의 <앙리 마르소 766>과 함께 올해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에 나란히 1, 2위를 기록했다.

한편 고훈의 <손님>을 산 사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언론이 앙리 마르소와 고훈의 관계에 집중할 때 평단은 <마르소의 보석>에 당황했다.

현대 미술의 경향은 과거 양식에서 탈피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마르소의 보석>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를 연상시키듯 완벽한 조형미와 사실적인 묘사를 전제하고 있었다.

고훈이 그려 넣은 눈동자는 비록 섬세하진 않았지만, 앙리 마르소 특유의 거만함과 더불어 그의 고독이 그대로 느껴졌다.

또한 앙리 마르소가 재작업을 거쳐 완성한 손 역시 화제의 중심이었다.

골드 이란 마블 대리석으로 조각한 신체는 앙리 마르소의 눈부신 위명과 화려한 배경을.

굳은살과 상처 가득한 손은 작가로서의 앙리 마르소를 말해 주었다.

자신을 들여다보려는 사색과 성찰이 온전히 전달되는 작품이었다.

이해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작품.

그것은 소통이 배제되었던 동시대 미술 경향과 동떨어져 있었다.

고훈의 작품도 마찬가지.

<손님>은 그들이 예술적 가치를 부여했던 많은 회화 작품과 결이 달랐다.

누가 봐도 그 뜻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열렬히 호응하는 대중이 그 증거였다.

<마르소의 보석>을 찾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고 인터넷에서는 천재 고훈에 관련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소수의 평론가는 어쩌면 앙리 마르소와 고훈을 주축으로 미술의 흐름이 바뀔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흐응.”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조교수 장미래는 프랑스 미술 포럼 사이트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현재 가장 화제를 모으는 두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세계 대전 이후.

많은 화가가 전쟁의 참혹함과 동시에 그들의 무력함을 깨달았다.

그전까지 그들이 이어오던 예술의 숭고함은 폭력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름다움을 좇는 일과 그것을 향유하는 즐거움 따위 현실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화가들은 전통을 버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행위에 의미를 두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 예술 형태를 파괴해 나갔다.

자학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예술은 조금씩 형태를 잃어 오직 기존 질서에 반하는 관념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마저 남아 있지 않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창작자 본인을 포함해 누구도 알 수 없는 기괴함만이 남았다.

누구보다도 고독한 시대에.

길 잃은 자아를 남기는 행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장미래는 이러한 경향에 저항하는 화가였다.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동시대 미술을 하는 이들에겐 얕은 미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배척되기도 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질당하는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녀는 고훈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조금씩 여론이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기해.’

장미래는 열 살 소년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생겨난 작은 파문에 괜히 기대를 걸고 싶었다.

└고훈 그림 본 사람 있냐?

└나. 재료가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색연필로 그런 걸 그릴 줄은 몰랐지.

└느낌이 분명한 게 진짜 좋더라. 조금만 봐도 무슨 의민지 딱 느껴지는데, 그게 다 안 것 같진 않아.

└ㅇㅇ 뭔가 느껴지긴 하는데 명확히는 말 못 하겠음.

└고훈이 경매장에서 그러더라. 말로 할 수 있는 감정이었으면 글로 썼을 거라고.

└ㅋㅋㅋㅋㅋ진짜 열 살 맞냐?

└그러니까ㅋㅋ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해 주니.

어쩌면 정말 다시 예술가들이 자학을 멈추고 다시금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예술가는 자신을 말하지만 동시에 이해받길 바라는 존재니까.

장미래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앙리 마르소랑 꽤 친해진 거 같은데.”

장미래는 스승 고수열이 얼마나 걱정할지 떠올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 * *

2027년 12월 31일.

6년간 근무했던 집무실을 둘러본 미셸 플라티니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빼곡하게 차 있던 물건을 정리하니 좁게만 느껴졌던 사무실이 너무나 넓어 보였다.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전에 시작한 큐레이터 일.

부족한 경험과 지식을 채우기 위해 전시회란 전시회를 모두 찾아다녔고 그렇게 조금씩 인정받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다루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학생 때부터 이미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킨 앙리 마르소의 작품을 가장 돋보이게 할 큐레이터는 본인뿐이라고 자부했다.

일은 점차 늘어났고 책임과 권한도 뒤따랐다.

그러는 사이에 그와의 관계도 달라졌다.

대학 동기이자 앙숙에서 사업 파트너로. 연인으로.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생각해 보면 그는 좋은 면도 싫은 면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하고 헤어진 지금도 항상 같았다.

한결같이 멋지고.

한결같이 거지 같았다.

달라진 건 미셸 플라티니.

보다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다루고 싶었다. 이름은 없지만 뛰어난 작가를 키워보고 싶기도 했다.

앙리 마르소란 천재의 명성에 기대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력한 만큼 큐레이터로서의 본인을 자부했고 그간 쌓아온 경험을 마음껏 펼치고 싶었다.

고맙게도.

좌절했던 앙리 마르소는 금방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헤어지고 나서의 찜찜함조차 없으니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끙.”

미셸이 마지막 짐을 옮기기 위해 상자를 들었다.

문 앞에 앙리 마르소가 서 있었다.

조금 놀란 미셸이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배웅해 주는 거야?”

앙리 마르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에 삐딱하게 기대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미셸 플라티니가 문 앞으로 가도 그는 비킬 생각이 없었다.

“비켜줄래?”

앙리 마르소가 입을 뗐다.

“가지 마.”

미셸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하다 고개를 돌렸다.

“뭐래.”

미셸이 억지로 밖으로 나서려 하자 앙리가 슬쩍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 말했다.

“난 어쩌라고.”

그의 뻔뻔함에 어이가 없었다.

미셸이 상자를 내려놓고 돌아봤다.

“다른 사람 찾아보지그래? 돈 많잖아?”

미셸이 돈으로 사람과 사랑조차 살 수 있다고 믿는 앙리를 잔뜩 비꼬았다.

“필요 없어.”

앙리의 진지한 태도에 미셸이 팔짱을 꼈다.

“너 아니면 안 돼.”

처음 듣는 말이었다.

무뚝뚝한 앙리 마르소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웃겨. 인제 와서.”

미셸이 다시 상자를 들어 올리려 할 때 앙리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단호한 눈으로 시선을 온전히 마주하며 말했다.

“가지 마.”

“놔.”

미셸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제 너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지긋지긋해. 네 맘대로 미룬 일정 수습하는 것도 지겨워. 돈 많이 준다고? 돈 좋아하는 사람 구해서 써. 귀찮게 굴지 말고.”

미셸의 말을 듣고 있던 앙리가 입을 열었다.

“너 말고 필요 없어.”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싸울 때마다 막무가내로 그저 요구하고 바랄 뿐, 남 이야기는 조금도 듣지 않았다.

미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 몸을 돌렸다.

“네가.”

앙리가 다시 한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네가 다른 사람 작품 다루는 거 못 봐.”

끝까지 비겁했다.

“다른 그림 걸지 마.”

그저 요구할 뿐.

그는 그녀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함께해도 외로움을 주는 그를 더는 믿을 수 없었다.

큐레이터로서의 목표조차 막아서려는 그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웃기지 마. 내가 뭘 하든 내 일이야. 누구랑 일하든 무슨 테마로 꾸미든 내 마음이라고.”

앙리 마르소가 침을 삼켰다.

잠시 망설이더니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해.”

지난 6년간 마르소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 중 앙리의 작품이 아니었던 것은 고훈의 <손님>뿐이었다.

“맘대로 해. 누굴 데려오든 뭘 전시하든 네 마음대로 하라고.”

앙리의 제안이 그에게 얼마나 큰 결정인지 알기에 당황한 미셸이 그를 노려보았다.

“선심 쓰는 척하지 마. 여기 말고도 일할 곳 널렸어.”

“얼마나 필요해.”

“……뭐?”

“얼마나 필요하냐고. 원하는 대로 줄게.”

미셸이 앙리의 뺨을 때렸다.

흥분한 탓에 거칠게 숨을 내쉬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즐거웠던 추억마저.

진심으로 사랑했던 기억마저 망가뜨리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말밖에 못 해?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내가 돈 때문에 너랑 일했어? 네 눈엔 내가 그따위밖에 안 됐냐고!”

앙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돈 좋아하는 사람 찾으라고! 일하고 싶은 사람 넘칠 텐데 뭐가 걱정이야!”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네 그런 점이 싫다고. 세상에 화가가 너뿐이야? 조각은 너만 해? 일하기 좋은 곳 얼마든지 있어! 나랑 일하고 싶다는 사람 얼마든지 있다고!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데!”

미셸이 그간 쌓인 한을 토해냈다.

앙리가 악을 쓰는 그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거긴 나 없잖아.”

미셸이 코웃음 쳤다.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와? 내가 너 없으면 일 못 할 것 같아?”

“그래.”

앙리는 단 한 번도 미셸을 의심하지 않았다.

앙리 마르소의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잘 전시해 주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앞에서는 웃지만, 뒤에서는 험담하고 다니는 버러지들과 미셸 플라티니는 질적으로 다르니까.

자기 그림을 전시할 사람은 미셸 플라티니뿐이고, 그녀에게 어울리는 작가 또한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 외 사람을 사랑해 본 적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에게 높은 연봉을 책정하고, 집과 차를 사 주고 더 많은 권한을 넘기는 것뿐이었다.

앙리가 다시 말했다.

“나도 너 없으면 안 되니까.”

앙리의 미숙한 고백에 미셸이 당황했다.

그가 말했던 말들이 자신을 무시했던 것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낀 것이었다.

미셸을 바라보던 앙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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