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7화
9. 천재와 괴짜(4)
내 작품을 높이 평가해 주는 건 기쁘지만 터무니없는 금액에 정말 이래도 되나 싶다.
리처드 필립스가 가면 쓴 남자를 흘겨보더니 눈썹을 모으고 고민에 빠졌다.
사진 찍는 기자들의 손이 바쁘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앙리 마르소의 최신작이자 3년 만에 경매에 나온 <앙리 마르소 766>과 같은 가격.
경매사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400만, 400만 유로 나왔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가면을 쓴 신사께서 400만 유로 입찰하셨습니다. 410만 유로 계십니까?”
리처드 필립스가 함께 온 남자와 귓속말을 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400만 유로. 400만 유로. 낙찰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서 두 번의 경매와 달리 박수 소리에 당황한 감정이 섞여 있다.
“조금 전 낙찰된 손님의 작가 고훈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경매 참가자들이 다시 한번 박수를 보냈다.
손뼉을 치곤 있지만 저마다 함께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기자들은 뭔가 바쁘게 움직이고 테라스 위에 계신 할아버지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무대 앞에 섰다.
마이크가 높다.
‘어떻게 내리지?’
어떤 구조인지 알 수 없다.
키도 작은 탓에 끙끙대고 있으니 경매 참가자들이 웃는다.
“쿡쿡.”
“흐.”
입을 가리고 소리 죽여 웃는 신사 숙녀들인데 왠지 모르게 흐뭇하게 여기는 듯해 기분 나쁘다.
직원이 달려와 마이크를 낮춰 주었다.
“어.”
참가자들을 둘러보니 다들 뭔가 근사한 말을 하길 바라는 눈치다.
이런 자리에 서 본 적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으니 진행자가 소감을 부탁했다.
소감이라.
“좋네요.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참가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가 웃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아예 손으로 얼굴을 덮고 계시다.
“여기 마르소 갤러리 보고 정말 부러웠거든요. 자기 작품을 마음껏 전시할 수 있고 또 여러분을 모실 수도 있으니까요. 저도 제 갤러리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가면 쓴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덕분에 꿈에 한 발 더 다가갔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참가자들이 박수를 보내자 남자가 시선을 피했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듯하다.
“그림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진행자의 질문이 거슬린다.
이 그림에 담은 마음을 어떻게 간략히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반 고흐 미술관을 찾은 이들을 보는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지 거듭 고민해 완성한 그림이다.
그런 <손님>을 어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진행자를 보며 말했다.
“아, 좀 풀어서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있었으면 글로 적었을 거예요. 빈센트 반 고흐가 느꼈을 감정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해서 그렸습니다. 이 그림 이외에 설명은 필요하지 않아요.”
당황한 진행자가 말을 삼키는데 리처드 필립스가 손뼉을 쳤다.
곧 경매 참가자 모두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들이 정한 <손님>의 가격이 당황스럽긴 하지만 적어도 저마다 그만한 가치를 찾았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손님>이 단순히 미래에 크게 성공할 화가에 대한 투자든.
단순히 예쁜 그림이든.
혹은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했든 그것은 저들의 몫.
평가는 내가 감수할 영역이다.
나와 저들 사이에 구태의연한 설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꼭 말씀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입을 열자 박수 소리가 잦아들었다.
“덕분에 다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어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거나, 그저 행복하지만은 않지만 적어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잘 안다.
<손님>을 낙찰받은 가면 남자만이 아니라.
내 그림을 사려고 했던 이들 덕분에 난 또다시 붓을 들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박수 소리가 더욱 커져 마지막 말을 하기까지 꽤 오래 기다려야 했다.
“오늘은 정말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남았는데, 이번 전시회 최고의 작품이 주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기자들이 눈을 빛낸다.
“네. 맞아요. 제가 눈 그린 조각상이요.”
2층에서 할아버지가 팔을 버둥버둥 휘둘렀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는 것 같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지금 이곳에 없는 앙리 마르소에게 전하는 마지막 충고다.
“저는 그렇게 멋진 조각상을 본 적 없어요. 그만한 작품을 만들고도 만족할 수 없었던 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가 그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를 전하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진행자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행사를 진행했다.
“작가 고훈의 소감이었습니다. 소년이라고는 할 수 없는, 확고한 작품관에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네요.”
어느새 내려온 할아버지가 어깨를 감쌌다.
“그럼 마지막 순서로 마르소 갤러리에서 특별히 준비한 이벤트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경매만 하는 줄 알았는데 뭔가 더 있는 모양.
내 그림을 산 남자와 인사도 해야 하고 행사가 끝나길 기다릴 겸 무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커튼이 걷혔다.
‘벌써 갔나?’
가면 쓴 남자가 어디 있는지 안 보인다. 그림을 수령해야 할 테니 벌써 나갔을 리는 없는데 이상하다.
쿠르르릉-
옥션 직원들이 무엇인가를 끌고 나왔다.
소리가 묵직하다.
천으로 덮여 있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래에는 옮기기 쉽도록 바퀴가 달려 있는데 한눈에 봐도 단단한 강철 수레가 힘겨워하고 있다.
쿠당탕탕-
무대 뒤쪽에서 또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나도 할아버지도 의아해하던 차, 앙리 마르소가 걸어 나왔다.
‘쯧쯧.’
그날 이후로 칩거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머리가 옆으로 눌린 걸 보니 잠이라도 자다가 늦은 듯하다.
마이크 앞에 섰다.
“이거 왜 이리 낮아? 아, 꼬맹이가 썼지.”
저놈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정이 안 간다.
옷매무새를 고친 앙리 마르소가 입맛을 다시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혹시라도 다시 달려들 것을 대비해 주먹을 쥐는데 곧 경매 참가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난 며칠간 나와 관련한 일로 요란했다.”
자의식이 과하다.
“그동안 따로 나서지 않은 이유는 나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어도 저라는 말은 안 쓴다.
“사과는 없으십니까!”
그때 한 기자가 용기 내어 소리쳤다.
앙리 마르소가 그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직원에게 일렀다.
“끌어내.”
언론을 탄압하다니.
악랄하기 그지없는 놈이다.
내가 살아 있을 때도 저런 짓을 하는 귀족은 드물었다.
기자가 직원들에게 반강제로 끌려나가고 다른 기자들은 그 광경을 또 촬영해 댄다.
어떻게 하면 욕을 많이 먹을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이 분명하다.
앙리 마르소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간의 결과를 선보이려고 한다. 다들 운이 좋네.”
저 시건방진 인간의 말에 웃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하다.
앙리 마르소가 눈짓하자 직원이 천을 거뒀다.
<마르소의 보석>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더니 아무래도 수정을 한 듯.
그러나 눈은 내가 그렸던 모습 그대로 변함이 없다.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자.
양손이 채색되어 있다.
경매 참가자들과 기자들도 눈치챘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려 한다.
무대 스크린에 <마르소의 보석>의 손이 확대되어 비쳤다.
“오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붓을 오래 잡고 있어 생기는 손가락의 굳은살, 끌과 망치를 반복 사용해 박인 손바닥 굳은살.
손등과 바닥의 혈관과 그 굴곡.
손톱 아래 얇은 살과 지문을 포함한 주름까지 표현되어 마치 대리석상에 사람의 손을 붙인 듯하다.
너무나 사실적이라 기괴함까지 느껴지는 그것이 당장이라도 붓을 움직일 것 같다.
경이롭다.
최고 수준의 조각가가 ‘세공’한 대리석상 위에 최고 수준의 화가가 덧그린 것이다.
이 이상 완벽할 수 없다.
대체 어떤 식으로 작업했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을 정도다.
“실수가 있었다.”
넋을 놓고 지켜보고 있을 때 앙리 마르소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당시 이 작품에 만족할 수 없었고 이대로 알려질 바에야 차라리 없던 일로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완벽하지 않은 작품에 내 이름을 붙일 수 없으니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곧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저 녀석이 답을 구했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마르소의 보석은 나라고. 이 손이라고. 내가 27년간 갈고닦아 온 기술이라고.”
나도.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간간이 이어질 뿐이다.
“감히.”
담담하던 놈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된다.
“나를 가르치려고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니 알겠더군. 녀석이 나조차 믿지 않았던 나의 우수함을 알아봤다고.”
“…….”
반성하나 싶었는데 개구리 파리 토하는 소리나 해댄다.
다시 한 판 붙자는 말이 분명하다.
“고훈.”
앙리 마르소가 불렀다.
턱을 날려버릴 생각으로 다시 주먹을 쥐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칭찬하지.”
경매장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박수를 보내기 시작한다.
몇몇은 눈물을 훌쩍이기도 한다.
대체 무엇에 감동했는지 모를 일이다.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에 화해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저들에게는 감동적인 화해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겐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 선심 쓰는 척하는 것으로 보인다.
“계속 찌질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뭐?”
“그래요. 용서해 줄게요.”
앙리 마르소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자 입을 씰룩거리며 간신히 참는다.
한 번 심호흡하더니 <마르소의 보석>을 향해 턱짓했다.
“가져가. 선물이다.”
“오오!”
경매장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앙리 마르소란 작가의 역작 중의 역작.
거기에 그에 관련한 일화도 있으니 <마르소의 보석>의 경매가는 오늘 낙찰된 물품의 가격을 합해도 부족할 것이다.
“대체 저게 얼마야?”
“저건 가져야 하는데.”
“마르소 작품 최고가가 얼마였지?”
어지간히 가지고 싶은 듯 경매에 참여했던 몇몇 사람이 본심을 숨기지 못했다.
심지어 할아버지의 지인 리처드 필립스도 턱을 쓸며 입맛을 다신다.
“싫어요.”
경매장에 침묵이 흘렀다.
“…….”
“…….”
고장 났던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기괴하게 비틀며 다그쳤다.
“뭐라고? 시, 싫어?”
“네. 싫어요.”
“왜!”
귀청 떨어지겠다.
“안 보여? 어? 올라와! 올라와서 보라고!”
마침 자세히 보고 싶었기에 말리는 할아버지를 안심시키고 무대에 올랐다.
확실히 잘 만들었다.
가히 예술의 경지를 넘보는 신의 기술이다.
“멋지네요.”
“그런데 왜! 뭐가 불만이야!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도 부족할 판에!”
“너무 진짜 같아서 징그러워요.”
황금빛 대리석상에 사람 손을 잘라다 붙인 것 같아 징그럽다.
“이,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앙리 마르소가 눈을 부라리더니 미셸이 부른 보안 직원들에게 양팔을 잡혀 끌려나갔다.
“이거 놔! 안 놔! 너읍! 다시 한번 말햅읍!”
미셸 플라티니가 앞으로 나섰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짓는 걸 보니 프로는 프로다.
“정말 감동적인 화해였죠? 두 사람의 작품을 전시한 큐레이터로서 안심했습니다. 이후 미팅실에서 기자분들께 보도자료 전달 및 질의응답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방문객 여러분께서는 이후 마련한 파티에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