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6화 (28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6화

9. 천재와 괴짜(3)

2주 만에 마르소 갤러리를 방문했다.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 있다. 특히 기자들이 정문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미셸 플라티니 덕분에 뒤쪽 문을 통해 소란을 피할 수 있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셸이 할아버지께 인사하자 할아버지도 묵례로 인사를 받았다.

그날 이후 전화로 다친 곳은 없는지 걱정해 주며 선물도 따로 보내주었기에 앙리 마르소와 달리 야박하게 대하지 않으신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잘 지냈어?”

“아니요.”

그녀가 눈꼬리를 내렸다.

“많이 놀랐지? 괜찮아. 다시 그런 일 있으면 경찰 아저씨가 혼내줄 거니까.”

아직 앙리 마르소가 달려든 일을 걱정하는 것 같다.

“그건 괜찮은데 오르세에 못 갔거든요. 루브르도.”

“어머. 왜? 기자들 때문에?”

“네.”

기껏 파리까지 왔는데 얻은 것이 없다. 암스테르담에서처럼 조용히 구경하고 다니고 싶다.

그런 생각을 전하니 미셸이 악담 같은 위로를 전했다.

“앞으로 더 유명해질 텐데 어떡해?”

다른 화제가 생기면 조금씩 관심도 줄어들 테니 하루 빨리 잠잠해지길 바랄 뿐이다.

“여기예요.”

미셸이 문을 열자 작은 테라스가 나왔다.

마르소 갤러리 부속 옥션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특별석이다.

“마실 건 어떻게 준비할까요?”

“괜찮소.”

화가 완전히 풀리진 않았는지 할아버지가 괜히 거절하셨다.

미셸도 이해한다는 듯 다른 말을 안 붙이고 고개를 숙였다.

“훈이는?”

“콜라요.”

“어쩌지. 콜라가 없는데. 주스는 어때?”

“좋아요.”

미셸이 자리를 비우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어차피 미술관 구경 못 할 거면 여기 계속 있을 필요 없잖아요?”

“그렇지.”

“그럼 차라리 돌아가서 그림 그리고 싶어요.”

약속한 날까지 두 달 정도 남았지만 여기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다.

“흠. 그것도 그렇구나.”

팔짱을 낀 채 고민하시나 싶더니 혀를 찼다.

“그놈 때문에 다 망쳤어. 온 김에 천천히 둘러보면 얼마나 좋아.”

맞는 말씀이다.

“미술관에 문의해 놨으니 어떻게 방법이 있을 거다. 답변 올 때까진 답답해도 조금만 참자.”

반 고흐 미술관을 구경했을 때처럼 이른 시간이나 늦은 시간을 활용하면 이목을 피할 수도 있겠다 싶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나 반응도 궁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고개를 끄덕이고 기다리니 어느새 사람이 가득 찼다.

간혹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도 있는데, 돈 많은 인간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다.

앙리 마르소는 어디 있는지 안 보인다.

직원이 가져다준 사과 주스가 놀랍도록 훌륭하다.

‘탄산을 넣을 생각은 대체 어떻게 했을까.’

마치 콜라처럼 입속에서 톡톡 튀는데 사과 향과 어우러져 입안이 상쾌해진다.

사과 주스를 만든 사람도 훌륭한 예술가다.

진행자가 나섰다.

“내빈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진행을 맡은 유진입니다.”

사람들이 가볍게 박수를 보냈다.

저들 중 오늘 내 그림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살피게 된다.

할아버지의 지인 리처드 필립스도 눈에 띈다.

“오늘 출품된 작품은 총 세 점입니다. 한 작품씩 만나보도록 하죠.”

진행자 유진의 안내에 따라, 옥션 직원이 천으로 가린 그림 한 점을 가지고 나왔다.

무대 가운데에서 공개된 작품은 앙리 마르소의 자화상.

내 기억으로는 760번째 작품이다.

“오오.”

“흠.”

경매장을 찾은 사람들도 감탄사를 흘린다.

“앙리 마르소의 760번째 자화상입니다. 30F 캔버스에 유화로 날카로운 붓 터치가 인상적이죠. 여기 이 모자는 아프가니스탄산 청금석 안료를 직접 개어 표현되었습니다.”

참으로 친절한 경매사다.

작품 가격을 형성하는 요인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어떤 재료를 썼는지도 알려주네요.”

“재료도 작품 가격에 영향을 주니까. 청금석처럼 비싼 재료가 들어가면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

할아버지 말씀대로 청금석은 작품 가격에 큰 영향을 주는 고가의 재료다.

청금석으로 만든 울트라 마린은 19세기엔 금만큼 비싸서,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가치가 지금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작가 앙리 마르소에 대해서는 굳이 자세히 말씀드릴 필요 없겠죠.”

유진이 손짓하자 앙리 마르소의 약력이 큰 화면에 소개되었다.

로드 아일랜드 스쿨 졸업.

영국 왕립 미술 대학 석사 학위, 박사 학위 취득.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

휴고 보스 미술상.

2025 터너 상.

자세히는 몰라도 참 많이 받았다 싶다.

“그럼 앙리 마르소의 760번째 자화상 경매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입찰 시작가는 10만 유로입니다. 10만 유로 있습니까?”

시작 가격이 10만 유로라는 것에 놀라고 있는데 한 남자가 바로 손 팻말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10만 유로 나왔습니다. 20만 유로 찾습니다. 20만 유로 계십니까?”

뭔가 잘못됐다.

곧장 두 배로 뛰어버린 가격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팻말을 든다.

“뒤쪽에 계신 신사께서 20만 유로 입찰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40만 유로 있습니까?”

앙리 마르소의 760번째 자화상은 순식간에 80만 유로까지 치솟았다.

입찰자가 나올 때마다 두 배로 뛰는데도 망설이는 사람이 없다.

“160만 유로 계십니까?”

그래도 160만 유로까지 이르자 손 팻말을 드는 사람이 정해지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200만 유로로 가겠습니다. 200만 유로 계십니까?”

젊은 여성과 중년 남성이 번갈아 가며 경쟁에 붙었다.

뛰어난 작품이긴 하지만 대체 얼마를 주고 사려는지 당황스럽다.

“280만 유로 계십니까? 280만 유로 찾습니다. 감사합니다. 280만 유로 나왔습니다.”

“훈아. 이 상황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할아버지가 나지막이 입을 여셨다.

“이런 곳을 찾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단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벌 수 없는 돈을 아무 거리낌 없이 쓰는 사람들이야.”

할아버지가 말씀하던 중 앙리 마르소의 <앙리 마르소 760>이 낙찰되었다.

“320만 유로 낙찰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320만 유로입니다. 320만 유로에 낙찰되었습니다.”

경매사가 도장을 찍었다.

나 또한 감명 깊게 봤으나 포테이토 피자 16만 판이나 되는 감동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곳은 돈 많은 이들을 위한 여흥 공간이란다. 욕심을 자극해서 말도 안 되는 가격에 그림을 거래하는 곳이지. 또 작품을 사는 것만이 목적이 아닐 때도 있단다.”

작품을 사고파는 경매장에서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이곳에 익숙해지면 안 돼. 저 그림이 320만 유로에 팔렸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네.”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그리는 그림에는 자신을 녹여낼 수 없는 법이란다.”

그림의 가격은 어떻게 형성될까.

화상 생활을 할 때도 느꼈지만 정말 유명한 화가의 걸작은 한 사람은커녕 한 가족이 평생 벌 돈으로도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혹은 한 마을이 몇십 년간 모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입장이지만 지금도 그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다.

말 그대로.

<앙리 마르소 760>을 독점하는 기쁨과 포테이토 피자 16만 판을 먹을 수 있는 기쁨을 비교하면 후자에 손을 들고 싶다.

하지만 경매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림에 320만 유로를 쓰고도 피자 16만 판을 살 수 있다.

그러니 사고 싶은 그림을 위해, 정확히는 남이 없는 걸 가지려는 욕심으로 320만 유로란 금액을 기꺼이 지불하는 것이다.

부의 격차는 여전한 건가.

‘하지만.’

할아버지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건 따로 있다.

저 그림이 모든 사람에게 320만 유로의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씀에 이분이 추구하는 작품관이 담겨 있다.

할아버지는 몇몇 사람에게만 수백만 유로의 가치가 있는 그림을 그리길 바라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포테이토 피자 한 판 정도의 감동을 줄 수 있길 바라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생각이야말로 예술가가 추구해야 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 말씀처럼.

돈 많은 한 사람을 위한 작품을 그리면 그 사람을 위한 그림만 그리게 된다.

그 그림에 나를 담을 수 있을까?

그러다가 비참하게 죽은 렘브란트가 떠오른다.

“다음으로 소개해 드릴 작품은 앙리 마르소의 766번째 자화상입니다. 3년 만에 경매에 나온 앙리 마르소의 자화상이 오늘 두 점이나 소개되는군요.”

다음은 슬픈 자화상 <앙리 마르소 766>이다.

자기 자신을 보는 눈과 미간만을 표현했는데 캔버스의 위아래는 모두 울트라 마린으로 칠해두었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던져보는 질문을 상기하게 한다.

섬세한 속눈썹과 반투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꼭 그를 들여다보는 것만 같다.

자신을 알고 싶은 앙리 마르소의 시선과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선이 동일시되는 걸 유도했다.

역시 그는 천재다.

기술적으로는 지금의 나와 비교할 수 없이 세련되고 정교하다.

심상을 직관적으로 전달해서 공감을 이끌어내는 능력도 준수하다.

“400만 유로 나왔습니다. 500만 유로 찾습니다. 500만 유로 계십니까?”

경매장을 찾은 사람들도 나와 같이 <앙리 마르소 766>에서 무엇인가를 느낀 듯하다.

“400만 유로 낙찰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760>과 <766>이 출품되었으니 남은 건 내 그림뿐인데, 오늘 세 작품을 다룬다고 했으니 <마르소의 보석>은 팔지 않을 생각인 듯하다.

‘결국 수정하지 않았나.’

내가 그린 눈을 고치지 않고 결국 폐기한 듯.

혹은 그대로 보관하고 있더라도 자기가 완성하지 않은 작품을 팔 순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다음은 오늘 경매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작품입니다. 손님이란 제목의 색연필화입니다. A3 크기죠.”

직원이 천을 벗겨내자 경매장이 술렁거렸다.

“작가는 해바라기로 알려진 고훈입니다. 알려진 사실대로 고수열 경의 손자로 최근 미술계의 신성으로 떠오르고 있죠. 내년 초에는 열 살 나이에 첫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도유망한 천재라는 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할아버지까지 언급하며 나를 포장하고 있다.

“입찰 시작가는 1만 유로입니다. 1만 유로 있습니까?”

시작부터 1,400만 원.

내게는 충분한 액수지만 내 그림을 사러 온 부자들에겐 아닌 듯하다.

리처드 필립스가 100만 유로를 불렀다.

“100만 유로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110만 유로 찾습니다. 110만 유로 계십니까?”

정중한 말투로 일관하던 경매사의 목소리가 조금 흥분한 것처럼 들린다.

노년의 여성이 팻말을 들었다.

“110만 유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120만 유로 찾습니다. 120만 유로입니다.”

리처드 필립스가 또 팻말을 들었다.

1만 유로부터 시작했던 것이 10분도 채 되지 않아 120만 유로까지 올랐다.

내 그림을 그렇게까지 가지고 싶나 싶어 기분이 좋으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다.

그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리처드 필립스와 할머니는 한 번 더 붙어, 가격은 <해바라기>와 같은 금액인 200만 유로까지 오르고 말았다.

“200만 유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부터는 20만 유로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20만 유로 계십니까?”

경매사가 리처드 필립스와 경쟁하던 할머니에게 시선을 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팻말을 든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사려는 거예요?”

그림을 팔고 싶어 안달이 났던 내게 너무 비싸게 팔려 걱정하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네 미래를 보는 거란다.”

“미래요?”

“앞으로 네가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면 오늘 산 그림 가격이 몇 배는 뛰겠지. 저들에겐 투자 대상인 거야.”

기분이 석연치 않았던 이유를 찾았다.

하긴.

나중에 회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큰돈을 지불하는 거겠지만 썩 내키지 않는다.

경쟁이 점점 더 과열되어 260만 유로까지 이르렀다.

이젠 리처드 필립스도 58번 팻말을 가진 할머니도 망설인다.

경매사도 눈치를 챘는지 가격 인상 폭을 더 늘리지 않았다.

리처드 필립스가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300만 유로.”

경매장이 술렁였다.

앙리 마르소의 760번째 자화상이 320만 유로에 낙찰되었는데, 그와 비슷한 액수를 내건 것이다.

고작 ‘열 살 소년’의 그림에.

나조차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300만 유로 나왔습니다. 300만 유로 이상 계십니까?”

할머니가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결국 전시회가 열리기 전부터 얼마를 들이든 사겠다고 예고한 리처드 필립스가 낙찰받은 듯하다.

직원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인사 준비 부탁드립니다.”

“네. 할아버지, 다녀올게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셨다.

복잡한 마음으로 2층 테라스에서 내려와 1층으로 향했다.

직원이 무거운 문을 열어주자 가면을 쓴 한 남자가 팻말을 들었다.

“400만 유로.”

나도.

경매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경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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