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4화
9. 천재와 괴짜(1)
[파란의 마르소 전시회]
[고훈 <마르소의 보석>을 완성하다]
[거장 앙리 마르소, 아홉 살 소년 멱살 잡아]
[아홉 살 소년! 박치기로 앙리 마르소를 무찌르다!]
[<앙리 마르소 766> 경매 예정]
[고훈 <손님> 평단의 극찬]
[퍼포먼스인가 파국인가]
2027년 12월 11일.
파리 소재의 마르소 갤러리에서 두 천재의 싸움이 화제가 되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앙리 마르소는 자각상 <마르소의 보석> 앞에서 진귀한 보석을 깔아두고 고민하는 연출을 보였다.
자신의 에메랄드빛 눈에 적합한 보석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급기야 조각상을 내리고 자신이 받침대 위에 올라서는 기행을 선보였다.
미술평론가 닐 에반스는 “앙리 마르소는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였다. 스스로 작품이 됨으로써 예술은 작품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주체라는 걸 표현한 것.”이라고 평했다.
한편 <해바라기>로 알려진 고훈은 그의 행동을 도피로 규정하며 꾸짖었다.
앙리 마르소가 그에 응하며 발발한 설전은 고훈이 <마르소의 보석>에 눈을 그리면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앙리 마르소는 고훈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고 고훈은 그런 앙리 마르소의 얼굴을 들이박아 전시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들의 기행은 순식간에 화제가 되어 유럽 전역에 이틀 연속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이 의도된 퍼포먼스였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앙리 마르소가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도 고훈이 그린 눈을 수정 또는 지우지 않은 점.
고훈 측이 앙리 마르소를 아동폭행죄로 고소하지 않고, 코피가 난 앙리 마르소 측 역시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점.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기행 덕분에 고훈의 <손님>과 앙리 마르소의 <마르소의 보석>, <앙리 마르소 766>의 구입 문의가 폭주하게 된 것을 근거로 한 주장이다.
이들은 앙리 마르소가 조각하고 고훈이 채색한 <마르소의 보석>이야말로 이번 전시회가 두 사람의 합동 전시회임을 상징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 두 사람의 작품은 이달 말 마르소 갤러리가 직접 경매에 올릴 예정이다.
고훈과 앙리 마르소의 소식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현재 전성기를 구가하는 젊은 거장과 이제 막 떠오른 신예의 기행은 프랑스 국영 방송사 텔레비지옹과 TF1의 메인 뉴스로 다뤄지기도 했다.
덕분에 2027 마르소 전시회는 하루에만 5천 명 이상이 직접 방문하여 마르소 갤러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리고 말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
└대체 언제 적 드립이에요 아조씨ㅠ 7년 전 밈을 ㅠㅠ
└ㅋㅋㅋㅋ아니 얘네 친했던 거야?
└진짜 맞아? 싸웠잖앜ㅋㅋ 심지어 앙리 코피도 났다곸ㅋㅋㅋㅋ
└찐이었으면 둘 다 고소했겠지ㅋ
└고수열은 엄청 화난 것 같던데.
└ㅇㅇ 나 거기 있었는데 고수열이 앙리 마르소 죽이는 거 아닐까 싶긴 했어.
└짜고 치는 거지. 말이 되냐 30대 남자가 아홉 살 먹은 애한테 맞아서 코피 흘리는 게.
└열 살 아님?
└2018년생이라 아홉 살 맞음.
└이제 만 나이로 통일 좀 하자.
└요즘은 그림 홍보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네.
└리처드 필립스가 <손님> 사고 싶다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경매 붙었대.
└이 정도 해프닝은 있어야 팔린단 거넼ㅋㅋ
└그럴 만도 한 게 <손님> 진짜 대박임. 볼 수 있으면 꼭 봐. 보면 막 가슴이 따뜻해지는 게, 먹먹하기도 하고 진짜 좋음.
└그림 잘 모르는 나도 뭉클하더라. 반 고흐 생각도 나고.
└반 고흐가 자기 그림이 얼마나 사랑받는지 알면 감격하긴 하겠지.
└앙리 마르소 자화상도 멋있던데.
└앙리가 멋있나?
└아니야?
└귀엽지 않아? 나 멋있지! 자신감 뿜뿜하는 애 같음.
└그건 ㅇㅈ 좀 애 같긴 함.
고훈과 앙리 마르소에겐 다행스럽게도 촬영이 금지된 터라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선 상세히 전달되지 않았다.
또한 닐 에반스와 같은 몇몇 평론가가 두 사람의 행동을 예술적 퍼포먼스로 받아들였기에 사건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 덕에 매일 오천 명 이상이 고훈과 앙리 마르소의 작품을 구경하러 마르소 갤러리를 찾았고.
그들의 후기를 통해 고훈의 <손님>과 앙리 마르소의 <자화상>의 진가가 널리 알려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은 작품은 다름 아닌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공동작업 한 <마르소의 보석>.
마르소 갤러리 수석 큐레이터 미셸 플라티니는 <마르소의 보석>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앙리를 보며 웃었다.
“큭쿱쿡쿡.”
“웃지 마.”
“아~ 핰핳핰핳핳!”
앙리 마르소가 해내지 못한 <마르소의 보석>을 만 아홉 살 아이가 훌륭히 완성했고, 그것에 분해하는 모습이 너무나 통쾌했다.
거만하며 독단적이고 폭력적인 그가 소년의 박치기에 코피를 흘린 것까지.
그보다 완벽한 상황은 없었다.
덕분에 어제와 오늘 미셸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뭐가 웃겨!”
“재밌잖아. 당신이 못 한 걸 그 애는 1분도 안 되어서 했으니.”
앙리 마르소가 혀를 찼다.
분하게도.
고훈이 그려 넣은 눈은 그가 바라던 모습 그대로였다.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물건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보석만 찾던 그에게 경종을 울린 것이었다.
마르소의 보석은 당신이라는 말이.
수십 년간 단련해 온 본인의 기술이야말로 진짜 보물이 아니냔 꾸짖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믿기지 않아. 거기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해?”
미셸이 앙리를 탓했다.
“뭘.”
“그 아이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알려줬어. 받침대 위에 올라간 거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화난다고 어린애 멱살을 잡아?”
“그 꼬맹이가 먼저 손댔어.”
“쓸모없다며. 돌조각 따위라며.”
“…….”
“도망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폭력까지. 어린애한테 얻어맞기나 하고. 대체 언제 철들래?”
“입 다물어.”
“부끄럽지도 않나 몰라. 걔 말 틀린 거 하나 없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걸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 포기하고 그 위에 올라간 걸 창피하게 여겨야 해.”
“닥치라고!”
툭-
미셸 플라티니가 봉투를 던졌다.
그것을 본 앙리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자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일을 입에 담았다.
“다른 큐레이터 찾아. 당신이랑 일 못 하겠어.”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좁혔다.
파리를 뒤집어도 마르소 갤러리만큼 좋은 대우를 해주는 곳은 없었다.
더군다나 미셸 플라티니는 권한으로나 보수로나 갤러리의 대표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의 작품을 다루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갤러리 전체를 넘긴 것이었다.
나가겠다니.
믿을 수 없었다.
“웃기지 마.”
“하나도 안 웃겨.”
두 사람이 대화 없이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이미 마음을 정리한 미셸 플라티니가 몸을 돌리고 가방을 챙겼다.
“거기 서.”
또각-
“거기 서!”
구두 소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네가 가진 것들이 네 힘으로 얻은 거라고 생각해? 날 떠나서 네가 얼마나 잘 될 것 같아!”
수십억 유로의 자산.
유럽 대륙을 넘어 전 세계에 알려진 명성과 아름다운 외모.
모든 조건이 완벽한 자신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앙리의 예상대로 미셸 플라티니가 슬쩍 돌아봤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돈이니?”
미셸은 앙리 마르소란 남자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즐거웠다.
그만의 독특한 화풍에 매력을 느꼈고 솔직하진 않지만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적어도 작품을 만들 때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그 진지함이 멋있었다.
외모는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지난 몇 달간 실망을 거듭할 뿐이었다.
아집에 사로잡혀 전시회 일정을 마음대로 미루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기 작품조차 포기하는 모습에 질려버렸다.
어제 일은 단지 촉매제.
그녀는 이런 상황마저 배경과 돈으로 해결하려는 그에게 실망했다.
직장 상사로서도.
연인으로서도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끝내자.”
그녀가 이별을 고했다.
갤러리에 혼자 남은 앙리 마르소는 어제의 굴욕과 분노 그리고 배신감에 곁에 있던 의자를 걷어차 버렸다.
* * *
할아버지가 화나셨다.
“그놈과 엮이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몸과 호랑이 같은 얼굴로 귀청이 찢어질 것처럼 호통친다.
무섭다.
“하셨어요.”
“그런데 왜 그랬어! 그러다 그놈이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멱살을 잡자마자 코를 뭉개줬지만 말대답할 상황이 아니다.
“잘못했어요.”
“그리고! 누가 남의 작품에 손대라고 하디! 아무리 수정할 수 있어도 그러면 안 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다만 그놈이 그 아름다운 조각상을 ‘돌조각 따위’라고 하는 바람에 저질러 버렸다.
그 일만큼은 사과할 일이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으면 어떻게 해야 해!”
“다신 그러지 말아야 해요. 앙리 마르소한테 사과도 할게요.”
“그놈한테 사과를 왜 해!”
이건 생각지 못한 반응이다.
“……해야 하지 않아요?”
“그건. 아무튼 안 해도 돼!”
누구보다도 이성적이던 분이 몹시 흥분하셨다.
“감히 멱살을 잡아? 그 돼먹지 못한 놈 내 진즉에 찢어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마세요.”
정말 그럴 것 같아 무섭다.
할아버지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놈 문제는 할아버지가 해결할 테니 훈이 넌 반성문 써. 한 번만 더 그랬다간 할아버지한테 아주 혼날 줄 알아!”
이 나이에 반성문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자네! 나 좀 봅세! 당연히 마르소 그 개자식 때문이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 할아버지가 ‘나쁜 말’을 쓰신다.
반성문. 안 쓰면 안 될 것 같다.
‘이게 어디야.’
내가 어렸을 적엔 잘못했다간 얻어맞는 건 고사하고 며칠을 굶기는 것도 다반사였는데.
이렇게 화가 나셨는데도 고작 반성문이라니 이성적으로 대응하시는 게 대단해 보인다.
“할아버지…….”
조심스럽게 부르자 할아버지가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쉬곤 나를 끌어안았다.
“그래. 이놈아. 할아버지가 너 미워서 이러는 거 아니야. 다 너 걱정하고 잘되라고 하는 거야.”
내가 겁먹었다고 생각하셨는지 등을 툭툭 쓸어내리셨다.
겁을 먹긴 했지만 조금 다르다.
“마르소랑 만나고 싶어요.”
상냥하던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내 양팔을 붙잡고 팔을 쭉 폈다.
“그놈 일은 잊으라니까! 왜 일을 복잡하게 하려고 들어?”
“아까워서요.”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렇게나 실력 있는 사람이 그러고 사는 게 아까워서 그래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지만 그의 감각과 기술만큼은 진짜였다.
그가 알량한 자존심이 아니라 자부심을 가지고 미술을 이어간다면 정말 훌륭한 작품을 만들 거라 믿는다.
이대로 두었다간.
폴 고갱과 다를 바 없을 거다.
그토록 뛰어났지만 결국 후대엔 쓰레기로 알려진 오랜 친구처럼.
“훈아, 그런 인간은 아무리 해도 안 고쳐져. 그럴 거면 주변에서 진즉에 고쳤지.”
“쓴소리해 주는 사람이 없었을 거예요. 워낙 잘났으니까요.”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그걸 왜 네가 해.”
“그 사람 작품 좋아서요.”
앞으로 그가 어떤 작품을 보일지 궁금하다.
그가 새롭게 쓸 미술의 역사가 어떨지 기대되어 포기할 수 없다.
“훈아, 반 고흐 미술관에서 폴 고갱 이야기 들었지?”
“네.”
“반 고흐가 아무리 호의를 가지고 대했어도 그는 변하지 않았어. 진심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야.”
할아버지 말씀대로 그는 변하지 않았고 그에게서 얻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타인을 미워하면 내가 더 힘들어진다.
적어도 그를 진심으로 대했던 난 후회하지 않으나, 폴 고갱이 내게 보낸 편지에는 두려움이 묻어나왔다.
내가 ‘귀를 자른 범인’을 말할까 봐 두려워한 것이다.
“괜찮아요.”
작품만 봐도 안다.
배경과 외면은 너무나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포장하나, 그렇게 포장된 모습이 자신이 아님을 알기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번만 더 만나볼게요.”
“안 돼.”
할아버지가 눈을 부릅떴다.
사백안을 한 채 눈썹 사이를 잔뜩 모으고 인중을 접고 있다.
“…….”
다시 말하면 당장이라도 또 노성을 터뜨릴 것 같다.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