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3화
8. 화룡점정(5)
결국 그는 본인 외에 어떠한 것에서도 답을 찾을 수 없다.
자기 눈을 뽑아 박제하지 않는 이상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애가 강한 만큼 주변 사물이 성에 차지 않을 테니 그 많은 자화상을 그려왔을 터.
이곳에 전시된 수십 점의 자화상이 그 증거다.
당당히 본인의 이름을 내걸고 766점의 자화상을 발표할 만큼 본인의 실력을 자부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쁜 보석, 귀한 보석을 찾을 것이 아니라.
마르소 가문의 보석인 앙리 마르소 본인이 직접 그려넣어야 한다.
그것만이 그가 <마르소의 보석>을 완성할 유일한 방법이다.
물론 대리석 위에 투명하게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을 그리는 일이 쉽진 않다.
하지만 수십 년간 반복해 자화상을 그렸던 앙리 마르소라면 가능할 것이다.
“그래.”
앙리 마르소가 시선을 옮겼다.
입술을 깨물곤 고민하는가 싶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마르소의 보석>을 올려다보곤 마음을 굳힌 듯 직원을 불렀다.
어떤 보석이라도 그동안 피땀 흘려 단련한 손보다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듯하다.
“내려.”
갤러리 직원들이 당황했다.
“네? 갑자기 무슨.”
“내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그리는 게 빠를 텐데, 참 번거로운 사람이다.
조각상이 받침대와 분리가 된다고 해도 저만한 대리석상이면 사람의 힘으로는 들기 힘들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웅성거린다.
“무슨 일이에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미셸 플라티니가 다가왔다.
“대표님께서 이걸 내리라고 하셔서…….”
미셸 플라티니가 앙리 마르소를 노려보더니 스마트폰을 꺼냈다.
“네. 마르소 갤러리예요. 지게차 보내주세요. 네. 저번에 그거예요.”
그녀의 말에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앙리 마르소와 미셸 플라티니 그리고 내게도 질문을 쏟아냈다.
“무슨 일입니까?”
“조각상을 내리는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마르소의 보석을 전시하지 않을 예정이십니까?”
“미완성이라 그렇습니까?”
“앙리 마르소에게 했던 말이 무슨 뜻이죠?”
정신없는 와중에 방문객들도 수군거렸다.
“뭐야? 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고훈이랑 무슨 이야기 하던 것 같은데.”
“잘 보고 있었는데.”
“완성도 못 했으면서 전시회는 왜 열어? 두 번이나 연기했으면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고뇌. 그러다 폐기하는 과정까지. 저만한 조각상을 만들고도 만족할 수 없는 건가? 파격적이야. 역시 앙리 마르소인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려는 사람, 불평하는 사람, 독특한 해석을 내놓는 사람 등 반응도 언어도 여럿이다.
“뭐야? 왜 저래?”
김지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방법을 찾은 거예요.”
“뭐라 그랬는데?”
프랑스어로 대화해서 못 알아들은 듯하다.
“이미 가지고 있지 않냐고 했어요.”
“응?”
김지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었다.
앙리 마르소가 붓을 들면 알게 될 테니, 미리 알려줘서 그때의 즐거움을 덜고 싶진 않다.
잠시 후.
갤러리 직원들이 방문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작은 기계가 들어왔는데 자동차와는 조금 다르게 생긴 물건이다.
아마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있는 특수한 차량 같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마르소의 보석>이 받침대와 분리되었다.
받침대와 조각상의 높이를 합하면 대충 2m 80㎝에서 3m 사이로 보이니 옮기기엔 부피도 무게도 부담스럽다.
이동을 위해 처음부터 받침대와 조각상을 분리해 만든 듯하다.
인부들이 <마르소의 보석>을 받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이제 남은 건 앙리 마르소의 붓칠.
그가 눈을 그려 넣는 순간 <마르소의 보석>에 생명이 깃들 것이다.
“뭐야? 가지고 가는 게 아니네?”
“결정했나 봐.”
“세상에. 저게 다 얼마야?”
다들 긴장한 듯하다.
김지우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모두 받침대 앞으로 걸어간 앙리 마르소를 지켜본다.
그는 황금빛 대리석상을 보더니 이내 받침대 위로 올라서서 자세를 취했다.
‘무슨 짓이지?’
그 기이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얼이 빠졌다.
“…….”
“…….”
<마르소의 보석>을 내린 인부들도, 갤러리 직원도, 큐레이터 미셸 플라티니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던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창작의 고뇌! 좌절! 절망과 방황 끝에 스스로 미학의 주체임을 깨달은 자!”
다들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던 인간이다.
“붓다! 그 거룩한 이름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다니!”
무슨 말인지 조금도 모르겠다.
혹시나 내가 모르는 어떤 상징이 있나 싶다.
영어로 말한 만큼 알아들었겠다 싶어 올려다보니 김지우가 작게 읊조렸다.
“뭔 개소리야.”
미술 교양을 갖춘 그녀가 헛소리 취급하니, 지금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짝-
누군가 손뼉을 쳤다.
짝짝짝짝-
“종교적인 작품이었구나.”
“번뇌를 표현하려고 했나 봐. 난 상상도 못 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사람들이 미친 소리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아니. 꼭 종교적인 작품이라고 할 순 없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뇌하는 미술가 자체가 예술이란 뜻일지도 모르지.”
심지어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현대 미술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지만, 이 행동이 이해받고 박수받을 일인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든다.
더 큰 문제는 받침대 위의 앙리 마르소가 만족한다는 듯 입가를 슬쩍 들어 올린 것.
앞으로 나섰다.
“당장 내려와!”
앙리 마르소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모욕이다.
그를 위해 먼 길을 찾아온 방문객을 조롱하는 일이며, 수십 년간 단련해 온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다.
저리도 아름답고 완벽한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 저딴 짓을 할 순 없는 법이다.
“저런 걸 만들어 놓고 무슨 짓이야!”
주체할 수 없이 화가 치솟는다.
녀석은 입만 뻥긋거렸다.
“네 말대로 마르소 가문의 보석은 나다. 이보다 완벽할 수 없지.”
“헛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내려와! 그려! 지금까지 뭘 위했던 거야! 이거 완성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이데아보다 나은 그림자는 없다.”1)
관념을 그럴듯한 말로 푸는 것은 철학자가 할 일이다.
예술가는 그것을 구상하고 표현해내는 존재.
저 멍청한 인간을 끌어내려고 발을 옮기니 누군가 뒤에서 나를 잡았다.
“그만 되었다.”
할아버지다.
“구상을 포기하고 관념만을 전달하는 나태한 녀석과 논쟁해 봤자 의미 없어.”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이분과 장미래가 걱정했던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잘못됐다.
적어도 지금 앙리 마르소가 하는 짓은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과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가꾼 관념을 개인의 미학에 따라 표현하고.
그것을 타인이 예술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
예술은.
미술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깊이 공감한 관객이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 이자의 행동에 무의미한 의미를 덧붙이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이런 행위가 만연하다는 뜻.
정말 이것이 예술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걸까.
내가 잘못된 건가, 아니면 지금 현재의 예술이 뒤틀린 건가.
알 수 없다.
그러나 단 하나만은 확실하다.
“무슨 일이야?”
“고훈이잖아? 귀엽다.”
“화내는데?”
“앙리 작품이 마음에 안 드나?”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건.
자신을 갈고닦아 그토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그가, 저 완벽한 조각상을 만든 그가 한계를 인정하기 싫어 도피했다는 것이다.
“……겁먹었지?”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대로 완성 못 할 것 같으니까.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 붙여서 도망치고 싶은 거지?”
“훈아, 말 조심해야지!”
할아버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흥분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예전 말투가 나왔다.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다시 따졌다.
“부끄럽지도 않아? 당신이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건 저 조각상을 완성하지 못한 게 아니라, 자기를 속인 거예요.”
“나야말로 마르소 가문의 보석이다. 그걸 복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있어요. 적어도 자화상 그리는 동안 당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잖아요.”
“그래. 깨달았지. 나를 대체할 복제품 따위 없다는 걸.”
“말 같잖은 헛소리 집어치워! 만들 수밖에 없었잖아! 만들고 싶었잖아!”
앙리 마르소가 자세를 풀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뭘 안다고 설쳐.”
“알아. 저 방에 있는 당신 자화상만 봐도 알아. 당신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그걸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고민했는지 알아. 그런데. 그 끝이 고작 그 위에 서 있는 거야?”
앙리 마르소의 눈에 화가 차올랐다.
이 고집스러운 남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왜? 아주 평생 거기 서 있지? 박제라도 해 줘?”
“뭐?”
그가 앉았던 의자를 끌어 <마르소의 보석> 앞에 두었다.
“훈아, 뭐 하니!”
할아버지가 말렸지만 이 머저리를 이대로 둘 순 없다.
작업대에 놓여 있던 붓을 집고 그가 보석 색을 찾기 위해 썼던 물감을 짰다.
“학생!”
보안요원이 다가오려 했지만 미셸 플라티니가 저지했다.
도리어 내게 고개를 끄덕여 보임으로써,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응원했다.
앙리 마르소는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를 향해 붓을 들었다.
“내려와서 그려. 당신이 아니면 누가 그릴 수 있는데?”
“내가 있는 이상 그 조각상은 가치 없다.”
“……버리겠다고?”
“그래. 돌조각 따위.”
이 멋진 조각상을, 수십 년간 갈고 닦아 이룩한 미학의 결정체를, 본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이것을 돌조각 따위로 취급하다니.
이 사람은 분명 방향을 잘못 잡았다.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
의자에 올라갔다.
“뭐 하려는 거야?
“설마…….”
“말려야 하지 않나?”
“큐레이터가 가만있는데?”
아집과 슬픔으로 가득 찬 에메랄드빛 눈.
“훈아!”
조각상에 붓을 대자 갤러리에 비명이 가득했다.
신경 쓰지 않고 물감을 짜 동공을 그려나가는데 할아버지가 허리를 잡았다.
“무슨 짓이냐! 어?”
“저 한심한 인간은 정신 좀 차려야 해요.”
부와 실력.
모든 것을 갖췄음에도 자신의 명성에 기대어 그저 화제를 만들고 실체 없는 허상으로 도피한 그를 용서할 수 없다.
그를 노려보니.
앙리 마르소가 받침대에서 내려왔다.
나를 향하던 시선을 돌려 <마르소의 보석>을 보더니 까득 이를 갈았다.
“무슨 짓이야.”
“왜. 쓸모없어진 거 아니었어? 다른 사람 손에 닿으니 이제 소중해 보여?”
말이 없다.
한참을 노려보다가 내게서 붓을 빼앗고선 조각상 눈으로 향했다.
몇 번을 망설이더니.
“빌어먹을.”
붓을 떨어뜨렸다.
그가 떨어뜨린 붓을 주워서 그에게 향했다.
유화 물감이니 얼마든지 덧그릴 수 있다. 마르기 전이라 지우고자 하면 얼마든지 깨끗하게 지울 수 있다.
문제는 이 사람의 의지.
본인 손으로 완성하는 것만이 남았다.
“들어요. 그려요. 당신 눈을 당신보다 잘 그리는 사람은 없잖아요. 지금껏 수천 번 그렸잖아요.”
<마르소의 보석>을 완성할 수 있는 건 마르소의 보석 앙리 마르소뿐이다.
“……잖아.”
목소리가 잔뜩 떨려서 무슨 말인지 못 들었다.
“뭐라고요?”
“잘 그렸잖아! 이 애새끼가!”
앙리 마르소가 내 멱살을 잡았다.
가만있을 줄 알았던 모양.
빡-
있는 힘껏 머리를 들이박았다.
* * *
1)이데아: 그리스어 에이도스에서 유래된 말로 플라톤이 주장한 형이상학. 플라톤은 이데아야말로 모든 사물의 본질이라고 주장했고, 물질은 이데아의 그림자로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