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8화 (28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8화

7. 불쌍한 사람(5)

[앙리 마르소, 고훈 직접 찾아가]

[두 천재의 두 번째 만남]

[앙리 마르소의 무한한 애정]

11월 29일. 세계적인 사업가, 화가, 조각가, 수집가 앙리 마르소(32세)가 암스테르담을 방문했다.

27일 일간지 르 피가로를 통해 고훈을 자신의 개인전에 초대한다는 뜻을 밝히고 이틀 만의 일이다.

어떠한 작가와도 동업하지 않았던 그의 작업 스타일을 고려했을 때 이번 일은 큰 의의를 가졌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 미술계의 중론이다.

현장에 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의견이 맞지 않은 듯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 고훈이 자신의 그림을 넘겨주었다.

일부 포럼에서는 그가 고훈의 그림을 조금이라도 빨리 받아보기 위해 직접 움직였을 거라는 추측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고훈은 며칠 전 한국의 일간지 대한일보를 통해 앙리 마르소가 자신의 그림에 첫눈에 반했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 한창 인기를 누리는 앙리 마르소와 신인 화가의 만남이 기대된다.

12월 4일 토요일로 예정되었던 앙리 마르소의 전시회는 일주일 연기되었다.

-쥐스탱 가니마르(르 몽드)

사소한 행동 하나도 기사화되는 앙리 마르소의 파격적 행보.

더욱이 거장 중의 거장으로 명성을 떨친 송백 고수열의 손자와 관련된 일이었기에 미술계의 관심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각 나라 언론이 관련 기사를 뿌려댔다.

└저럴 인간이 아닌데……?

└그 거만한 앙리 마르소가 저렇게까지 할 정도면 진짜 뭐 있는 거 아냐?

└그렇겠지. 고수열 손자라고 하더니 진짜 재능 있나 봐.

└그림 봤어? <해바라기>는 진짜야.

└집안 자체가 예술 쪽에 일가견 있나 봄.

└그래서 결국 전시회 참가는 안 하는 거?

└그림 줬다고 하잖아. 처음에 거절한 이유도 선약이 있어선데 빠듯한 일정에도 한 작품 정돈 준비한 모양인 듯.

└성의 표시는 한 거네.

└앙리 마르소가 직접 찾아갈 정도로 친하니까 ㅇㅇ.

└무슨 그림인데?

└아직 모름. 앙리 마르소 개인전에 가야 볼 수 있을 듯.

└개인전이라고 하기엔 고훈 작품도 걸릴 텐데?

└아 그러게.

└축전 느낌으로 봐야지.

└둘이 스타일 완전 다르던데 친하게 지내는 거 보면 되게 신기하네.

└앙리 마르소 전시회가 왜 연기되었나 싶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네. 고훈 그림도 기대된다.

“제기랄!”

한편 본인의 갤러리에서 기사를 접한 앙리 마르소는 눈을 뒤집고 발광했다.

언론이 멋대로 보도한 내용에 더불어 한참 어린 꼬맹이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작가님, 이건 어디에 걸어둘까요?”

비서 아르센이 고훈이 암스테르담에서 준 <손님>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앙리 마르소의 얼굴이 사정없이 뒤틀렸다.

“미쳤어? 그걸 왜 걸어!”

그의 난폭한 언행에 익숙한 갤러리 직원들과 아르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포장지를 뜯었다.

“아.”

고훈의 <손님>이 드러난 순간.

마르소 갤러리 수석 큐레이터 미셸 플라티니와 아르센이 입을 벌렸다.

한 쌍의 연인을 그린 색연필화였다.

진지한 표정의 여성과 웃는 남성이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었다.

사실 그림 실력은 평범했다.

열 살 소년의 그림이니 놀랍지, 이 정도의 묘사력은 프로라면 응당 갖춰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작품을 접한 미셸 플라티니와 앙리 마르소를 보좌하며 보는 눈을 키운 아르센은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색채감 때문.

마치 노란색 필터를 씌운 것처럼 표현된 두 인물에게서 알 수 없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수석 큐레이터 미셸 플라티니가 입술을 매만지며 그림을 자세히 살폈다.

‘아니야.’

처음에는 연인의 관계나 그림을 대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노란색 필터를 씌운 듯 덧칠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또 다른 그림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해바라기야.’

노란색 필터처럼 흐린 그림은 분명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였다.

<손님> 주변이 액자처럼 그려져 있으니 이것은 <해바라기>가 보는 관람객을 표현한 것이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두 인물의 표정을 함께 표현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실로 놀라운 구도였다.

‘세상에.’

미셸 플라티니가 침을 삼켰다.

<해바라기>는 반 고흐의 자화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서 관람객을 보는 시선은 곧 빈센트 반 고흐의 시선이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위대한 화가가 현대 자신의 미술관을 찾은 이들을 보는 눈이 이렇게 따뜻하지 않을까.

열 살 소년이 이런 발상과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대표님.”

미셸 플라티니가 앙리 마르소를 불렀다.

“대표라고 부르지 말랬지!”

“이것 좀 봐요.”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코냑을 따르던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렸고 동시에 술병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

미셸 플라티니가 찾아낸 숨은 의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넋을 놓고 있으니 미셸 플라티니가 입을 열었다.

“이런 걸 공개하지 않으면 안 되죠.”

앙리 마르소가 천천히 <손님> 앞으로 다가갔다.

기발한 구도와 마치 그림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은 심상 덕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걸어요.”

미셸 플라티니의 말에 앙리 마르소가 정신을 차렸다.

“말이 되는 소릴 해. 내 개인전이야.”

“이미 다 보도된 일이잖아요. 그림도 받았고.”

“받고 싶어서 받은 게 아니야!”

“그래서. 안 걸 거예요?”

앙리 마르소가 <손님>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가슴에 선명히 와닿았다.

마음을 움직였다.

잡동사니가 나뒹구는 미술계에서 앙리 마르소의 가슴을 뛰게 하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알아서 해.”

신경질적으로 답한 앙리 마르소가 밖으로 나섰다.

미셸 플라티니는 솔직하지 못한 그의 뒷모습에 피식 웃었다.

‘정말 인물이 나긴 했네.’

그러고는 고훈의 <손님>에 다시금 빠져들었다.

* * *

앙리 마르소가 다녀갔음을 안 할아버지가 내 얼굴과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다친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아무 일 없었어요.”

무슨 해코지라도 당한 건 아닌지 걱정하신 듯하다.

“내 이놈을 그냥!”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그를 죽일 것처럼 방을 나서려 했다.

케빈과 함께 말렸지만 힘이 얼마나 센지 복도까지 끌려나갔다.

“아무 일 없었다니까요!”

“케빈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있었잖아요!”

말로는 할아버지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없을 듯하다. 눈동자가 호랑이처럼 사납다.

“놔라! 그놈 관짝에 못을 박아야 다리 뻗고 자겠다.”

“감옥에서 다리 뻗고 자봤자 뭐 해요! 쭈그려도 침대 위가 낫지!”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을 잡고 있으니 정말 사람 한 명 죽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한참을 실랑이다가 겨우 진정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불쌍한 사람이에요.”

할아버지와 케빈의 얼굴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뭐라고?”

“뭔가 상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작은 일에도 과민반응하는 거고요.”

내가 그랬다.

믿었던 사람에게 너무나 많이 배신당했고,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그 상처가 너무나 커서.

아주 작은 일에도 예민해졌다.

더 상처받기 싫었으니까.

“후우. 이 착한 녀석에게.”

할아버지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며 안심시킨다.

“걱정 마라. 할아버지가 다신 그런 일 없게 하마.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하지 못 할 거야.”

“네. 할아버지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가 정말 미술을 사랑한다면 언젠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올 것이다.

케빈 씨와 함께 저녁을 먹은 뒤 호텔로 돌아왔다.

“다른 미술관에는 안 가고 싶어?”

그러고 보니 벌써 일주일 가까이 반 고흐 미술관에 있었다.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너무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과거의 회한을 풀어냈으니, 역사 속 대가들을 만나는 즐거움 또한 누리고 싶다.

“가고 싶어요.”

“흠. 바로 옆에 시립 미술관도 좋고 국립 박물관도 좋지. 렘브란트를 볼 수 있거든.”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

렘브란트 반 레인.

카라바조가 명암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면 렘브란트는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빛과 그림자를 이상적으로 사용한 화가다.

그의 작품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칠 순 없다.

“국립 박물관이 좋겠어요.”

“허허. 그래.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다 구경하자꾸나.”

가슴이 두근거려 좀처럼 진정할 수 없다.

렘브란트의 작품을 몇 번 본 적 있지만 국립 박물관이라고 하니 분명 어마어마한 작품들이 함께 있을 것이다.

흥분한 가슴을 간신히 달래는데 할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요?”

“그렇게 좋으냐?”

“네.”

당연한 것을 물으신다.

* * *

고수열이 잠든 손자를 위해 불을 껐다.

아홉 시만 되면 누가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드는 것을 보면 아들 부부가 교육을 잘한 듯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면도 있지만, 그림을 대할 때만큼은 그보다 순수할 수 없었다.

반 고흐 미술관에 다닌 요 며칠간 고훈은 특히나 밝아졌다.

그것이 고수열에게는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부모를 잃은 큰 사고를 겪고.

죽음에서 돌아온 고훈은 몹시 불안해하고 우울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오직 그림을 그릴 때만 집중하였는데, 그마저도 마치 무엇과 싸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고훈이 반 고흐 미술관을 찾으며 점차 밝아지니 역시 유럽 환경이 손자가 성장하기에 좋다고 판단했다.

‘어릴 적에 살았던 곳이니 마음도 편하겠지.’

고수열은 고훈이 즐겁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고자 벌써 한 달째 여러 가능성을 따져 보았다.

아직 다른 도시를 가보진 않았지만, 암스테르담은 고훈의 지식욕과 감수성을 충족시켜 주기에 더할 나위 없어 보였다.

암스테르담의 게리트 리트벨트 아카데미는 순수 예술과 디자인을 함께 배울 수 있는 좋은 학교였다.

고수열이 수첩에 적어둔 여러 도시 중 암스테르담에 동그라미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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