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71화 (280/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71화

18. 볼 수 없는 걸 보여주는 사람(5)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차시현은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저 작은 머릿속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림 좀 보여줘.”

어떤 그림을 그려왔는지 보고 싶어 묻자 차시현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없어.”

“태블릿 있잖아.”

“저장을 안 해서.”

“하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믿을 수 없다.

차시현은 어린 것치고 색을 다루는 감각이 제법이었다. 한두 번 그려본 솜씨가 아닌데, 가지고 있는 그림이 하나도 없다니.

말이 안 된다.

문득 어제도 완성한 그림을 저장하지 않고 지운 것이 떠올랐다.

“왜?”

대답하지 않는다.

듣지 않아도 아버지가 반대한다는 말로 대충 유추할 수 있다.

내 생각보다 훨씬 엄한 가정인 듯한데, 대체 그림 그리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면 아들을 이렇게 괴롭히는지 모를 일이다.

“왜 그렇게 싫어하셔?”

차시현이 할아버지 눈치를 보았다.

혹시나 자기 말을 이르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눈치다.

할아버지도 안쓰러웠는지 차시현을 안심시켰다.

“아버지가 오늘 일은 모를 테니 걱정하지 말려무나.”

차시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이더니 말을 몇 번 삼켰다.

억지로 몰아붙이고 싶지 않아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그림 많이 그리자. 네 붓도 준비해 놨어.”

“……고마워.”

무뚝뚝한 녀석이 제법 귀여운 면도 있다.

그러나 저 가슴속에 담아둔 설움이 느껴져서 참으로 안타깝다.

“다 왔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앞장서서 작업실로 안내했다.

“멋지지?”

대답할 생각도 안 드는 모양.

차시현이 입을 살짝 벌리곤 작업실을 살폈다.

그 눈이 초롱초롱하다.

“자, 여기가 네 자리.”

어제 할아버지가 따로 준비해 주신 이젤과 의자를 가리켰다.

연필과 지우개, 붓, 팔레트, 물감, 나이프를 챙겨주자 아주 조심스럽게 들고 살폈다.

마음껏 그리라는 의미로 40F 캔버스를 꺼내주었다.

“맘껏 그려.”

억눌린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 큰 캔버스를 주긴 했지만 아마 막막할 거다.

막상 그리려고 하면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당분간은 진도가 빠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수도꼭지를 틀었다.

쏴아아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물이 차오른다.

물통을 가지고 돌아서자 성격 급한 녀석이 벌써 물감을 짰다.

아이보리 블랙과 울트라 마린, 티타늄 화이트다.

정말 써도 되냐고 묻는 듯 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붓을 어떻게 쓰는지, 색 조합은 어떻게 하는지, 밑칠을 왜 해야 하는지 등 알려주고 싶은 게 많지만 우선은 그냥 즐기길 바란다.

‘울트라 마린은 아껴 쓰면 좋겠는데.’

녀석이 큰 붓으로 아이보리 블랙을 푹 찍어 캔버스에 칠했다. 전부 검게 칠하려는 작정이다.

검은색부터 칠하면 마르기 전까지 덧칠하기 힘들 텐데.

지식이 있으면 나올 수 없는 과감한 행동이지만, 스스로 깨닫는 과정이 중요하다.

아직은 밑칠을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를 테니까.

턱을 괴고 지켜보고 있으니 이번에는 사용한 붓으로 짜 놓은 울트라 마린을 건드린다.

색이 섞이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캔버스에 찍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듯 당황한다.

캔버스와 붓, 팔레트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어떡해?”

곧 울 것 같은 표정이라 웃고 말았다.

“끅끄끅끅.”

“우, 웃지 마.”

겨우 웃음을 멈추었다.

“처음은 밝은색부터 쓰는 게 좋아. 물감도 섞어서 쓸 생각 없으면 씻는 게 좋고.”

“……태블릿에선 괜찮았는데.”

나도 처음에는 너무 사실적이라 신기했는데, 태블릿으로만 그림을 그렸던 차시현에게는 당연한 상식이 없을 수도 있겠다.

“좀 마르면 덧칠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

차시현이 캔버스를 보더니 입을 삐죽 내밀었다.

“틀렸어…….”

“아니야.”

흥미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 줄 때다. 아무리 멋진 그림을 그린 화가도 처음에는 정말 못 그렸다는 걸 알아야 한다.

“틀린 그림은 없어.”

“정말?”

첫인상과 달리 감정을 참 잘 드러내는 아이다. 금세 얼굴이 밝아진다.

“응. 그냥 못 그린 거야.”

차시현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 * *

-네. 저녁 챙기고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비서로부터 아들 이야기를 보고받은 EI제당 차재우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아들 표정이 좋지 않고, 친구 이야기도 하지 않아 걱정하던 중에 다소 안심했다.

‘괜한 일 없으면 좋겠는데.’

다만 우려하는 일이 남았다.

친구와 놀고 싶다는 말을 처음 듣기도 했고.

고수열 화백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지만, 혹시나 아들이 고훈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린다고 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차재우는 현실을 외면하는 부류를 혐오했다.

이름 없는 화가였던 부친 차상철은 가계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내가 하루 14시간씩 설거지를 하고 오든, 아들이 밥을 먹든 말든 오직 나무만 그려댔다.

폭언은 일상이었다.

자기가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기득권 때문이라고.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깔보지 말라며 본인의 피해 의식과 열등감을 가족에게 풀었다.

술을 먹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모친 김미경이 홀로 돈을 벌어와 집안일까지 도맡은 것을 보며 성장한 차재우는 아버지를 증오했으며.

고생한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하고자 마음먹었다.

깊은 한 때문일까.

차재우는 국내 최대 식음료 제조업체의 대표이사직까지 오를 수 있었고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들과 함께 그가 바라던 행복한 가정을 영위했다.

유일한 오점은 차마 혈육이라 내치지 못한 아버지.

차상철은 전처럼 폭력을 행사하진 못했지만 손자 차시현에게 자신이 못다 한 꿈을 투영하려 했다.

차상철이 차시현에게 말을 걸 때마다, 아니, 그가 아들과 함께 있는 것조차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시현아, 넌 재능이 있어.’

‘할아버지가 그림 가르쳐 주마.’

‘어떠냐. 할아버지가 그린 나무.’

‘선을 그렇게 쓰면 안 돼. 다시 해 봐.’

그 저주스러운 세뇌에 아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순간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열망이 들끓었다.

그날 이후 차재우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 아들을 물들이지 못하도록 철저히 배제했다.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아들이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적어도 본인의 의지로.

스스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하길 바랐다.

아들에게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줄 능력이 충분했지만 차재우는 아들이 자신의 재산에 기대어 무책임하게 살길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판단하기엔 아들은 너무 어렸다.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것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조차 모를 나이였고.

무엇보다 조부로부터 받은 영향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다.

좀 더 나이를 먹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전까지는.

자유롭게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어느 것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 * *

손자가 친구를 데리고 온 날.

솜씨를 발휘하기로 마음먹은 고수열은 찜닭 레시피를 확인했다.

‘닭 대신 오리를 써도 괜찮겠지.’

재료를 확인하던 고수열이 눈매를 좁혔다.

“찜닭에 누가 콜라를 넣어?”

잘못된 레시피를 찾았다고 생각한 그가 다른 사람이 소개한 찜닭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이번에도 역시 단맛과 색깔을 내기 위해 콜라를 넣길 추천한다고 나와 있었다.

“제정신들이 아니구만.”

단맛이라면 배, 대추, 양파에서 나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고수열이 과일과 채소를 잔뜩 넣었다.

손자 몸에도 좋을 거라 판단했다.

“어디 보자. 물은 얼마나 넣어야 하나?”

일단 익혀야 하니 모든 재료가 잠기도록 물을 부은 고수열이 가스레인지를 켰다.

“이제 다 됐나?”

안 하던 요리를 하느라 피곤한 그가 거실 소파에 앉았다.

푹 삶아야 육질이 부드러워지고 뼈가 잘 발라질 터.

여유롭게 TV를 틀었다.

10분쯤 지났을까.

맛있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맛이나 볼까.’

고수열이 주방으로 향했다.

냄비를 연 고수열이 깜짝 놀랐다.

“물이 왜 이렇게 많아?”

채수가 나오는 것을 상정하지 못한 고수열이 국물을 떠 간을 보았다. 밍밍하기 그지없었다.

단맛도 없었다.

“이거 진짜 콜라를 넣어야 하나?”

간장을 넣었음에도 매장에서 먹던 그 색이 나오지도 않았다.

맛소금과 간장을 조금씩 넣어봤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손자 친구에게 맛없는 음식을 먹일 순 없어 지금이라도 배달을 시켜야 하나 고민하던 고수열의 눈에 짜장라면이 들어왔다.

잠시 후.

짜장라면 분말을 넣고 푹 끓인 오리탕을 맛본 고수열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색도 진한 갈색으로 잘 빠졌고 간도 적절하며 감칠맛도 일품이었다.

처음 구상과 달리 탕이 되어버렸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얘들아, 밥 먹자.”

고수열이 음식을 덜어내며 아이들을 불렀다.

고훈과 차시현이 나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그가 깜짝 놀랐다.

“아이고 세상에.”

캔버스 대신 몸에다 그림을 그렸는지 옷이고 얼굴이고 손이고 물감으로 엉망이었다.

그러고도 뭐가 좋은지 두 아이의 표정이 밝았다.

“뭘 했길래 이래? 응?”

“붓을 못 써서 손으로 그려보라고 했어요. 재밌었지?”

“응!”

“아이고. 빨리 벗어라.”

“너도 벗어.”

고훈이 상의를 벗고 소금을 챙기며 재촉했다.

“어?”

“빨아야 하잖아.”

차시현이 당황하여 망설였다. 오늘 처음 함께한 친구와 처음 본 할아버지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대로 가면 그림 그린 거 아실걸?”

너무 즐겁게 논 탓에 아버지에게 들킬 걸 생각하지 못한 차시현이 냉큼 옷을 벗었다.

“이거 지워져?”

“응. 소금물에 넣어뒀다가 식초로 빨면 깨끗해져.”

고훈이 화장실 대야에 소금과 물을 받아 옷을 넣었다.

그래도 못 미더운지 불안해하는 차시현을 달래주고자 샤워기로 물을 뿌렸다.

“무슨 짓이야!”

“걱정하지 마. 괜찮다니까.”

고훈의 웃는 얼굴을 보자 아버지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던 가슴이 다소 진정되었다.

차시현이 샤워기를 빼앗아 고훈에게 물을 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