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23화 (27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23화

55. 화룡점정(28)

[화가, 관계를 그리다]

8월 1일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개막했다.

낮 기온 30도를 넘어선 무더위도 미술가와 미술 애호가들의 열정을 넘어서진 못했다.

173명의 미술가가 참가한 세계 최대의 미술 축제는 개막 닷새 만에 방문객 270만 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명성을 이어갔다.

미술계를 대표하는 미술가들 사이에서 단연 주목받은 작가는 한국의 천재 화가 고훈과 프랑스의 영웅 앙리 마르소였다.

두 화가는 개막 전부터 우정을 과시해 왔다.

화가 공동체 쇼콜라티에를 창립한 데 이어 한국과 프랑스 양 국가의 공동 전시관을 설립했으며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카셀 도큐멘타에도 함께 참여했다.

그런 두 사람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어떤 작품을 발표할지 귀추가 주목되던 가운데 고훈의 <149,597,870.696㎞>와 앙리 마르소의 <2년 8개월>이 공개되었다.

고훈의 <149,597,870.696㎞>는 밤에도 노을빛을 간직한 단풍잎을 표현한 작품이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제목으로 정한 이유를 고민해 보면 고훈이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149,597,870.696㎞>는 단풍이 태양을 그리워한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단풍은 기나긴 밤 노을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해가 떠오르면 다시금 노을빛으로 빛난다.

앙리 마르소의 <2년 8개월>은 그런 단풍을 위해 존재한다.

한국‧프랑스 공동 전시관을 통째로 활용한 그는 지하에 단단히 뿌리 내린 나무를 그려 넣었으며 2층 벽면과 천장을 단풍으로 가득 채워 넣었다.

해 질 녘이 되면 2층 창문을 통해 들어온 노을이 <149,597,870.696㎞>과 정확히 맞닿아 아름답게 빛난다.

공동 전시관 내부에 전시된 19점의 작품 모두 소외되지 않으면서도 고훈의 <149,597,870.696㎞>을 조명하는 건축 디자인적 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년 8개월>은 단순히 고훈을 조명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의 중심에 본인이 있다고 주장해 온 그의 가치관을 망라한 작품이기도 하다.

<2년 8개월> 안에는 고수열, 장미래 등 공동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외에도 여러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계단 벽은 앙리 마티스가 노년에 색종이로 만든 작품이 그려져 있고, 지하 바닥은 빈센트 반 고흐의 밀밭이 깔려 있다.

클림트 특유의 황금 패턴도 찾아볼 수 있다.

회화의 역사를 이어간다는 대담한 태도가 어쩌면 그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한국‧프랑스 공동 전시관이자 앙리 마르소의 작품이기도 한 <2년 8개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루를 꼬박 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문득 왜 <2년 8개월>이란 제목을 붙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전시관을 나설 때야 답을 찾을 수 있었다.

2027년 11월 16일.

앙리 마르소와 고훈은 대한민국 서울 미술관에서 연 신인 작가전에서 처음 만났다.

앙리 마르소는 첫눈에 고훈의 천재성을 알아보았고 <해바라기>를 200만 유로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이 일을 시작으로 고훈은 주류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지만 앙리 마르소에게도 변화가 있었음을 눈치챈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800점이 넘는 자화상과 자각상을 발표하며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과 개인의 존재 가치를 탐구했던 앙리 마르소는 점차 타인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발표한 <그림자>는 고훈의 <해바라기>, <손님>, <서리 밀밭>을 바라보는 본인을 표현한 작품으로 그가 고훈을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낸 첫 번째 작품이다.

아르누보 공모전 우승작이자 세 그림을 하나의 구성으로 했던 <미>에서도 고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본인의 뒷모습을 그린 2번 그림과 과거 거장들을 표현한 1번 그림에 이어 3번 그림은 빛나는 미래를 향한 길가에 해바라기가 놓여 있다.

앙리 마르소는 <2년 8개월>을 통해 고훈을 만난 뒤로 자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알린 것이다.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고 그것을 소중히 여겨 또다시 자신의 발전으로 이어나가는 두 미술가를 통해, 관계의 소중함을 되새겨 본다.

-김지우(보자르)

한국‧프랑스 공동 전시관은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 전시보다도 큰 관심을 받았다.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한 고훈의 <149,597,870.696㎞>와 그것을 조명하면서도 본인의 일부로 승화한 앙리 마르소의 <2년 8개월> 덕분이었다.

전시관을 방문한 사람들은 고수열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장미래의 <작약> 등에 감탄하다가.

1층을 돌고 2층으로 오르고 지하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전시관 자체가 하나의 작품임을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여러 기행을 통해서 고훈과 앙리 마르소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2년 8개월>과 <149,597,870.696㎞>는 더욱 깊숙이 다가갔고.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두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베네치아를 여행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앙리가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개인 전시회로 만들어 버림.

└진짜 제정신이 아니얔ㅋㅋㅋㅋ

└ㅋㅋㅋㅋㅋ돈 많고 금손인 애가 덕질하면 어디까지 가능한지 보여주는 것 같아서 소름 끼치더랔ㅋㅋㅋ

└<2년 8개월>이 의미가 큰 게 관계성 때문인 듯. 분명 훈이 그림 조명하면서도 다른 작품 훼손하지도 않는데 신기하게 가장 앙리다운 작품임.

└ㅁㅈ 그게 진짜 대단하지.

└평론가들도 지금까지 앙리 마르소가 발표한 자화상, 자각상 중에 가장 앙리 마르소를 잘 표현했다고 하잖아.

└철학적인 질문으로도 이어짐.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건 수많은 관계 속에 있기 때문임.

└그게 뭔 말이야?

└부모님의 자식. 선생님의 제자. 누군가의 친구. 이런 관계를 통해 정해지게 된다고.

└앙리가 말하잖아. 모든 미술은 오늘의 본인을 위해 존재했던 거라고. 미친 나르시시스트의 자기중심적인 말이지만 개인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

└둘이 요새 계속 싸워서 불안했는데 <2년 8개월>이랑 단풍 보니까 괜히 뭉클해지더라.

└나도. 둘이 진짜 쉽게 말하는 친구나 그런 사이가 아니라 서로에게 뮤즈가 되어주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았음.

└나만 별론가? 솔직히 나머지 18명 쩌리로 만든 것 같아서 기분 나쁘더라.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고.

└얜 뭐라는 거얔ㅋㅋ 지금 고수열, 장미래, 마은찬, 백설기, 알랭 베르나르, 그레고리 말레 엄청 주목받고 있구만.

└가보지도 않고 헛소리 싸대넼ㅋ

└말 좀 예쁘게 해. 내 생각 말했을 뿐인데 왜 그렇게 공격적이야?

└♥♡♥가보지도 않고 헛소리 싸대네?♥♡♥

└어그로는 무시하고 멋있더라. 훈이도 감동한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었음?

└알렉스가 불한당 전시관 리뷰 영상 올렸음. 훈이가 지하에서 자기 그림 올려다보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하더라.

└우리 핑구 ㅠㅠ

└그 아저씬 그걸 어떻게 찍었대?ㅋㅋㅋㅋ

└홍보대사임ㅋㅋ 사람 많아서 저녁 때 촬영했는데 운 좋게 찍었대.

└얘들아 이거 봐봐. [링크]

└이게 뭐임?

└마르소 갤러리 계정인데 아까 전에 훈이 작품 사진 올라왔음.

└? 이거 그거 아님? 그거.

└<149,597,870.696㎞>?

└ㅇㅇ

└ㄴㄴ 다른 작품임. 훈이가 <149,597,870.696㎞> 그릴 때 여러 점 그렸는데 그중에 하나를 앙리한테 줬었대.

└ㅠㅠㅠㅠ예쁜 사랑하세요ㅠㅠ

└제목이 137년인데?

└?

└137년은 또 무슨 의미지.

└137년 동안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이 분명함. 3,000만큼 사랑해처럼.

* * *

전화를 걸려고 하다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문자 메시지 창을 띄어두고 안녕이라고 해야 할지, 오랜만이라고 해야 할지 또 고민했다.

무슨 말을 적어도 어색해서 썼다가 지우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6일이 지나고 말았다.

시상식이 있는 날이다.

이따가 분명 만나게 될 텐데 어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에 베개에 얼굴을 박고 한숨을 내쉬었다.

“훈아, 일어났어? 밥 먹자.”

할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얼굴이 왜 그래? 잠 못 잤어?”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 앉았다.

룸서비스로 받은 닭가슴살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뒤적이니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셨다.

“녀석. 상 때문에 그래?”

“아니요.”

“그럼?”

할아버지라면 분명 도움 되는 말씀을 해주실 테지만, 앙리 일로 고민하는 걸 말씀드리고 싶지 않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잘 먹겠습니다. 합.”

샌드위치를 크게 물었다.

푹신한 빵 아래 구운 파프리카가 씹히고 동시에 달콤한 소스가 입안 가득 퍼진다.

촉촉한 닭가슴살과 아삭아삭한 양상추 사이마다 올리브가 들어 있어 식감도 맛도 향기도 풍성하기 짝이 없다.

“먹을 만해?”

“맛있어요.”

할아버지도 한입 크게 드시곤 잔에 우유를 따랐다.

“할아버지가 어젯밤에 훈이 예전 방송 봤거든?”

몇 번이나 보셨으면서 질리지도 않으신가 보다. 그리 잘하지도 않는데 계속 보시니 민망하다.

“무슨 방송이요?”

“쉬민케 홍보 방송할 때.”

할아버지가 내게도 우유를 따라주셨다.

“미술 공부를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훈이가 그러더구나. 처음부터 다 알려고 하면 부담스럽다고. 그러니 평범하게 대화할 작은 용기만 있으면 된다고. 아주 큰 용기 말고. 작은 용기.”

내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

“합.”

고개만 끄덕이고 샌드위치를 다시 입에 넣었다.

* * *

마은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기실에서 만난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평소와 달리 싸우지 않고 데면데면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서로를 향해 시선도 주지 않았다.

불한당 참가 작가들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온 신경을 고훈과 앙리 마르소에게 두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가 숙인 고훈이 마침내 슬쩍 입을 열었다.

“초콜릿 먹을래요?”

앙리가 무시하자 고훈이 입술을 씰룩이고는 초콜릿을 꺼냈다. 어색한 상황을 이겨내고자 단것이라도 먹을 생각이었다.

소년이 초콜릿을 입에 넣자마자 앙리가 손을 내밀었다.

“……하나뿐이었는데.”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더욱 어색해진 분위기가 번져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손을 꼼지락댔다.

고훈이 뭐라도 말을 붙여보려고 입을 열 때는 눈을 빛내다가도, 입을 닫으면 한숨을 내쉬었다.

미셸이 답답한 마음에 눈치를 주었지만 앙리는 딴청을 부릴 뿐 응하지 않았다.

다만 그도 고훈의 태도가 전과 달라졌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가방에 있는데.”

“됐어.”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가까워지려면 어색함을 이겨내고 다가갈 작은 용기가 필요했기에, 고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잘 봤어요. 그. 2년 8개월.”

“…….”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말을 뱉어냈다.

“고마워요.”

앙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훈이 이렇게 나오리라곤 생각지 못하기도 했고 고맙다는 말이 간지럽기도 했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뭘.”

“고맙다고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앙리가 고개를 돌렸다.

“자꾸 이럴 거예요? 안 불편해요?”

“전혀.”

고훈이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가 어이가 없어 미간을 찡그렸다.

앙리가 경고했다.

“말해두는데. 난 사과 안 해.”

고훈의 그림을 가지려는 마음을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미셸도 아르센도 심지어 셰리와 푸생 교장도 고훈에게 사과하라고 했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모두가 앙리의 말에 낙담하고 있을 때 고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누가 잘못한 거 아니니까.”

앙리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소유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난 그냥. 조각 프로젝트 준비할 때처럼 같이하고 싶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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